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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머물면 고인다 흘러라

연기 보고 무아 깨달으면 자타가 없다

‘부차 수보리. 보살어법 응무소주행어보시. 소위 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수보리 보살 응여시보시…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

무아성 보는 체험 보시해야
일체중생 무여열반 이끌어
자타 없는 무주상 보시라야
고를 벗어난 환희 또한 무한

‘금강경’의 핵심사상이 등장한다. 응무소주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普施)이다. 크게는 응무소주이생기심이다. 이는 혜능이 듣고 마음이 열렸다는 구절이다. 출가 전에 나무를 팔러 간 장터에서 어느 비구니 스님이 암송하는 걸 듣다 일어난 일이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그렇게 흔들었을까? 늙은 어미를 두고 출가를 할 정도로 충격을 받은 이유가 뭘까?

응무소주행어보시. 일체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 (자의식이라는) 마음이 있는 인간은 일을 함에 있어서, 마음이 반드시 어떤 대상에 머문다. 다른 모든 걸 제치고 선별적으로 특정한 대상에 머문다.
소위 지향성(志向性, intentionality)이다. 일이 끝날 때까지 마음은 그 대상에 머물러 떠나지 않는다. 또 그래야 일이 이루어진다.

색에 머물고 성향미촉법에 머문다. 모습에, 소리에, 냄새에, 맛에, 감촉에 푹 빠진다. 재미나는 얘기에 홀딱 빠진다. 하지만 정작 ‘빠지는 자’에 대한 성찰이 없다. 근·경·식 삼자의 연기놀음에 정신이 없어 연기에 대한 조망을 하지 못한다. 보살에게는 수많은 눈이 필요하다. 최소한 천 개이다. 하지만 아무리 눈이 많아도, 그 많은 눈 위에 항상 하나의 눈이 더 필요하다. 연기법을 보는 눈이다. 자기와 남들과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물질과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리고 물질과 마음 자체도, 연기라는 것을 깨닫는 눈이다. 그리고 그걸 깨달으면 무아의 세계가 열린다.

‘금강경’은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바로 들어간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번 뛰어넘어 바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감)이다. 그 효과는 즉각적이다. 혜능의 마음이 열린 것도 그랬고, 스승 홍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받은 홍매산에서의 야반삼경에도 그랬다.

광대한 세계가 열렸다. 앞산과 뒷산에서 나무만 하던, 무거운 돌을 등에 지고 디딜방아나 찧던, 떠꺼머리총각에게 무형의 세계가 열렸다. 일체의 물리적 정신적 구속을 벗어난 세계가 열렸다. 혜능은 자유를 얻었다.

그런 자유를 타인에게 선사하는 것이 응무소주행어보시이다.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 등 물질도 아니고, 아름다운 음악도 아니고, 향기로운 냄새도 아니고, 맛있는 맛도 아니고, 부드러운 촉감도 아니고, 재미나는 이야기도 아니다. ‘대상’과 ‘대상을 경험하는 자’의 무아성을 보는 체험을 보시해야 한다. 이것이 일체 중생을 무여열반으로 이끄는 길이다. 이것이,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에 머무는 길이다(但應如所敎住).

상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를 하면, 왜 복이 불가사량일까?

첫째, 무여열반에 이르기 때문이다. 중생살이 하면서 흘린 눈물이 4대양을 채우고도 남는다 하는데, 사실은 무한이다. 위음왕불 이전의 시작도 없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무한한 세월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지금까지 흘린 눈물도 무한이다. 무여열반에 이르면 전과 달리 앞으로 무한히 흘릴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복이 무한이다. 둘째, 남의 복도 자기 복이기 때문이다. 주상보시(住相布施)는 일시적이지만 무주상보시는 영구적이다. 수혜자가, 보고 듣고 배운 대로, 시혜자를 따라하면 무여열반에 든다. 그렇게 제도한 무한한 중생이 흘리지 않아도 될 눈물을 다 합하면 무한이다. 뿐만 아니라 그 중생들이 보살이 되어 제도할 중생 또한 무한이다.

그 중생들의 흘리지 않아도 될 눈물이 무한이다. 그리고 고를 벗어난 환희 역시 무한이다. 그 복이 다 보살의 복이다. 보살에게는 자타가 없기 때문이다. 범(梵, Brahman)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범아일여’적으로 자타불이가 아니라, 지혜의 눈으로 연기를 보아 무아를 깨달으면 나와 남이 없다. 여기서 무주상보시가 나온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금은 비록 온전히 실천하기 어려울지라도, 듣기만 해도 미래의 꿈으로 환희심이 솟는다. 조금씩 실천하는 속에서 자유를 얻고 부처님의 마음을 느낀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386호 / 2017년 4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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