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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가섭불 연좌석의 정체

기자명 주수완

불교후발 주자 신라의 불국토 만들기 프로젝트 서막

▲ 가섭불연좌석으로 추정되고 있는 황룡사 목탑지 심초석 위의 돌. 몽고 침입으로 불탄 목탑의 심초석 위에 누군가 연좌석을 옮겨놓은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의 여러 목차 중에서 미술사학자들에게 특히나 관심을 받는 내용은 ‘탑상’편이다. 그리고 이 ‘탑상’편의 시작은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으로 시작한다. ‘연좌’의 사전적 정의는 ‘고요히 앉아 참선함’이므로, 결국 ‘가섭불이 좌선하던 돌’이란 의미가 된다. 가섭불은 석가모니 이전에 성불하신 여러 부처님을 일컫는 개념인 ‘과거불’ 중에서 석가모니 바로 직전에 성불한 부처님이시다. ‘가섭불연좌석’의 주요 내용은 황룡사에는 과거불인 가섭부처님이 좌선하던 돌이 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일단 일연 스님의 기록을 믿고 읽어보기로 하자.

삼국유사 ‘탑상’편 첫머리
‘가섭불연좌석’으로 시작

연좌석 봉안 추정장소는
황룡사 금당 뒤편이 유력

아쇼카 세웠던 석주 본따
불국토 주장 위해 세운 것

인도에 석가모니불 났지만
신라에 과거불 있었다 주장

아쇼카 석주, 절 당간으로
또 당간지주로 이전 추정 

일연 스님은 이 돌을 직접 본적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불전 뒤에 있었고, “높이는 5~6척이지만 둘레는 겨우 3주(?)였다”고 했다. 불전의 뒤라고 했으니 아마 황룡사 장육상이 봉안되어 있던 금당의 뒤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높이 5~6척이면 1척을 30㎝로 대략 쳤을 때 150~180㎝ 내외이니 사람 키 정도에 해당하는 높이다. 문제는 ‘3주’인데, 이에 대해 ‘삼국유사’의 번역본들은 대체로 그대로 ‘3주’ ‘서발’로 번역하고 정확한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주(?)’의 사전적 정의는 팔꿈치인데, 이는 주로 둘레를 재는 척도로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정확한 크기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다. 대표적인 해석은 손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서아시아 지역에서 사용했던 큐빗(cubit)이란 단위, 혹은 인도에서 사용한 ‘하스타(hasta)’란 단위와 같은 것이다. 그 길이는 대략 45㎝ 정도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연좌석의 둘레는 45㎝×3주=135㎝가 된다는 뜻이다. 둘레가 135㎝라면 그 직경은 ‘135÷3.14’이므로 대략 43㎝가 된다.

▲ 석가모니의 탄생지 룸비니에 아쇼카왕이 세운 석주. 철을 감아놓은 부분은 ‘가섭불연좌석의 깨어진 부분에 철을 붙여 보호했다’는 내용을 연상케 한다.

이 ‘주’ 단위는 둘레만이 아니라 길이를 나타낼 때도 쓰였다. 예를 들어 인도를 순례한 중국 동진시기의 승려 법현(法顯, 약 337~422년)의 ‘고승법현전’에 의하면 석가모니께서 도리천에 계신 어머니 마야부인께 설법해드리고 지상으로 내려오셨다는 상카시야의 사원에는 후대에 아쇼카왕이 세운 석주가 있었는데, 그 높이를 20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똑같은 석주에 대해 당나라의 구법승 현장은 70척으로 기록하고 있어 흥미롭다. 따라서 20주=70척의 계산이 성립되는 셈인데, 만약 1척을 30㎝로 환산하면 70척은 21m가 되므로, 21m를 다시 20으로 나누면 1주는 약 1m 가량이 되어버린다. 이는 앞서 45㎝로 봤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이 1주의 또 다른 개념이었는지, 아니면 두 스님의 눈대중이 틀렸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여하간 일연 스님이 기록한 이 돌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고(故) 황수영 박사께서는 일찍이 현재 황룡사 9층목탑지의 심초석 위에 올라가 있는 돌이 바로 가섭불연좌석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심초석은 탑의 중앙에 위치하면서 찰주를 받치는 돌인데, 현재는 그 위에 큰 돌이 올라가 있다. 아마도 몽고의 침입 때 황룡사 목탑이 불에 타버리자, 심초석 안에 있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기타 장엄구를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가 ‘가섭불연좌석’으로 추정되는 돌을 옮겨다가 심초석 위를 덮어놓은 것으로 본 것이다. 실제 그 크기와 규모를 보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는데, 주로 재야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가섭불연좌석’ 기사에 따르면 일연 스님이 이것을 볼 당시에는 황룡사에서 있었던 두 번의 화재로 연좌석도 불을 맞아 돌이 터져 갈라진 곳이 있어 절의 스님들이 쇠로 붙잡아 고정시켜 두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목탑지 위의 돌은 불을 맞은 흔적도 없고, 갈라진 곳도 없기 때문에 그 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연 스님의 기록은 황룡사 목탑이 건재했을 때의 기록이기 때문에 아마 몽고군에 의해 황룡사가 소실될 때에는 쇠로 엮어 두었던 연좌석도 결국에는 두 동강 나서 완전히 분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의 한 조각을 목탑지에 옮겨둔 것이어서 아마 크기도 더 작아지고, 갈라진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글에서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목탑지의 그 돌이 정말로 가섭불연좌석인가 아닌가의 문제보다는, 도대체 이 돌의 원형, 혹은 개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일연 스님은 가섭불연좌석의 생김새를 묘사하면서 ‘당립이평정(幢立而平頂)’이라고 하였는데, 여러 해석이 있지만 풀어보자면 당, 혹은 깃대처럼 세워져있고, 그 위는 평평하다는 뜻이겠다. 우선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연좌석, 즉 좌선을 하던 돌이니까 최소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모습이어야 할 것 같지만, 직경 43㎝ 가량의 돌 위에 사람이 앉기는 여간 불편해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높이는 150~180㎝나 되니 단순한 불대좌의 모습은 아니고, 분명 일연 스님의 서술대로 당, 깃대, 기둥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이었을까?

