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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전 율원장 도일 스님

“부처님 법에 혼돈의 한국불교 치유할 길이 있습니다”

▲ 도일 스님은 “공덕은 미래에 내가 뭘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훗날 미래세대를 위해 무엇인가를 저금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다음 생에 태어나서 내가 뭘 하겠다’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반갑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오랫동안 경전공부를 해오신 분들도 있고, 공부를 하면서 ‘이것이 불교다’라고 자기 스스로 정리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가 과연 제대로 된 불교인가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의문을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고 있는 불교가 제대로 된 것이라면 현재 한국불교가 이런 난맥상에 빠질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부처님 법은 하나인데, 그 부처님 법을 두고 백가쟁명식으로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저렇게 말을 하면서 불자들이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짬뽕불교’가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뭐가 부처님 말씀인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입니다.

백가쟁명식 해석이 난무해
한국불교는 ‘짬뽕불교’ 전락

원효대사가 승가 사표라면
현대스님들 결혼해야 하나

부처님 가르침 다 무시하고
오직 ‘화두’만 제일로 여겨

관습과 말에 현혹되지 말고
부처님 정법으로 돌아가야

어떤 사람은 조사스님의 말씀이 우선이라고 하고 조사선을 제일로 여깁니다. 그리고 부처님 방식으로 공부하는 것을 여래선이라고 하면서 하근기 수행으로 치부합니다. 부처님 수행방식이 하근기이고, 조사선이 제일이라면 왜 불교공부를 하는 겁니까? 차라리 불교가 아니라 ‘조사교’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러다보니 불자들도 어디에다 머리를 둬야 할지 모르는 겁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국불교가 잘못된 것은 처음부터 스님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재가불자에게 강요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한꺼번에 뭉뚱그려서 ‘이것이 불교다’라고 하면서 스님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재가불자에게도 가르쳤습니다. 스님으로서 삶과 재가불자로서의 삶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700년 한국불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님이 누구냐는 물음에 대부분 원효 대사를 꼽습니다. 물론 원효 대사는 수많은 저술을 남겼을 뿐 아니라 귀족불교를 대중불교로 승화시킨 분입니다. 또 중생을 위해 스스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위를 과감히 버리고 중생과 함께 살아가신 분입니다. 한마디로 보살의 삶을 사신 분입니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 실수를 저지른 것이 원효 대사를 승가의 모델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원효 대사는 승려로서 실패한 분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낮추기 위해 요석공주와 결혼을 함으로써 승려로서의 지위를 버린 것입니다. 승가의 모델은 부처님 말씀하신 계율과 법에 따라 살아가는 분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승가로서의 삶을 어기고 살았던 분을 승가의 모델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분이 승가의 모델이라면 지금 스님들은 모두 결혼을 해서 무애행을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국불교가 혼돈에 빠진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그 위대한 보살을 보살로만 봐야 하는데, 승가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무도 이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원효 스님은 너무나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원효 대사가 아무리 훌륭한 분이라고 해도 냉정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그래야 후대의 사람들이 배울 것이 있습니다.

존경 받는 스님 가운데 경허 스님도 있습니다. 경허 스님은 무애행을 잘 하신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이한 행동도 많이 했고, 일설에 의하면 오도를 한 이후에도 사랑하는 여인을 보기 위해 그 집에 찾아가 머슴을 했다고도 합니다. 지금도 선원에서 가끔 술을 마시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도 이런 경허 스님의 유풍 때문입니다. 물론 그분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치열하게 정진한 그 모습은 충분히 본받을만합니다. 그러나 그 분의 이상한 행각까지 미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도를 깨달았다는 미명하에 부처님이 인정하지 않았던 이상한 행동들까지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분들 중에서 부처님만한 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께서 아무렇게나 행동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우리의 판단기준은 항상 부처님의 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지 않고 ‘원효 대사는 어떻다더라’ ‘경허 스님은 이랬다더라’라는 것만 관심을 갖습니다. 이런 것을 정리하지 않고 어떻게 불교가 바로 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스승을 정할 때 혹은 승가의 사표가 되는 분을 정할 때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경율론을 공히 익히고, 계정혜 삼학을 잘 닦은 분이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삶의 모습이 원만한지, 부처님 가르침대로 정진이 제대로 됐는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가늠자는 탐진치 삼독이 있는지 여부를 살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흔히 ‘큰스님’ ‘큰스님’ 하는데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돈이 많고, 명성이 높고, 큰절에 계신 분이면 다 큰스님입니까? 아닙니다. 큰스님은 탐진치 삼독심이 없는 분이어야 합니다. 탐심이 있는지, 없는지. 또 화를 얼마나 잘 내는지, 어리석은지 아닌지 등을 살펴보면 어떤 스님이 큰스님이라는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불교에서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부처님께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부처님은 “내 법은 완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성도 이후 45년간 수많은 설법을 하면서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 속에는 수행하는 과정과 깨달음에 이르는 내용들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처님 법에 묻지 않습니다.

