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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말해보라, 목구멍과 입을 닫은 채-하

진정 말해야 할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설불가설(說不可說)’고윤숙 화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 확고한 것을 추구하고 명확한 것만을 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던 젊은 시절의 비트겐슈타인이 쓴 책 ‘논리 철학 논고’의 마지막 문장이다. 불이법문에 대한 물음에 침묵으로 답했던 유마의 길을 여기서 다시 확인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유마의 침묵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방법이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것은
지극한 도 가르치는 선사 해야 할 일
침묵이든 할·방이든 반드시 말해야

반면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비슷하게 침묵을 말하지만 아주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나 도 같은 건 그만두고, 과학상의 발견조차 진정 새로운 것은 기존의 언어로는 제대로 말할 수 없다. 하여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바슐라르는 과학상의 발견은 그것이 정말 새로운 것이라면 그것을 표현할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기에 올바로 서술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새로운 발견도 기존의 언어나 개념들을 빌어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기존에 있는 말들은 이미 기존에 알려져 있는 의미만을 담고 있을 뿐이기에 새로운 발견을 표현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그 모든 낡은 말들과 ‘단절’된 새로운 개념들과 그것들의 체계가, 새로운 서술법이 발명되어야 그 발견은 비로소 제대로 서술될 수 있다. 새로운 발견을 담기 위해선 낡은 언어와 단절해야 한다. 이를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명명한다.

어디 과학뿐인가? 새로운 발상, 통념에서 벗어난 것, 진정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모두 이해될 수 없다는 저 벽에 부딪혀 오랫동안 외면당한 채 저주받은 운명을 감수해야 하지 않았던가? 반 고흐는 동생 말고는 평생 어느 누구도 예술가로 대해주지 않았고, 카프카는 죽어서도 한참을 지난 뒤에야 비로소 진지하게 읽히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니체 말대로 “너무 일찍 왔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비난하는 자, 거부하는 자들이 없다면 진정한 도가 아니라는 노자의 말은 좀 더 강한 말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진정 중요한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온다. 진정 말해야 할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 것인가이다. 존재를 걸고 지고의 법을 추구하며 가르치고자 했던 선사들이 고심해야 했던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가령 향엄 지한(香嚴智閑)의 유명한 질문이 그렇다.

“가령 어떤 사람이 나무에 올라가 입으로만 나뭇가지를 물고 있을 뿐, 더는 잡을 가지도 없고 밟고 디딜 나무도 없는데, 나무 아래서 어떤 사람이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물었다고 하자. 대답하지 않으면 그 질문을 회피하는 것이며, 대답한다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러한 순간에 직면한다면 어떻게 해야 옳을까?”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묻는 것은 그가 서쪽에서 와서 전하고자 하는 불법의 요체가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도를 아는 이라면 의당 답해주어야 마땅한 질문이다.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말할 수 없는 법이고, 입을 열 수 없는 처지라며 그냥 넘어간다면, 불법을 깨쳐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발심은 그만두고, 절밥 얻어먹은 값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답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입을 여는 순간 떨어져 죽는다. 

백장(百丈)이 위산(?山), 오봉(五峰), 운암(雲巖) 세 명의 제자에게 던졌던 질문도 이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말해서 알려줄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목구멍과 입을 닫아버리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

말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런 질문이 필요 없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니 목구멍과 입을 닫아버리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제자들에게 이걸 물은 것은, 말할 수 없는 저 무상의 법을 학인들에게 어떻게 가르치겠느냐는 물음이기도 하다.

“스님께서 말씀해 보십시오.”

위산의 답이다. 백장의 물음을 가로채서 되물은 위산의 재치 있는 응수에 백장은 이리 답한다.

“나는 사양치 않고 그대에게 말해주고 싶지만 훗날 나의 자손을 잃을까 염려스럽다.”

목구멍과 입을 닫고 말할 방법이 있고 그것을 말해주고 싶지만, 그것이 입 밖에 나가는 순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방법이라고 받아들여져 전해질 것이니, 훗날 다른 조건에서 제자들이 사용하게 되면 요체를 잃고 핵심을 그르치는 답이 될까 두렵다는 말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상황과 조건에 딱 부합하는 어떤 단일성을 가질 뿐이란 말이다.

백장의 동일한 질문에 오봉은 이리 답한다.

“화상께서도 (목구멍과 입을) 닫아버려야 합니다.”

백장의 입을 콱 내질러 막아버린 셈이다. 직접적인 의미로 보자면 어긋나고 빗나가는 사태를 감수하며 말할 수 없는 것을 굳이 말해 평지풍파를 일으킬 수 있으니 목구멍과 입을 닫으라는 말이다. 주객을 뒤집어, 말을 끊고 말해주겠다는 말, 혹은 그렇게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말들을 끊어주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백장은 이리 답한다.

“사람 없는 곳에서 이마에 손을 얹고 그대를 바라보겠다.”

표면적인 의미는 정말 그럴 수 있는지, 그대가 그렇게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말이니, 그렇게 해보라는 말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운암은 백장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스님은 할 수 있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해 보십시오”라는 위산의 말이나 “화상께서도 닫아버려야 합니다”라는 오봉의 말과 달라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앞서와 달리 백장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자손을 잃어버렸군.”

자신의 가르침을 남들에게 가르칠 수 없겠구나 하는 탄식이다. 위산이나 오봉에게 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다. 뭐가 다르기에 이리 반응했던 것일까?

논리적으로 보자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스님은 할 수 있습니까?”라는 운암의 말은 스님도 할 수 없지 않느냐는 반문이다. 이는 또한 자신도, 다른 누구도 할 수 없음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말만으로 보자면 틀린 대답은 아니다. 그러나 그걸 몰라서 백장이 저 질문을 던졌을 리 없다. 그 난감한 궁지를 벗어나 말할 길을 찾아보라는 말인데,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고 했으니….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가르치겠느냐는 말에 가르칠 수 없다고 답한 꼴이다. 논리적인 당착에 사로잡혀 갈 길을 포기해버린 셈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지극한 도를 가르치려는 선사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 역설 속에서 말하고 행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그때마다의 조건에서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몸을 돌리도록 촉발해야 한다. 원오의 말을 빌면, 사자가 동물을 낚아챌 때 그러하듯 이빨과 발톱을 숨기고 땅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잽싸게 몸을 날려야 한다. 크고 작은 동물을 가리지 않고 모든 위엄을 다하고 공을 들여 낚아채서 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만들어야 한다. 말할 수 없으니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포기할 게 아니라, 침묵으로 말하든 할이나 방으로 말하든, 말을 벗어난 말로 말하든, 말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진정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88호 / 2017년 4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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