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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기숙 작가

기자명 임연숙

작은 풀꽃 바라보는 자비의 마음

▲ 이기숙 作 ‘서로 마주보다’. 캔버스에 한지, 흙과 채색.

이기숙 작가를 다시 만난 것은 작년 2016년 6월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던 갤러리H에서이다. 늘 끊임없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오랜만에 만난 작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2006년 이후 한동안 작업을 못하다가 최근 몇 년 전부터 다시 붓을 들었다고 한다. 대학시절 부터 항상 쉼 없이 작업을 하고, 늘 새로운 뭔가를 완성해 내기 위해 질주하던 작가가 작업을 쉬었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의 형상 단순화시켜 이미지화
소박한 배경에 명쾌한 색으로 유희

육아의 과정 속에서 아이의 자폐증상은 작가로 하여금 온전히 엄마로서의 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했다고 한다. 가족과의 관계나 생명체와 관련된 일까지도 계획대로 될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자신감이었다. 아이는 엄마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게 했다. 온전히 아이와의 시간을 필요로 했기에 하루라도 붓을 놓으면 큰일이 벌어질 것 같던 그 일을 손에서 놓았던 것이다. 이런 계기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성숙과 자성의 시간이 되었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애정이 담겼고, 작은 미물에 더 많은 눈길이 끌렸다.

작업에 손을 놓고 있는 동안에도 가죽공예의 일종인 가방 만드는 일을 했다. 가죽을 직접 디자인하고 꿰매면서 다음 작업을 위한 공부를 쉼 없이 해왔던 것이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끊임없이 반복하여 칠하고, 긁고, 문지르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꿰매고 자르고, 디자인하는 행위는 다음 작업을 위해 에너지를 응축시키는 시간이었고, 다양한 색채의 조합을 실험하면서 색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불가의 자비심은 유교의 측은지심(惻隱之心)과 비슷한 마음이다. 사물을 대하면서 베푸는 마음, 나를 내려놓으면서 또 다른 새로운 기운을 얻는 것. 작품을 하는 행위와의 거리 두기를 통해 화면에 새로운 생명체의 잔상이 표현되었고 작품 속에 가라앉는 것이 아닌 즐기는 유희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작가 이기숙은 오래전부터 자연의 형상을 단순화시켜 작가만의 독특한 형상으로 이미지화 하였다. 여기에 분청사기를 보고 느낀 깊은 인상과 영감은 작품의 바탕과 맥락이 되었다. 한국적 미감에 대한 많은 고민은 결국 자기스러움을 찾아가는 길이이었고, 분청사기가 주는 거칠고 소박하면서도 단순화되어 모던하기까지 한 형상을 현대적 언어로 표현하였다. 한지를 긁어 내고, 여러 번의 밑작업과 색을 바르는 반복된 행위는 몰입의 시간이다. 삶에 대해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는 에너지는 그림의 화면에 그대로 전해진다.

원하는 색감이 표현되기까지 반복하여 칠하는 행위는 작가에게는 수행의 시간이다. 혼자서 해야만 하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작가는 오랜 시간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야 하고, 작가는 그 시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작품들은 소박한 느낌을 주는 배경에 밝고 명쾌한 색감으로 유희를 느끼게 한다. 풀과 꽃, 나무와 새의 형상은 작가의 인상과 느낌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해보면 모두 자신만의 생각, 삶의 방식이 있어요. 그들 모두가 자신의 삶에서 예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로서 나만 특별하다는 의식이 점차 없어졌지요. 다만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가장 나인 것 같고, 좋고, 편안함을 느끼니까, 그게 제가 존재감을 느끼는 방식이니까 작업하는 게 중요하고, 계속 작업을 할 것입니다. 노력하는 데는 자신 있으니까요.” (TOP CLASS인터뷰 중)

엄마를 필요로 했던 아이는 이제 고등학생이 됐고, 작가는 한층 더 깊이 있는 작품으로 감동을 전한다. 저 끝에서 밀려나오는 깊이감과 화면의 단순한 형태와 색채는 한편의 시를 느끼게 한다. 불가에서의 자비는 작은 것에서 이는 측은지심의 마음에서부터 일 것이다. 자비심의 마음은 대상의 문제가 아닌 그 안에 투영된 나의 문제일 것이다. 나를 위로하는 데서 시작한 마음이 결국 너그럽게 세상의 이치와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임연숙 세종문화회관 전시팀장 curator@sejongpac.or.kr
 

[1386호 / 2017년 4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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