▲ 아쇼카왕 석주의 전통은 우리나라에서 당간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실제 석당간을 보면 아쇼카왕 석주를 연상케된다. 담양 객사리 석당간. 보물 제505호.(사진: 문화재청)

어쩌면 일연 스님이 사용한 바로 그 ‘당(幢)’이라는 표현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듯하다. 사찰에서 ‘당’은 일반적으로 당간지주 사이에 세워져 있는 깃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더 보편적으로 보면 기둥 형태의 조형물을 흔히 ‘당’이라고 부른다. 기둥, 그 중에서도 돌기둥이라고 한다면 단연 아쇼카왕의 석주가 떠오른다. 앞서 잠시 언급한 법현 스님이나 현장 스님이 인도에 순례하면서 들렸던 성지마다 아쇼카왕이 세운 이러한 석주가 세워져 있었다. 아쇼카왕이 불교에 귀의하고 석가모니의 행적을 찾아 성지를 순례했을 때에도 이미 많은 성지들이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때문에 아쇼카왕은 더 이상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들 석주들을 세우고 그곳이 부처님께서 무엇인가를 하셨던 곳, 즉 부처님과 인연이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영원히 후세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어쩌면 ‘가섭불연좌석’은 이러한 아쇼카왕의 석주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즉, 아쇼카왕이 부처님과 인연이 있는 땅이라는 뜻으로 세웠던 석주를 신라가 경주에 세운 것이다. 이를 통해 경주 역시 부처님과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공포한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역사상의 석가모니는 인도에서 활동하셨기 때문에 경주에 석가모니가 오셨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가섭불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가섭불은 전설적인 존재이므로 그 분이 먼 옛날 신라 땅에서 설법하셨다고 해서 시비를 걸어올 사람은 없다. 오히려 석가모니 부처님의 선배라고 할 수 있는 가섭불이 활동하셨던 곳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결국 인도보다도 더 먼저 불법이 베풀어진 곳이라고 보아도 된다. 비록 진흥왕 당시에는 겨우 전대 법흥왕대에 불교가 공인된 후발주자였지만, 사실은 다만 잊혀져 있었을 뿐 이미 오래전에 불교가 전해져 있었던 곳임을 홍보하고 있는 셈이다. ‘불국토’란 무엇인가? 결국 그것은 불법과 인연이 있는 곳, 부처의 발길이 닿았던 곳이며, 우리나라 역시 과거불인 가섭불의 발길이 닿았던 불국토라는 것이다. 그리고 불국토임을 나타내기 위해 아쇼카왕이 성지 곳곳에 석주를 세웠듯이 진흥왕도 황룡사에 석주를 세웠던 것이리라. 황룡사에는 아쇼카왕이 보낸 구리로 만들었다고 하는 장육상도 있었으니, 아쇼카왕 석주를 본 따 만들지 못하리란 법도 없다.

▲ 석가모니의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에 세워졌던 석주편. 아마 일연 스님이 보았을 당시의 가섭불연좌석도 이렇게 파손된 상태였을 것이다.

만약 현재 목탑지 위의 돌이 바로 그 연좌석이라면, 그것은 석주의 밑동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볼 수 있다. 또한 그렇게 본다면 연좌석이란 실제 그 위에서 좌선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가섭불이 좌선했던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석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또한 그것은 황룡사뿐이 아니었다.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의 어머니 고도령이 언급했듯이 신라에는 전불(前佛), 즉 과거불 시절의 절터가 일곱 군데가 있다고 하였으니 흥륜사, 분황사, 영묘사 등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들이 모두 황룡사처럼 과거불과 인연이 있는 곳이라고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곳에도 석주가 있었을까?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아쇼카 석주 전통은 우리나라에서는 당간으로 이어졌고, 당간의 재질이 돌에서 나무나 철로 옮겨지면서 석주의 개념은 오히려 당간을 고정시키는 돌로 만들어진 웅장한 기둥, 즉 당간지주로 점차 이전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 곳곳에서 흥에 겨워 시로 찬했듯이 이를 흉내 내어 찬하면 다음과 같다.

인도에는 아육왕의 석주 솟아오르고
서라벌엔 진흥왕의 석당이 당당하다
석가에 앞서 가섭불의 전교 열렸으니
누가 불국토의 우열을 말할 것인가!

주수완 고려대·서울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389호 / 2017년 4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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