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스리랑카 성지순례④-랑기리 담불라 사원
54. 스리랑카 성지순례④-랑기리 담불라 사원
  •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17.04.24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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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 수호 원력으로 전쟁·대기근 극복한 인도양의 보물섬

▲ 랑기리 담불라 사원 전경. 싱할라 왕조 19대왕 왓따가미니-아바야가 지어 보시했다. 5개의 석굴이 있으며 157개의 불상 및 신상이 서 있다.

인도 남부 끝 22Km 바다 건너 자리한 작은 섬나라.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섬의 생김새가 눈물과 흡사해 누군가 ‘인도의 눈물!’이라 했다. 관광객 상대로 한 전문상점에서 아이 쇼핑을 즐기다 보면 스리랑카 지도 모양 소재의 상품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루비, 사파이어로 만든 목걸이부터 에소나이트, 투루말린, 가넷 등의 준보석들을 섞어 만든 액자까지 다양하다. ‘인도의 눈물’이라 쓰고 ’보석의 눈물‘이라 읽는다.

나라 잃고 피신했던 왕이
국권회복 후 보시한 절
흑갈색 거대 바위 속엔
벽화·탑·불상 환상 조화

교단 추구하는 목표에 따라
교학·수행 분리된 사원 많아
‘다르마 있는 한 아라한 가능’
‘도인 출현’ 어려운 시대 공감

아, 바그다드 소년 신밧드가 모험을 떠났다가 보물을 찾은 왕국이 세렌디브(Serendib), 스리랑카였다.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보물섬이 아니다. ‘국토 90%에 보석이 묻혀 있다’는 말이 회자되는 이 나라는 세계 보석 강국 10위 안에 랭크돼 있다.

귀한 게 묻혀 있으면 캐려는 사람도 많은 법. 이 보물섬 호시탐탐 노린 왕조가 있었다. 인도 중동부의 칼링가와 남부의 촐라왕조를 필두로 한 타밀족이 대표적이다. 싱할라 왕조는 왕국건립 초기(BC 5세기)부터 유럽인들의 침입(1505년, 포르투칼)을 받기 전까지 이들 세력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인도와 싸우며 흘린 스리랑카 ‘눈물의 역사’는 2000년이다.

기원전 2세기 중엽. 인도 남부의 촐라(Chola) 왕 에랄라(Elara)가 이 섬에 쳐들어 와 싱할라 왕조의 최초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함락시켰다. 촐라 왕조는 이후 아누라다푸라를 중심으로 한 스리랑카를 45년간 통치했다. 촐라 왕조 지배에 분연히 일어선 왕은 둣타-가마니(Duttha-Gamani. B.C 161~137). 광복을 위해 스스로 창을 든 그는 싱할라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왕조를 위한 전쟁이 아니다. 불교를 위해 싸운다!"

구국(救國)이 아닌 성전(聖戰)에 방점을 찍은 호소요 선언이다. 스스로 방증이라도 하려는 듯 그는 자신의 창끝에 부처님 사리를 넣고 전쟁에 임했다. 왕의 창 아래 운집한 싱할라족은 촐라족과 맞서며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다. 이 전쟁은 둣타-가마니왕이 아누라다푸라에서  벌인 에랄라 왕과의 일대일 결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종식됐다.

▲ 석굴사원의 백미는 화려한 벽화다. 대부분 11세기 작품들이다. 출처=‘SRILANK’

전쟁은 멎었지만 왕의 고통이 시작됐다. 적군을 무참히 죽인 자신의 무자비 행위에 대한 고통이 가슴을 시퍼렇게 멍들이고 있었다. 이때, 여덟 명의 스님들이 왕을 위로한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해 오계(五戒)를 지켜야 사람입니다. 잘못된 믿음으로 계율을 어긴 사람은 동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 논리대로라면 이교도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다. 그러니 왕은 이 전쟁에서 단 한 명의 사람도 죽이지 않은 셈이다. 당시 싱할라족은 불교를 숭상하고 있었고, 침입자들은 이교도들이었다. 이교도들에 의한 잦은 전쟁의 고통이 승단을 극단으로 몰고 간 데서 터져 나온 말이었을까? 정법(正法)을 벗어 난 ‘광신(狂信)의 속삭임’이다.

