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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4대로 구성된 육신, 믿을만한 존재인가

기자명 정운 스님

나를 관장하는 주인은 없다

원문: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몸이 4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무아이고, 무주라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 곧 이 몸은 ‘나’라고 하는 주체자도 없고, ‘나’를 관장하는 주인도 없다. 또한 5음으로 마음을 삼지만, 5음은 무아이고, 무주이다. 이 마음은 ‘나’라는 주체자도 없고, ‘나’를 관장하는 주인도 없다. 6근 6진 6식의 화합 생멸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18계가 이미 공이요, 일체가 다 공이다. 오직 본심만이 자취가 없이 청정하다. 알음알이의 양식과 지혜의 양식이 있다. 지혜의 양식은 4대 몸이 굶주림과 질병의 재앙인데, 알맞은 양식을 주어 탐착을 내지 않도록 한다. 반면 알음알이의 양식은 함부로 맛을 취하고, 분별심을 내어 오직 입에 맞는 것만을 구하며, 싫증내어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몸은 지수화풍 4대의 조합
실답지 못해서 죽음에 쫓겨
영원히 살 것처럼 집착하고
허상인 자아에 갇혀 살아

해설:원문을 잘 이해하면, 불교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 매일 독송하는 ‘반야심경’에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지혜의 완성]를 행할 때, 5온이 공(空)이라는 것을 관조한 뒤에 깨달음을 얻고, 모든 고통과 고뇌에서 벗어났다’고 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이치를 드러내고 있다.  

 5음[5온]은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이다. 6근은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이고, 6경은 6근의 인식대상인 형체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이다. 6식은 6근+6경이 연(緣)을 이루어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곧 6근+6경+6식→18계이다. 4대는 육신을 구성하는 지ㆍ수ㆍ화ㆍ풍이다. 하나하나가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단지 ‘나’라고 할뿐이다. 인연으로 잠깐 얽매여 생긴 것이므로 주인이 없고, 주체자도 없으며, 4대로 집을 삼고 있다. 이것이 바로 공사상이다. 

원문에서 ‘몸이 4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무아이고, 무주라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는 내용은 ‘유마경 방편품’에 잘 표현되어 있다. 유마거사가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병을 나타내어 육신의 허망함을 설해준다. “여러분, 이 몸은 무상하고, 강하지 않으며, 견고하지 못해서 빨리 노쇠해간다. 그러니 믿을 것이 못된다. 이 몸은 괴로움이며, 병 덩어리로 모인 신체이다. 지혜로운 자는 이 몸을 의지할 것이 못되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 몸을 물방울ㆍ물거품ㆍ아지랑이ㆍ파초ㆍ환영ㆍ그림자와 같다고 비유하였다. 

몸뚱이는 실답지 못해 무상과 죽음에 쫓기는 신세이다. 이를 잘 비유한 일화가 ‘안수정등’이다. 어떤 사람이 황량한 길을 걷다가 미친 코끼리에 쫓겨 도망가다 우물에 빠졌다. 그런데 그 우물 밑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있었다. 이 사람이 엉겁결에 우물 위 칡넝쿨을 붙잡았다. 밑으로 내려가자니 네 마리의 독사가 있고, 다시 위로 올라가자니 미친 코끼리가 딱 버티고 서 있다. 그런데 겨우 붙잡고 있는 칡넝쿨을 검은 쥐 흰쥐, 두 마리가 갉아 먹고 있다. 절망감에 빠져 있는 이 사람에게 칡넝쿨에서 꿀이 똑똑 떨어졌다. 그 사람은 이전의 위급했던 상황을 까마득히 잊고 꿀의 달콤함에 빠져 있다. 

위의 비유에서 황량한 들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 우물에 빠진 사람은 어리석은 중생, 미친 코끼리는 죽음, 독사는 4대로 구성된 육신, 두 마리의 쥐는 낮과 밤을 상징하는 세월, 칡넝쿨의 꿀은 인간의 5욕락을 비유한다. 몸뚱이는 영원하지도 못하고 고정된 실체도 아니어서 무상과 죽음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은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애착부리고, 자아 속에 갇혀 산다. 이 몸은 끊임없이 좋은 것만 먹고, 취하고자 해서 독사와 같고, 원수 도적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문에서 오직 본심만이 자취 없이 청정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본심이란 청정한 법신인 진리 당체이다.  

앞의 내용을 함축하는 일월게가 있다. “꿈속에 4대로 구성된 이 몸이 흩어지니, 6진과 심식도 본래 공이다. 불조의 고향집을 알고자 하는가?! 서산으로 해 지고 동쪽에서 달뜨네(四大各離如夢中 六塵心識本來空 欲識佛祖回光處 日落西山月出東).” 이 게송은 시식 염불에 나와 있는데, 해 뜨고 달뜨는 그 자리에 깨달음이 있으니, 4대의 허망한 몸뚱이 인연을 떨쳐버리고 훌훌 떠나라는 의미이다.   

바로 이렇듯이 수행자는 일체법이 무아이고, 무상임을 정확히 알아서 탐착하거나 집착하지 말고, 지혜로서 자신을 잘 다스리라고 황벽은 말한다. 여실지견(如實知見), 그저 있는 그대로만 보면 된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387 / 2017년 4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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