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 2017.6.27 화 16:28
> 연재 | 주수완의 미술사학자와 읽는 삼국유사
7. 흥륜사의 재구성위치 불분명하지만 삼국유사 덕에 불멸의 사찰로 기록
주수완  |  indijo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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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4.11  13:5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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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륜사지 인근의 경주지도. 왼쪽 상단에 보이는 현재의 서천교, 하단의 경주 흥륜사지, 그 위로 길을 따라가면 나오는 경주공업고등학교, 상단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대릉원의 위치를 참조해주시기 바란다.

흥륜사(興輪寺)는 아도스님이 발단이 되어 법흥왕이 시작하고, 결국에는 이차돈에 의해 완결된 신라 최초의 공식 사찰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대표적인 사찰들이 이런저런 흔적이나마 남기고 있는 것에 비해서 흥륜사는 완전한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 위치가 어디였는지조차 불분명하며,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한 정보 역시 없다. 그저 조선시대 문집 등을 통해 15세기에는 이미 터만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어쩌면 황룡사처럼 몽고의 침입 때 불탔는지도 모르겠다.

이차돈 순교에 의해 완결된
신라의 최초 공인된 사찰

금교 동쪽 천경림 건립 기록
다리 사라져 확인할 길 없어

미추왕릉, 흥륜사 동쪽 기록
흥륜사 위치 추정 단서 제공

여러 가지 퍼즐 맞추다 보면
경주공업고등학교터가 유력

삼국유사 곳곳 흥륜사 기록
일연 스님 깊은 애정 묻어나


하지만 ‘삼국유사’는 여러 곳에서 흥륜사를 언급하고 있다. 그만큼 신라에 있어 중요한 사찰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렇게 흩어져 있는 정보들을 모아보면 부족하나마 그 실체에 한걸음 다가갈 것이기 때문에 미술사학자들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이 퍼즐 맞추기를 통해 미술사적 사고훈련을 하곤 한다.

우선 흥륜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아도화상의 어머니 고도령은 신라포교를 권하면서 경주에는 과거7불이 설법하던 곳이 있다고 했는데, 그중에 첫 번째가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이었으며, 나중에 바로 이곳에 흥륜사가 세워졌다. 일연 스님은 ‘금교 동쪽’이라는 부분에 섬세하게 주석을 달아 천경림이 어디인지 후세에 전하고자 했는데, 금교는 곧 서천교(西川橋)이며, 속칭으로는 송교(松橋)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님께는 죄송하게도 지금 우리는 금교, 서천교, 송교로 불렸던 이 다리가 어디였는지 모른다. 오늘날의 사전에는 천경림의 위치가 ‘남천의 북쪽’이라고 나와 있지만, 그렇게 서술된 이유는 그곳이 흥륜사지로 알려져 왔기 때문에 역으로 천경림 자리라는 추정일 뿐, 천경림 자체로서 확인된 바는 없다.

   
▲ 흥륜사지로 알려졌던 곳에서 출토된 영묘사명 기와편.

현재 서천교라는 다리가 실재하기는 한다. 하지만 이는 현대에 와서 세워진 다리이기 때문에 고려의 대상은 안 되지만, 일제 강점기의 증언을 들어보면 지금의 이 서천교에서 남쪽으로 돌다리의 흔적이 있었다고 하니, 그것이 금교의 흔적이라면 서천교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또 하나의 단서는 기이 제1 ‘미추왕 죽엽군’ 기사에 나오는데 미추왕(재위 262~284)의 능이 ‘흥륜사 동쪽에 있다’는 기술이다. 이 역시 중요한 단서가 될텐데,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 현재의 대릉원 중의 한 고분이 미추왕릉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이를 반박하는 견해도 있다. 미추왕은 3세기경의 인물인데, 대릉원의 대형 적석목곽분은 4~5세기 무렵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미추왕의 능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삼국유사’의 해석상에서는 미추왕릉설을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대릉원은 고고학적으로 보았을 때는 미추왕릉이 될 수 없을지 몰라도, 일연 스님이 살았던 고려시대에는 그곳이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것처럼 미추왕릉으로 알려져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단은 이를 인정하는데 너무 인색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한편 미추왕은 김알지의 후손으로서 처음 왕위에 올라 김씨 왕조의 시조가 되었던 인물이기 때문에 법흥왕이 흥륜사를 왜 미추왕릉 근처 천경림에 무리해서 세우려고 했었는지 그 의도도 짐작이 간다.