그 속삭임은 왕에게 달콤했다. 마음의 평정을 찾은 왕은 극심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왕조 재건에 심혈을 기울인다. 결국 이 전쟁을 기점으로 ‘불교와 국가는 하나’라는 인식이 싱할라족 저변에 퍼져가기 시작했다. 그럴 만하다. 불교도와 이교도로 프레임 된 전쟁에서 불교도가 승리했고, 왕은 불교의 힘을 빌려 왕조를 재건했지 않은가.

▲ 시기리야는 훗날 불교계 품에 안겼다. 수행터가 곳곳에 남아 있다.

둣타-가마니의 전쟁 용맹담은 루완웰리사야 대탑 앞 비석에 새겨져 있다. 부처님 사리를 창 끝에 넣고 싸운 왕의 모습을 담은 벽화도 전해 내려오는데 바로 저 담불라 사원 제2석굴에 그려져 있다. 이 사원을 지은 인물은 왓따가미니-아바야(Vattagamini-Abhaya) 왕이다.

기원전 1세기, 왓따가미니-아바야 왕은 아누라다푸라를 침략해 온 타밀족에게 왕권을 찬탈(B.C 43~29) 당한다. 왕궁에서 도망쳐 나온 왕은 아누라다푸라와 캔디 중간의 담불라 평원에 우뚝 솟은 이 산으로 들어와 은신했다. ‘물이 솟아나는 바위’란 뜻이 담긴 담불라(Dambulla)의 산에서 왕은 무려 12년간(B.C 29~17)을 숨어 지내다 왕권을 되찾았다. 은신할 당시 승려들의 도움을 받았던 왓따가미니-아바야는 왕위에 다시 앉은 후 감사의 뜻으로 절을 지어 보시했다. 대표적인 사찰 하나가 훗날 스리랑카 대승불교의 산실 역할을 담당한 ‘아바야기리 위하라(Abaya giri Vihara, 무외산사)’이고, 또 하나의 사찰이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랑기리 담불라 비하라(Rangiri Dambulla Vihara)'다.

흑갈색 바위에 건축된 이 석굴사원은 보통 ‘담불라 사원’으로 통한다. 다섯 개의 석굴 중 제2석굴 규모가 가장 크다. 이곳에만 56개의 불상이 들어서 있고, 화려한 벽화가 석굴을 수놓고 있다. 석굴로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왓따가미니-아바야 왕을 볼 수 있다. 둣타-가마니의 영웅담을 담은 벽화를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사방으로 빛나는 금색의 창을 든 인물을 찾으면 된다. 창을 화려하게 표현한 건 부처님 사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1505년 포르투갈이 꼿떼를 침입해 왔고 포르투갈의 지배는 150여년에 이른다. 기나 긴 피눈물 역사를 가능케 했던 인물 하나를 꼽으라면 라자싱하(Rajasinha) 1세(1581~1592) 왕이다.

애초, 라자싱하는 포르투갈 지배에 항거했던 인물이다. 포르투갈과의 국지전에서 간간히 승리하며 싱할라인들로부터 두터운 신망도 얻었다. 인성이 덜 된 자가 갑작스럽게 영웅으로 추앙받으면 오만하기 쉬운데 그는 그 선마저 넘었다. 왕이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그는 자신의 손으로 늙은 아버지 마야둔네(Mayadunne)의 목을 비틀었다.

왕위에 오른 라자싱하는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한 가책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매일 밤 찾아오는 극심한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그는 덕망 있는 스님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아마도 그는 싱할라인들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던 둣타-가마니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들은 ‘광신의 속삭임’이 아닌 정법에 입각한 직언을 전했다.

‘너무 큰 죄악이기에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안식을 얻고자 했던 왕은 분기탱천했다. 불교를 버리고 이교도 추종자가 된 왕은 불교의 정신적 지주인 최고 장로를 돌로 쳐서 죽였다. 스님들을 묻어 목만 땅 위로 내놓게 하고는 쟁기로 그 목을 잘랐다. 사원은 허물어졌고, 경전은 불탔다. ‘부처님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성스러운 산 ‘스리 빠다’(Sri Pada. 라트나프라 북동쪽 위치한 해발 2243m의 고산)도 이교도들에게 넘겼다. 그 후부터 이교도들은 ‘부처님 발자국’을 ‘아담의 발자국’이라 했다. 지금도 불자들은 ‘스리 빠다’라 하지만 이웃 종교인들은 ‘아담스 피크(Adam's Peak)’ 부르고 있다.

