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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부처를 죽여서 사리를 얻겠다고-상

유머, 권위 덫 피해 깨달음으로 이끄는 방편

▲ ‘아자천연(我子天然)’고윤숙 화가

단하 천연(丹霞天然)은 지존의 수준에 이른 유머 감각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듣자마자 뇌리에 박혀 깊이 새겨진 ‘단하소불(丹霞燒佛)’이라는 유명한 공안이 그렇다. 단하가 혜림사란 절에 머문 적이 있는데, 어느 날 밤 혹독하게 추웠다고 한다. 하여 땔감을 찾았지만 밤에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땔감을 찾던 단하는 급기야 불전에 들어가 목불을 하나 들고 나와 그것을 빠개 불을 땠다. 그런데 절의 살림을 맡아보던 원주(院主)가 이 얘기를 듣고 쫓아와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른다.

목불을 태워 사리 얻겠다는 단하
무위의 가르침을 웃음으로 승화
역대 선사들 유머에 탁월한 감각

“아니 불상을 태우면 어쩌자는 거요?”
단하의 대답은 그의 법명대로 천연스럽다.
“아, 태워서 사리를 얻으려고요.”
“아니 목불을 태워 무슨 사리를 얻겠다는 겁니까?”
“그래요? 그럼 저기 있는 불상 두 개도 마저 가져다 불을 땝시다.”

원주는 그 뒤에 눈썹과 수염이 모두 떨어졌다고 한다. ‘선문염송’에 붙인 말(說話)대로 “대반야(大般若)를 비방했으므로 눈썹과 수염이 떨어진 것”일 게다(김영욱 편, ‘정선 공안집’, 1, 579~580).

절밥을 얻어먹고 있는 스님이 그 절의 목불, 아니 불상을 불태워 온기를 얻고자 하다니 이 얼마나 기상천외한 발상이고 이 얼마나 대담한 행동인가! 부처를 태워 사리를 얻겠다니 원주의 비난에 대한 응수는 또 얼마나 탁월한가! 사리를 얻을 수 없다면 부처라 할 것도 없는데, 다른 나무와 뭐가 다를 것인가! 그러니 남은 것도 마저 불을 때자는 말은 정말 비단에 꽃 자수를 더한 격이다.

유머에 주석을 다는 건, 유머 감각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나 할 짓이지만, 그래도 불법에 대한 얘기를 하는 자리니 굳이 말을 덧붙여 보자면, 목불이란 아무리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어도 나무일 뿐 부처가 아닌 것이다. 추우면 불을 찾고 더우면 물을 찾는 게 자연스런 일이고, 그거야말로 무위의 불법이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다들 너무 추워서 죽을 지경인데, 불상 모시고 앉아 얼어 죽는 것보다야 목불이라도 태워서 온기를 얻는 게 더 불법에 충실한 것 아닌가. 그래서일 게다. 불상을 태운 사람이 아니라 지키려던 사람이 불법을 비방한 죄로 눈썹과 수염이 떨어진 것은.

단하의 유머감각을 보여주는 유명한 얘기가 또 하나 있다. 단하는 원래 유학을 공부하여 과거를 보러 가다가, 우연히 만난 선객에게 “관리로 뽑히는 게 낫겠소, 부처로 뽑히는 게 낫겠소?”라는 질문을 받고 강서의 마조를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간 마조는 “나는 그대의 스승이 아니다. 남악의 석두(石頭)를 찾아가라”고 말해준다. 석두 문하에서 3년간 행자를 하다 계를 받은 후 단하는 곧바로 다시 마조를 찾아간다. 그런데 절에 들어가자 그는 마조에게 가는 대신 절의 큰 법당에 들어가 나한상의 어깨에 올라가 말을 타듯 타고 앉았다. 목불을 태운 얘기에서 이미 알아보았겠지만, 애초에 그는 이처럼 무람하고 대담했을 뿐 아니라 불상이나 성인의 형상에도 걸림이 없이 자재로웠다. 하지만 이걸 본 대중들이 경악하여 급히 마조에게 알렸고, 마조는 몸소 그 방에 찾아와 그를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이 천연스럽군(我子天然, 내 아들 천연이로군).”

