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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스리랑카 성지순례③-캔디 불치사왕과 민중이 지켜낸 불치사리, 스리랑카인 스승이자 심장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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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4.11  15: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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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리랑카 국보 1호 부처님 치아사리는 현재 캔디 불치사에 봉안돼 있다. 불치사의 아침 테바바(예경·공양의례)는 새벽 5시30분에 봉행된다. 출처=‘The Great Revival’.

‘성스런 치아사리 한 과는 도리천에 모셔지고/ 한 과는 용족(龍族)의 용왕이 모셨으며/ 한 과는 간다라에 모셔지고/ 한 과는 시할레(Seehale. 싱할라의 옛 이름)에 모셔졌네./ 네 과의 부처님 성치는/ 최고의 열반의 축복을 주시니/ 천신과 인간으로부터 경배를 받으신/ 성치에 제가 경배하나이다!’ (정기선 선생 역)

포르투갈, 스리랑카 침입 후
가톨릭 전파 위해 불교탄압

법회집전 스님 사형에 처하고
개종불복 재가자 강물에 던져

치아사리 파괴 예견한 승단
델가무 사원에 숨겨 위기 모면

온 국민 페라해라 축제 때
불치와 하나 돼 평화 기원

불치는 정확히 캔디(Candy)에 자리한 불치사(佛齒寺. The Temple of the Tooth) 내 향실(香室)에 봉안돼 있다. 불치사 예불 때면 어김없이 저 게송이 향실을 가득 채운다고 한다. 플론나루와에 안치됐던 불치가 캔디로 이운된 연유는 싱할라 왕조의 흥망성쇠에 있다.

인도 남부의 타밀(Tamil)족 침입에 몸살을 앓았던 플론나루와의 싱할라 왕조는 15세기 말로 접어들며 대 기근에 신음한다. 잇따른 가뭄으로 농수 수급마저 어려워지자 약 200년 플론나루와 도읍의 역사를 뒤로한 채 좀 더 남쪽인 꼿떼(Kotte)로 내려갔다. 재도약의 꿈을 품고 꼿떼 천도를 단행했으나 이미 왕조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고 있었다. 그 즈음 토호(土豪) 세력들은 나름대로의 힘을 키워가며 스리랑카를 장악해 가고 있었다. 캔디에서도 신흥 싱할라 왕조가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 스리랑카인들에게 불치사리는 부처님이다. 평일에도 불치사는 인산인해다.

1505년 포르투갈이 꼿떼를 침입해 왔다. 포르투갈 군대에 맞설 힘은커녕 왕위 보존을 염려해야 했던 부와네까바후 7세는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항복했다. 그러자 포르투갈은 꼿떼의 싱할라 왕조가 꿈에서라도 상상할 수 없었던 제안을 내놓는다. 토호 세력에 맞설 병력과 군수(軍需)를 지원하는 대가로 장래 왕위를 이을 손자 다라마팔라가 가톨릭 주교가 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불교를 숭상해 왔던 왕조에게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압한 것의 다름 아니다. 왕은 받아들였다. 이를 계기로 가톨릭 전도사들이 스리랑카에 첫 발을 디뎠다.

꼿떼를 손에 넣은 포르투갈은 콜롬보까지 장악했고, 그들의 힘이 커질수록 불교는 참혹한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사원이 세운 학교는 파괴됐고, 사원이 갖고 있던 성보들은 빼앗겼으며, 사원에 보시한 정재는 가톨릭 선교비용으로 징수됐다. 예불을 올리거나 법회를 집전한 스님들은 처형됐다. 그리고 개종을 거부한 재가불자들은 악어가 득실대는 강물에 던져지기도 했다.

포르투갈은 불치(佛齒)를 노렸다. 스리랑카 민족의 자긍심을 도려내고 그 속에 기독교를 심어놓을 심산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포르투갈의 만행을 예견하고 있었던 승단은 봉안하고 있던 불치는 델가무(Delgamu)의 사원에 숨겨두고 가짜 불치를 포르투갈에게 넘겼다. 150여년 동안의 포르투갈 지배(1658년 종식) 속에서도 저 불치만은 사수했던 스리랑카인들이다. 

   
▲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통해 스리랑카 불교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꼿떼의 싱할라 왕조가 포르투갈에게 무기력하게 무너져 갈 때 캔디의 싱할라 왕조가 태동한다. 포르투갈과 맞서 싸우며 세력을 확장해 갔던 캔디의 다르마수리야 왕은 지금의 불치사를 짓고 숨겨뒀던 불치를 캔디로 이운(1600년 경)해 와 봉안했다. 그리고 피폐해진 불교를 재건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스리랑카의 진정한 왕은 불치를 품은 다르마수리야였고, 싱할라 왕조의 캔디 역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스리랑카에서는 부처님과 연관된 상징물에 올리는 일상적인 예경·공양 의식을 테바바(Tevava)라 한다. 정기선 선생의 논문 ‘스리랑카 불치사의 공양의례’를 보면 불치사 의례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있다.

   
▲ 불치사 도량 내 전경 중 일부분. 꽃과 나무가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원이다.