스리랑카 승가를 이끄는 두 축은 숲에 머물며 수행에 몰두하는 와나와시(Vanavasi)와 마을에 머물면서 경전을 중심으로 교육에 전념하는 가마와시(Gamavasi)다. 담불라 사원처럼 마을에서 제법 떨어진 숲이나 산에 지어진 절은 대부분 수행승들이 머문다. 높이만도 200m에 이르는 바위 산 정상에 궁전을 지은 ‘시기리야(Sigiriya)’도 훗날 불교로 회향됐는데 수행승들이 이곳에 머물며 정진했다. 지금도 수행터가 곳곳에 남아 있다. 스리랑카 교단의 수행과 교학은 언제부터 분리되었을까?

▲ 시기리야 전경. 산 정상의 180m 화강암에 궁전과 목욕탕이 들어서 있었다.

왓따가미니-아바야 왕 시대는 참혹했다. 국권을 잃었으며 광복 후에도 대 기근이 들어 굶주린 사람들이 스님의 시신에도 손을 댈 정도로 나라 전체가 재앙에 직면했다. 급기야 스님들은 산으로 피신했고, 섬을 떠난 스님도 있었다. 승가는 고민에 휩싸였다. 극심한 대 혼란이 수년간 지속된다면 불법마저 끊어질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법만은 남겨야 했다. 하여, 알루위하라(Aluvihara)에서 팔리어 삼장과 주석서를 야자수 잎에 새겼다. 세계 최초의 불교경전 ‘패엽경(貝葉經)’이다. 경전 결집과 함께 스리랑카 불교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이 일어난다. 스리랑카에 남아 있던 스님들이 외우고 있던 삼장과, 스리랑카를 떠났다 돌아 온 스님들이 외우고 있던 삼장을 서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논쟁이 붙은 것이다.

‘교단이 추구해야 할 근본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아라한에 이르는 수행에 가치를 더 두어야 하는가?’ ‘경전을 우선하며 교육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가?’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당시의 상황이 궁금한데 동국대서 수학한 난다라타나 스님이 쓴 논문 ‘위파싸나와 간화선의 수행체계 비교연구’를 바탕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수행승들이 주장한 핵심은 간단하다. ‘교단의 근본바탕은 수행실천이며 수행실천 없이 열반에 이를 수 없다.’ 교승은 이렇게 반박했다. ‘만약,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전의 가르침이 없다면 그 어떤 수행도 불가능하다.’ 훗날, 불교지성으로 손꼽히는 월폴라 라훌라는 그의 저서 ‘비구의 유산(heritage of Bhikkhu)’에서 당시의 논쟁을 이렇게 평가했다.

‘논쟁 끝에 교단의 근본바탕은 삼장의 경전을 배우고 연구하는 것이라 결론 났고, 계율과 수행의 실천이 근본바탕이 된다는 주장을 했던 스님들은 침묵했다.’

스리랑카 성지를 순례하며 ‘재가자의 아라한과 증득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하려 한다면 사전에 그 스님이 수행과 교학 중 어느 것에 무게를 두고 있는지부터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수행승은 ‘가능하다’ 할 것이고, 교학승은 ‘불가능’ 또는 ‘어렵다’고 말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교학승 일각에서는 지금도 ‘스리랑카의 마지막 아라한은 말리야데와(B.C 101~77)’라며 ‘현세에 아라한과 성취는 없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도인(道人) 내기 어려운 시대라는 뜻일 것이다. 스리랑카 교단을 관통하는 원론 하나만은 기억해 두자. ‘다르마가 존재한다면 아라한과는 성취된다.’

이 나라를 지배한 유럽인들은 국명(國名) ‘세일론(Ceylon)’을 ‘실론’으로 불렀다. 이를 마땅치 않아 했던 국민들은 독립(1948)하며 나라 이름을 ‘빛나는(Sri) 섬(Lanka)’ 스리랑카(Sri  Lanka)로 바꿨다. 유럽인들의 침략과 함께 들어 온 가톨릭을 중심으로 이 땅에도 개신교, 힌두교 등의 다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궁금하지 않은가? 스리랑카에서의 불교 위상! 1972년 이 나라 역사상 최초로 공포된 헌법이 대변하고 있다.

‘스리랑카 공화국은 모든 종교에 대하여 헌법 제10조와 14조(1항) (e)에 의거하여 부여된 권리를 보장하면서, 불교에 그 첫 번째 지위를 부여한다. 따라서 불법을 보호하고 촉진시키는 것은 국가의 의무다.’

이 땅은 ‘인도의 눈물’이 아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나라 스리랑카다.

스리랑카=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389호 / 2017년 4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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