간화선을 하시는 많은 분들은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것이 불교수행 가운데 제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답인지 의심하지도 않고, 오직 ‘화두’를 들고 수행한다는 자만에 빠져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부처님은 성도 이후 열반하실 때까지 45년간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부처님 법 안에 우리가 궁금하고 정진해야 할 내용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대로 따라가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처님도 확신하신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이뭣꼬’만 잡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황당하실 것 같지 않습니까? 화두만 드는 게 수행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불교는 수십년간 선방 수좌들을 최고로 떠받들고, 온갖 좋은 공양물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도인이 과연 얼마나 나왔습니까? 여러분들은 아셔야 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조계종에서 금기시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제가 수좌가 아니니까 그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종에서 최고로 여기는 육조혜능 스님이 선방을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자고로 선종에서 소위 일가를 이뤘다는 유명한 스님치고 선방에서 죽치고 있었던 스님이 있었습니까? 한국불교의 선종에 국한해서도 화두를 들어서 깨우친 분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결과가 없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꾸며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한국불교는 모두가 ‘좌선 제일주의’에 빠져서 너도나도 좌선을 해서 도인이 나오길 바라고만 있을 뿐입니다. 제가 볼 때는 이렇게 해서 도인이 나오는 것은 요원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것이어야 한다. 그게 바로 나의 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그런 불교를 하고 있습니까? 제가 볼 때는 아닙니다. 모두가 허상을 좇고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한방에 다 깨닫는 그런 경지는 없습니다.

조계종은 선종을 표방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선종과 거리가 멉니다. 성철 스님도 선종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으로 선양하기 위해 노력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삶의 방식은 선종이 아니었습니다. 성철 스님이 주석하셨던 절에 가보면 아비라 기도를 하고 삼천배를 합니다. 이것은 밀교적인 수행방식입니다. 선종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선종은 핵심 종지가 무엇입니까? 직지인심(直指人心)입니다. 둘러서 가는 게 아니라 바로 정곡을 찌른다는 것입니다. 성철 스님은 당신의 가르침과 실제 수행이 이렇게 달랐습니다. 이것은 한국불교의 불행이기도 한 것입니다. 한 종문에서 한 종지를 가지고 계속 밀고 나가지 못하는 현실은 불행인 것입니다. 또 어디선가는 (참선한다는) 스님들이 만년위패를 팔아서 먹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종에서 꿈도 못 꿀 일입니다.

선종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중국 명대 중기 이후에 생겼습니다. 그것도 먹고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당송 시대의 순수 선은 그런 것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직지인심, 부처님 정법을 딱 물었을 때 한 번에 답할 수 있으면 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더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선종의 수행전통입니다. 그런데 귀신을 팔면서 선을 이야기하는 게 선종에서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한국불교의 이중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니 정체성이 흐릿해지고, 뭐가 불교인지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누군가가 “당신은 내세를 믿느냐?”고 묻자 “안 믿는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럼 인간은 왜 좋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냐?”고 다시 묻자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스티븐 호킹 박사의 이 대답이 부처님 다음으로 좋은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세가 있건 없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할 뿐이라는 겁니다. 내세에 대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세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보이면서 “이것 잘하면 내가 이거 줄게”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른입니다. 그런데 “이것 잘하면 나중에 천당 갈 거야”라는 말에 속아야 하겠습니까. 이제 더 이상 속지 맙시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남을 위해 희생하고 선행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공덕입니다. 공덕은 미래에 내가 뭘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훗날 미래세대를 위해 무엇인가를 저금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음 생에 태어나서 내가 뭘 하겠다’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늘 깨어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관습에 의지하지 말고,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법에 의지할 뿐 다른 것은 판단기준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짬뽕불교’로 전락한 한국불교를 바꾸는 길입니다.

재가불자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됐습니다. 유명한 스님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됩니다. 저 스님이 탐진치 삼독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더 수행이 필요한 분이고, 적으면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라고 분명하게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정법입니다.

정리=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이 내용은 송광사 전 율원장 도일 스님이 4월10일 부산불교실업인회관 묘광선원에서 개최된 ‘열린불교아카데미 열린특강’에서 설한 법문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388호 / 2017년 4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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