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범어사 주지 경선 스님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행복해지는 게 불교입니다”

▲ 범어사 주지 경선 스님은 “항상 내 탓이라는 마음을 잊지 않고 생활한다면 갈등에서 벗어나 행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찾아왔습니다. 화사한 홍매화가 삭풍을 이겨내고 꽃망울을 활짝 피웠습니다. 봄은 참 좋은 계절입니다. 모든 생명에 생기를 불어넣고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활짝 펴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좋은 계절도 사람에 따라 느끼는 정도가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봄의 화사함을 만끽하고 즐기는 반면, 어떤 사람은 봄의 따뜻함을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괴롭기만 합니다. 불평불만을 토로하고 새로움에 대한 거부감이 가득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개인취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봄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음식을 두고도 사람마다 맛에 대한 느낌이 다 다른 것처럼 개인취향에 따라서는 주변 환경을 바라보는 느낌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같은 것을 보고도 좋고 싫음이 차이가 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마음이 따뜻하고 즐거운 사람은 모든 것이 다 즐겁습니다. 반면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도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어두운 마음이면 고통스럽고
따뜻하면 늘 즐거운 것처럼
모든 건 마음이 작용하는것

탐내고 집착하는 마음 바꾸면
삶은 언제나 행복함 이어져
일상에서 기쁨만 계속될 것

벽에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 걸려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은 그 그림을 보면서 감동을 받고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림을 봐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림이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데 왜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를까요? 그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화엄경’에서는 ‘일체유심조’를 강조합니다. 일체의 모든 법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나타남이고, 존재의 본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모든 것은 다 마음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지요. 이 말과 관련해서 원효 스님의 일화가 자주 소개되곤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원효 스님은 의상 스님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 당시 당나라로 유학을 가려면 당항성을 거쳐 뱃길로 건너갔습니다. 당황성은 지금의 경기도 화성쯤 되는 곳입니다.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은 당항성에 이르러 어느 무덤 앞에서 노숙을 했다고 합니다. 잠결에 원효 스님은 몹시 갈증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너무 갈증이 나 옆에 있는 바가지에 담긴 물을 먹었는데 얼마나 시원하고 맛이 있는지 갈증이 모두 풀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아 잠에서 깨어난 원효 스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잠결에 보았던 바가지가 해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밤에 그토록 맛있게 먹은 물은 해골 속에 담긴 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순간 원효 스님은 깊이 깨달았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 자체에는 본래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것은 모두 마음이 결정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원효 스님은 유학길을 접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렇듯 모든 것은 마음이 좌우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 다스리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이 바뀝니다. 어떨 때는 좋다가도 조금만 언짢은 일이 생기면 금방 돌변합니다.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 때문에 우리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경전을 읽고, 수행을 하는 것은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깨닫기 위한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왜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요? 무엇 때문에 마음이 산란하고 망상의 바다를 헤매고 있을까요? 그것은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탐내는 마음은 집착을 만들어내고, 그 집착 때문에 성내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일차적으로 탐내는 마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탐내는 마음을 버리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 훈련은 일차적으로 지금 자신이 위치한 그곳에서 해야 합니다. 꼭 절에 가서, 선원에 가서 수행을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위치한 그곳에서 마음을 잘 관찰하고 탐내고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고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상에서 바른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계율을 우선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산 생명을 죽이지 않고, 남의 것을 가지려 하지 않고, 음행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일상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오계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잡는 기본입니다.

그런데 가끔 수계식 때보면 계율에 대해 지나치게 부담을 갖고 계 받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물론 부처님이 제정하신 계율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그 계율에 갇혀서도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개차법(開遮法)을 말씀하셨습니다. 비유하자면 계율은 문과 같은 것이어서, 항상 닫혀 있거나 항상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열고 닫음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름에 더우면 문을 열어 놓고, 추우면 문을 닫는 것처럼 계율의 조목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계율도 열고 닫음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계율은 기본적으로 수행자에게 바람직한 삶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라는 점에서 상황에 따라서는 자유자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자기의 편의에 따라 계율을 어기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반드시 계율을 지키겠다는 마음은 갖되 그것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문과 같이 열고 닫을 줄 안다면 계율은 우리의 삶에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계율을 잘 지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달라집니다. 마음이 맑아지고 행동도 정숙하게 됩니다. 마치 옷을 곱게 입으면 행동도 가지런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일찍 출가한 젊은 스님들은 군대를 갔다 와서 예비군훈련을 받았습니다. 평소에 승복을 입으면 조용하고 참한 스님이었는데 예비군복으로 갈아입었더니 싹 달라지는 겁니다. 말도 많고, 행동도 거칠어 저 분이 스님이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마음이 행동을 만들고, 때론 행동이 마음작용을 결정합니다. 그러니 항상 맑은 마음과 바른 행동을 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마음이 산란하면 빛나는 태양에 구름이 드리우는 것처럼 삶도 어둡게 만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은 바로 내 안을 살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삶의 결과물임에도 늘 남 탓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옳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런 행동들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합니다. 잘못을 했다면 참회하고 스스로 거듭나는 삶을 발원해야 합니다. 누구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다툼이 사라지고 불편했던 일도 금새 좋은 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좋은 일도 과욕을 부리면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듭니다.

10여년 전에 제가 범어사 총무 소임을 살 때였습니다. 하루는 어떤 보살님이 정성스럽게 예쁜 꽃을 준비해서 법당의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한 보살님이 그것을 올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보살님은 사찰에서 꽃꽂이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꽃꽂이반은 부처님 꽃 공양을 위해 정성스럽게 꽃꽂이를 하고 있었는데 평소 알지 못한 보살님이 그 자리를 뺏으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보살님은 서로 실랑이를 하다고 나중에는 크게 싸우고 말았습니다.

두 보살님 다 처음의 마음은 좋았습니다. 부처님께 정성스럽게 꽃을 올리는 것은 좋았는데, 그것으로 싸움이 났으니 얼마나 좋지 못한 일입니까. 서로가 한발 물러나서 양보했다면 둘 다 좋은 마음이 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서로 좋은 뜻에서 출발했지만 과한 욕심을 부리면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웃고 있지만, 실제로 여러분의 일상을 돌아보면 이런 우스운 일들을 하고 있을 겁니다. 선한 마음으로 했지만 자신의 과욕으로 남들과 갈등을 빚는 사례는 얼마든지 많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왜 일어날까요? 그것은 일상에서 불교적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에 와서 경전을 읽고, 기도를 하고,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잘할 것 같지만 그 순간을 벗어나면 다시 중생심으로 돌아갑니다. 절에서 기도할 때는 집에 가서 아이들에게, 남편에게 잘해주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닥치면 그것을 까맣게 잊고 맙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수행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선지식들은 ‘도’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잠잘 때 잠을 자고, 일할 때 일하고, 먹을 때 먹는 것이라 말합니다. 있는 그 자리에 집중하는 것이 곧 수행이라는 의미입니다. 기도할 때 집안일을 생각하고, 집안일을 하면서 다른 것에 생각을 빼앗기고 사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세요. 불교는 있는 그 자리에서 집중하고, 그곳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이 가르침을 명심하고, 자신이 처한 그 자리에서 기쁨을 만끽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정리=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이 내용은 범어사 주지 경선 스님이 지난 3월21일 관음재일 법회에서 대중들에게 설한 법문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386호 / 2017년 4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