   
▲ 이제는 영묘사터로 더 강하게 추정되는 이전의 흥륜사지는 조사결과 팔각목조쌍탑이 세워져있는 독특한 형태였다.

여하간 이를 인정한다면 흥륜사의 위치를 대략 추정해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학자들은 현재의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를 흥륜사가 있던 곳으로 보고 있으며, 실제로 절터의 흔적이 확인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흥륜사지는 따로 있는데, 경주시 사정동 281-1번지로서 현재는 흥륜사라는 이름의 절도 들어서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까지도 흥륜사터로 알려져 왔던 곳이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동경잡기’에 의하면 흥륜사지는 경주부 남쪽 2리에 있다고 했기 때문에 경주관아가 있던 자리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 흥륜사는 실상 4리 정도에 해당한다. 반면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야말로 ‘경주부 남쪽 2리’에 들어맞기 때문에 근래는 이곳을 흥륜사터로 더 강력히 추정하고 있다.

또 지도상으로 보면 원래의 흥륜사터는 그 동쪽으로 한참을 가야 서천이 나오지만,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는 서천의 바로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일연 스님이 말한 ‘서천교(금교) 동쪽’이라는 표현에 더 잘 어울린다. 참고로 과거 흥륜사터로 알려져 왔던 곳은 새로이 영묘사터로 추정되고 있다.

   
▲ 우리나라 금강문에 보현동자가 봉안되는 전통은 흥륜사 남문 보현보살벽화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은 완주 송광사 금강문의 보현동자상.

위치는 그 정도로 하고 그렇다면 흥륜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선 기이 제1 ‘도화녀 비형랑’에는 흥륜사 남문이 등장한다. 비형은 폐위된 진지왕의 혼령이 도화녀란 여인과 동침하여 낳은 아들인데, 그와 어울려 다니던 귀신 중의 하나인 길달(吉達)이 흥륜사 남쪽에 문루를 세웠고 늘 그 문루에 올라가 잤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를 ‘길달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찰의 문, 예를 들어 일주문이나 금강문 등은 모두 단층이다. 그러나 일본 호류지(法隆寺) 중문, 도다이지(東大寺) 남대문 등은 모두 중층 문루 형식이어서 비교가 되는데, 이 ‘도화녀 비형랑’ 기사를 통해 신라시대 사찰 남문 역시 중층 문루 형식이고 거기다 사람이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을 것임을 추정해볼 수 있다. 물론 길달은 귀신이었기 때문에 올라갈 수 있었고 사람이 올라가는 계단 같은 것은 없었을 수도 있다.

또 하나의 퍼즐은 탑상 제4 ‘흥륜사벽화, 보현’ 기사다. 위의 길달문은 아쉽게도 경명왕(재위 917~924) 때 불에 타버렸기 때문에 921년 대대적으로 복원에 들어갔는데, 이때 제석천이 하늘에서 내려와 공사를 주도했다는 내용이다. 공사를 마치고 제석천이 돌아가려 하자 사람들은 제석천의 모습을 벽화로 그려 남기고자 했지만 제석천은 자기 대신 보현보살을 그려 모시라고 당부했기 때문에 뜻대로 보현보살의 화상을 그려 모셨다. 이 보현보살상을 어디에 그렸는지는 정확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제석천이 도와 새롭게 만들었다는 흥륜사 남문에 그려 모셨던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 금강문에는 문수·보현동자가 금강역사상과 함께 좌우에 모셔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사례는 우리나라만의 특징이다. 어쩌면 이렇게 문에 보현보살을 그리는 전통은 ‘삼국유사’의 ‘흥륜사벽화,보현’ 기사에 나오는 흥륜사 남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을까?

