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0. 봄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기자명 김용규

변화는 언제나 가장 낮은 바닥부터 시작된다

봄을 마주하셨는지요? 도처에 간절한 생명들 앞 다퉈 약동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봄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숲에서 봄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려 한다면 지금이 딱 좋은 시기입니다. 주말에 숲을 걸어보세요. 유심히 숲의 수직구조를 살펴보세요. 꼭대기 공간을 차지하는 교목은 아직 별다른 변화를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내가 머무는 괴산 여우숲의 가장 높은 공간은 곧게 뻗은 아주 큰 키의 낙엽송(일본잎갈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며 차지하고 있는데, 누구도 푸른빛 잎 한 조각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 아래공간을 차지하는 교목 혹은 아교목으로는 산벚나무도 있고 말채나무도 있고 소태나무도 있고 고로쇠나무도 있고 개서어나무도 있는데 이들의 이파리 역시 긴 침묵을 이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숲의 그 아래 공간에는 사람의 키 크기 전후의 높이를 차지하는 쥐똥나무나 화살나무, 회잎나무 같은 떨기나무(관목)들이 있는데 녀석들도 아직은 회색빛으로 침묵 중입니다.

풀이 먼저 푸르러 지고 관목 순서
키 작은 식물 절박함이 변화 동력

선명한 변화는 오직 숲 바닥을 이루는 생명들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키가 겨우 23cm 정도에 불과한 명이나물(산마늘)이 이미 깊은 숲의 바닥을 연두색으로 물들였습니다. 지난주부터 이미 잎 한 장씩을 수확하여 세상에 내놓을 정도입니다. 숲 가장자리, 햇살에 비교적 잘 열려 있는 공간에는 민들레며 쑥이며 달래 같은 키 낮은 생명들이 제 밥벌이(광합성)를 시작했습니다. 모두 봄이 숲의 가장 낮은 자리 바닥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장면들입니다.

나는 봄이 오는 이 장면들을 몇 해 동안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해마다 신비롭고 의아했습니다. ‘물병에 물을 담을 때 물이 차오르는 순서가 반드시 바닥부터인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숲이라는 거대한 공간에 봄이 다가오고 차오르는 순서가 반드시 바닥부터인 것은 왜일까? 가장 낮은 바닥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풀이 먼저 푸르러지고 뒤이어 떨기나무와 관목이 그 다음의 순서로 푸르러지는데, 왜 상대적으로 햇빛에 더 가까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키 큰 나무들(교목이나 아교목들)은 숲에서 가장 늦게 제 잎을 틔워내는 것일까?’ 사람들에게도 물어보았습니다. ‘왜 그럴까?’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했습니다. ‘아마도 추위 때문일 것이다. 2월과 3월의 기온이 아직은 차갑지 않은가. 밤과 새벽에는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이므로 잎을 냈다가 잘못하면 얼어서 동해를 입거나 동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내가 되물었습니다. ‘키 작은 녀석들 역시 같은 조건 아닌가?’

그렇게 몇 년 동안 품어온 질문과 사유에 대해 나 역시 명확한 대답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가설적 결론을 갖게 되었습니다. ‘숲의 봄이 바닥으로부터 오는 이유는 키 작은 식물들, 그 중에서도 그늘을 잘 견디지 못하는 성질을 가진 식물들(陽樹)의 절박함 때문일 것이다.’ 키 작은 식물들 중에는 곰취나 산삼처럼 양분이 풍부한 숲 공간, 빛이 상대적으로 적은 공간에 적응해 잘 살아내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빛이 적은 조건을 견디지 못하는 키 작은 식물들의 경우 조금이라도 빛의 조건이 좋은 장소에서 햇빛의 조건이 좋을 때 생장을 모색해야 합니다. 따라서 키 큰 나무들이 잎을 틔워내기 전에 먼저 잎을 내고 푸르러져야 하는 것이지요. 그 절박함 때문에 그들 키 작은 생명들은 키 큰 생명들이 잎을 내기 전에 푸르러져야만 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늦추위를 감당하기 위한 자기만의 꼴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고요. 이를테면 명이나물 같은 경우, 녀석은 눈 속에서도 푸른 잎을 지탱하는 부동액 성분을 만들어 잎을 보호합니다. 눈 속에서 잎을 내면 푸른 잎을 뜯어먹는 동물이 많으니 그들로부터 자신을 지키자고 알싸한 마늘 향도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또한 땅이 어는 겨울, 자신의 뿌리를 지키고자 매년 정교한 천 조각 같은 섬유조직을 만들어 뿌리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지면상 예를 들지 못한 다른 녀석들 역시 저마다의 꼴로 늦추위와 동물의 간섭을 극복하며 제 절박함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낮은 자리 생명들이 가진 절박함! 숲의 봄은 그 절박함을 타고 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386호 / 2017년 4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