불치사에서의 테바바는 아침(5시30분), 점심(9시30분), 저녁(18시30분) 세 차례 봉행되는데 우리의 예불의식을 떠올리면 크게 다르지 않다. 다소 다른 건, 이 의례를  준비하는 20여명에게 주어진 임무가 각각 다르고 그 임무 또한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불치사 주지(1명. 비구)와 부주지(2명. 비구)가 있지만 부처님 치아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향실(香室)과 향실 앞 작은 법당을 관장하는 비구는 각각 다르다. 또한 공양구를 관리하는 재가자와 공양구를 건네받는 비구가 엄격히 구분되어 있고, 공양물을 짓는 요리사와 공양물을 주방에서 향실로 전하는 재가자도 각각 따로 있다. 역대 왕들은 보름날이면 불치사를 찾아 목욕재계 후 향실로 홀로 들어 가 직접 비를 들어 깨끗이 청소한 후 예를 올렸다.

   
▲ 불치사가 품은 ‘캔디 호수’. 불치사의 성스러움을 더해 준다.

정기선 선생에 따르면 불치사의 공양의례가 이처럼 엄격한 건 ‘부처님 치아사리를 부처님으로 인식 하고, 살아계신 부처님을 모시듯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연원은 아난존자에 닿아 있다. ‘청정도론’ 저자 붓다고사가 쓴 상좌부 율장에 대한 주석서 ‘선견율비파사(善見律毘婆沙, 동국역경원)’에 이런 대목이 있다.

‘어진 이 아난다는 기원정사에 들어가 곧 부처님의 방을 열고 부처님의 평상을 가져다 밖으로 내서 털고 방에 들어가서 물을 뿌리고 소제한 뒤 방안에 있는 예전에 공양 했던 꽃을 가지고 밖에 나와서 버리고 도로 평상을 가져가서 본래대로 놓았다. 어진 이 아난다는 여러 가지로 공양하기를 부처님 계실 때처럼 다를 바 없이 하였다.’

놀라운 건 불치사리 수호 임무는 불치사 주지가 아닌 재가자가 맡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리랑카 국보 1호의 불치사리 수호책임자를 일러 ‘다야와다나 닐라메 (Diyawadana Nilame)’라 칭한다. 장관급이어서 ‘불치사 장관’이라고도 한다. 스리랑카 시암파 종파, 아스기리야 종파, 그리고 불교국 관리들이 참여한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캔디 고산족 출신만이 출마 할 수  있고 임기는 10년이다. 치아사리 수호임무는 왜 재가자에게 주어졌을까? 스리랑카 사람들은 ‘여래의 다비와 그 사리에 관해 출가자들은 관여치 말라’는 부처님의 유언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스리랑카의 온 국민이 치아사리와 함께 하는 날이 있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페라해라(Perahera) 축제 때(음력 7월1일∼15일)다. 페라해라는 ‘행진’, ‘행렬’의 뜻을 담고 있다.

   
▲ 불치사 2층 작은 법당. 불치는 법당 안 향실에 봉안돼 있다.

인도 칼링가 왕조의 언명으로 치아사리를 스리랑카로 이운해 온 헤마말라는 아누라다푸라의 왕 시리메가완나에게 전했다.(4세기 중엽) 사리를 받은 시리메가완나 왕은 장로들의 조언에 따라 백마(白馬)가 끄는 수레 위에 안치(훗날 코끼리 등에 안치하게 된다) 하고 도심을 순례했다. 거리는 부처님이 상주하는 하늘나라를 상징하듯 아름다운 꽃과 감미로우면서도 힘찬 음악으로 장엄됐다.

사람들은 정성을 다한 합장과 절, 그리고 환성과 춤으로 불치를 맞이했다. 불치사에서 이운 된 치아사리는 무외산사에 봉안됐고, 90일 동안 사리 친견법회가 열렸다. 친견법회가 끝나면 사리는 다시 불치사로 돌아갔다.

치아사리 이운법회는 국민들의 불심을 고양시켰고, 고취된 불심은 다시 국력을 한 데로 모으는 역할로 작용했다. 왕조는 그 기반 위에 정통성을 다졌다. 하여, 아누라다푸라, 플론나루와, 담바데니야, 야파후와, 쿠루네갈라, 감폴라, 꼿떼, 시다와까, 캔디 왕조로 이어지는 역대 왕들은 ‘스스로 치아사리의 수호자이자 불교의 보호자임’을 선언했다. ‘치아사리를 봉안한 자가 왕으로서의 권위를 세울 수 있었다’는 말이 회자된 연유가 여기에 있다.

불치를 이운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섬나라에서의 가뭄과 홍수는 ‘아사(餓死)’와 직결되는 엄청난 재앙이다. 불치가 그 재난을 막거나 해소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불치의 가피가 있었던 것일까? 스리랑카인들은 지금도 ‘불치가 움직이면 자연(自然)이 감응한다’고 믿고 있다.

16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페라해라 축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캔디 뿐 아니라 콜롬보, 담불라 등 주요 도시에서도 성대히 열리고 있다. 한 때 이교도에 의한 불치사 폭탄테러(1998)가 있어 페라해라 축제라 해도 불치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신 축제 기간에 불치사에 닿는다면 치아사리를 직접 친견할 수 있다. 엄청난 인파로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향실에 울려 퍼지는 게송 말미는 이렇게 장식된다.

‘중생들 단 하나의 의지처이신 입속4의 연지(蓮池)에 나타난/ 성스런 백조의 왕이시여/ 청량한 달빛으로 수선화를 피우는 반달처럼/ 유학(有學)의 중생들의 마음을 비추시니/ 나는 그 순수하고 빛나는 부처님의 성치에 최상의 경배를 올립니다.’

스리랑카인들에게 치아사리는 스승이자 심장이다. 

스리랑카=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참고자료 : 정기선 논문 ‘스리랑카 불치사의 공양의례’. 불교평론 69호, 마성 스님, ‘스리랑카불교의 역사와 현황’.

[1387 / 2017년 4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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