   
▲ 흥륜사 남문이었던 “길달문”도 호류지 중문처럼 중층 구조였음을 삼국유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밖에도 흥륜사와 연관된 작은 퍼즐들이 ‘삼국유사’ 안에 숨겨져 있다. 특히 이 기사들은 흥륜사에서 일어났던 여러 영험한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어 당시 사람들에게 흥륜사가 얼마나 신성한 곳으로 인식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밀본법사는 일찍이 선덕여왕이나 승상 김양도의 병을 치료해준 밀법승이었는데, 특히 김양도의 몸에 들어와 있던 악귀들을 물리쳐 주자 김양도는 신심이 깊어져서 소조로 아미타 삼존상을 제작하여 흥륜사 오당(吳堂)의 주존불로 봉안했다. 여기서 ‘오당’은 흔히 법당으로 해석되지만, 그것이 흥륜사의 주불전, 즉 금당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때가 태종무열왕을 즈음한 시절로 생각되므로 이미 흥륜사가 세워진지 오래인데, 만약 김양도가 봉안한 불상이 금당에 모셔졌다면 원래 있던 불상은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것이 되어, 과연 그랬을까 생각도 든다. 금당이 아닌 다른 부속전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금당이라고 명시된 기사인 ‘삼국유사’ 흥법 제3 ‘동경흥륜사금당십성’에 의하면 금당에 열 분의 신라 고승 소조상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 점도 주목된다.

한 가지 의문은 왜 치료는 밀본법사로부터 받고, 불상은 흥륜사에 봉안했을까 하는 점이다. 원래 선덕여왕이 병에 걸렸을 때 흥륜사의 승려 법척(法?)을 불러 치료하려 했지만 실패하자 비로소 밀본을 부른 것이었다.(그때까지 밀본은 금곡사 소속 승려였던 것 같다) 그때 밀본은 선덕여왕 몸에 들었던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더불어 법척까지 육환장으로 찔러 고꾸라트렸는데, 같은 승려끼리 좀 너무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만약 정말 그랬다면 이는 당시 흥륜사가 문제 있는 승려들에 의해 점거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암시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법척 세력을 쫓아낸 밀본이 이후 흥륜사에 주석하게 되었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흥륜사에 대한 일연 스님의 애정은 그밖에도 ‘삼국유사’ 곳곳에 실려있다. 김현(金現)과 호랑이 여인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김현감호’ 설화에는 2월 초파일부터 15일까지 흥륜사의 법당과 탑을 도는 복회(福會)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 기사에는 흥륜사의 승려 진자(眞慈)가 법당의 주존인 미륵상 앞에 나아가 발원했다는 이야기, 또 ‘전후소장사리’에는 827년에 중국에서 돌아온 고구려 출신의 승려를 흥덕왕이 흥륜사 앞길에 나아가 맞이했다는 기록, ‘사금갑’ 기사에서는 신덕왕이 흥륜사에 가서 행향(行香)하려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흥륜사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후손들의 억울함 때문에 김유신의 혼령이 미추왕릉을 찾아가 호소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돌아보면, 김유신의 혼령은 무덤에서 나와 아마도 흥륜사 서쪽에 있었다는 금교를 건너 흥륜사 앞을 지나 미추왕릉으로 갔음에 틀림없다.

일연 스님의 이와 같은 꼼꼼한 기록을 통해 흥륜사가 대략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떤 전각이 있었고, 어떤 불상이 모셔져 있었는지, 또 어떤 행사를 했었는지 비교적 소상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런 점이 ‘삼국유사’를 읽고 또 읽게 만드는 이유이다. 비록 지금은 그 위치조차 추정에 불과하지만, 기록의 힘은 결국 흥륜사를 불멸의 사찰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주수완 고려대·서울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387 / 2017년 4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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