그러자 단하는 즉시 방으로 내려와 절을 하곤 “대사께서 법호를 주셨으니,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 인연으로 ‘천연(天然)’을 자신의 법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대중들은 물론 스승마저 시험해보려는 단하의 천연덕스럽고 대담한 행동도 멋지지만, 자신이 가르친 게 그것이라며 “내 자식의 천진한 행동”으로 받아넘긴 마조도 그에 못지않다. 천연스러움, 그 무구한 대담성 앞에선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유머 감각이 탁월한 선승들이 적지 않지만,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은 조주다. 가령 “만물 가운데 무엇이 가장 견고합니까?”라고 묻는 학인에게 이리 대답한다.

“욕을 하려거든 서로 주둥이가 맞닿을 만큼 해야 하고, 침을 뱉으려거든 너에게서 물이 튈 정도가 되어야 한다.”

이 정도로 욕을 먹고 침을 뱉어도 끄떡없는 것이 견고한 것이라고 말하려던 것이었을까? 견고한 것을 묻는데 이렇게 답하는 감각도 놀랍지만, 욕을 하고 침 뱉는 행동의 극한을 말하기 위해 선택한 표현은 천년을 훨씬 지난 지금 보아도 웃음이 나온다.

알다시피 조주는 “차 한잔하시게”로 유명하다. 조주가 어떤 학인에게 물었다.

“이곳에 온 적이 있는가?”
“있습니다.”
“그럼 차 한잔하시게.”

이번엔 다른 학인에게 물었다.

“이곳에 온 적 있는가?”
“없습니다.”
“그럼 차 한잔하시게.”

그러자 옆에 있던 원주(院主)가 물었다.

“스님, 어째서 온 적이 있다고 해도 차 한잔하라고 하시고, 온 적이 없다고 해도 차 한잔하라고 하십니까?”
필경 사람에 따라 다른 방편을 구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물었을 것이다. 그러자 조주가 “원주!”하고 부른다. 원주가 “예!”하고 대답하자, 다시 조주가 말했다.

“자네도 차 한잔하시게.”

마지막 이 한 마디는, 잘 아는 것인데도, 볼 때마다 웃음이 나온다. 원주의 생각과 달리, 온 적 있는 이, 알아들을 만한 이에겐 미혹하도록 하는 시험의 잔을 준 것이고, 처음 온 이, 아직 뭘 모르는 이에겐 깨달음을 주기 위해 차 한잔하라고 한 것이니 앞의 두 말이 실은 같지 않다. 세 번째 차 한잔하라는 말은 의심을 가진 원주에게 물음을 되돌려주며 역으로 그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고지식하게 말하면, 세 말이 똑같아 보이지만 다른 이들에게 다른 방편을 사용한 것이다. 이런 조주에게 어떤 관리가 목불을 태워버린 단하의 얘기를 물었다.

“단하 스님이 목불을 태웠는데 무엇 때문에 원주의 눈썹이 빠졌습니까?”

그러자 조주가 다시 묻는다.

“관리의 집에서는 날것을 익히는 일을 누가 합니까?”
“하인이 합니다.”
“그 사람 솜씨가 좋군요.”

동문서답 같은 이 말을 이해하려면 날것을 익히는 일이나 목불을 태운 일이나 불을 태우는 일이란 점에서 같다는 점에 착목해야 한다. 그런데 비록 관리가 ‘주인’이지만, 불을 피워야 할지, 어떻게 다뤄야 할지는 하인의 솜씨에 속하며, 이는 주인이 뭐라 할 수 없는 일이다. 목불을 태운 것 역시 태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인데, 그걸 생각지 못한 채 불상을 태웠다고 비난했으니, 원주는 불을 태우는 이유도 모르는 채 하인을 비난하는 주인과 다르지 않았다는 말 일게다. 아주 다른 종류의 경계를 가볍게 넘나드는 조주의 재치를 보여준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89호 / 2017년 4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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