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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명예원로의원 불심도문 스님 인터뷰

내가 깨달음 이루고 남도 깨닫게 도우면 그것이 부처님 세상

 

▲ 도문 스님은 용성 스님과의 인연이 숙세에서부터 이어져왔다고 믿는다. 또 용성 스님의 가르침을 선양하는 것이 석가모니부처님 때부터 이어오는 바른 가르침을 펴고 후세에 전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정사에도 봄이 깊었다. 경내를 화사하게 장엄했을 꽃들이 툭툭 떨어진 자리에는 연초록 잎들이 여릿여릿한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근래 부쩍 잦아진 봄날의 불청객 미세먼지와 황사도 이곳은 비껴가는지 가을마냥 하늘이 푸르고 맑았다.

남원 명문가 외아들로 태어나
12살 때 동헌 스님에게 출가
만암 스님 회상에서 참선공부
한암 스님 찾아가 점검받기도

용성 스님 유훈 일평생 실천
국내외 주요 불교 성지 정비
경전과 불서 등 곳곳에 보시
수계해준 불자도 112만여명

조계종 명예원로의원 불심도문(佛心道文) 스님이 머무르고 있는 죽림정사는 용성진종(龍城震鍾, 1864~1940) 스님의 탄생성지다. 용성 스님은 한국불교의 청정수행 기풍을 되살린 근세불교의 선각자이자 독립운동 주역이다. 계율을 정비해 불법을 바로 세웠으며, 수백 년 동안 출입이 금지되던 서울 도성 안에 대각사라는 번듯한 사찰을 건립했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뒤에는 불교 대중화에 더욱 힘을 쏟아 우리말로 옮기고 해설한 ‘상역과해금강경(詳譯科解金剛經)’을 펴내는가 하면, 절에 풍금을 들여놓고 아이들에게 찬불가를 가르쳤다. 직접 생계를 해결하며 수행하자는 선농일치(禪農一致) 운동을 전개했고, 승려들이 결혼하는 왜색불교 풍토를 일신하고자 노력했다. 또 만주 북간도에 대각사 포교당을 세워 선농일치 운동을 전개했으며, 머나먼 타향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동포들의 정착을 돕고자 무던히 애썼다.

1940년 2월, 용성 스님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입적했지만 한국불교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도문 스님 은사인 동헌 스님을 비롯해 동산, 고암, 인곡, 동암, 자운, 운암, 혜암, 소천 등 고승들이 모두 용성 스님의 제자였다. 성철 스님을 포함해 조계종 종정의 절반 이상도 용성 스님 문중이었다.

도문 스님은 일생 동안 용성 스님의 10가지 유훈을 잊지 않았다.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불교 초전법륜 폐허성지와 경주 남산 등 한국의 불교성지는 물론 부처님이 탄생한 룸비니,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야, 최초로 설법한 녹야원, 가장 오래 머물렀던 기원정사, 입멸한 쿠시나가르 등 인도·네팔의 부처님 5대 성지를 정비할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 또 불경과 어록을 100만권 넘게 발간 유포하고, 3귀의 5계 수계법회로 100만명의 수계제자를 배출할 것 등을 유훈으로 남겼다.

도문 스님은 은사 동헌 스님의 당부로 용성 스님 유훈을 실현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스님은 성역화를 위해 일일이 부지를 매입해 각각의 전래지에 사찰을 복원하거나 성역화했다. 경남 창원 봉림산 봉림선당지, 서울 서초구 우면산 대성사, 경북 구미 도개면 아도모례원이 그것이다. 또 부처님 탄생지인 네팔 룸비니에 대규모 한국 전통 사찰 양식의 대성석가사를 건립했으며, 붓다가야, 녹야원 등지에도 성지를 가꾸는 사업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지금까지 보급한 경전과 불서가 100만권을 훌쩍 넘겼으며, 1961년부터 2017년 4월까지 수계법회를 통해 성불의 인연을 맺어준 불자도 무려 111만968명에 이른다.

뿐만 아니다. 1998년에는 백두대간 한복판인 장안산 아래 위치한 용성 스님 탄생지를 성역화할 것을 발원하고 불사에 착수했다. 속가 가족을 비롯한 용성진종 조사 유훈실현후원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만6500m²(5000여평)을 구입해 성역화 불사 추진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이어 대웅보전 건립을 시작으로 꾸준히 불사를 진행해 용성 스님 생가, 승방 요사, 용성교육관, 용성기념관, 충의원통문, 행당 등을 차례차례 세웠고, 2007년 10월 마침내 죽림정사 낙성식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이곳 용성기념관에는 민족과 불교의 중흥을 위해 한평생 살다간 용성 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알 수 있는 유품과 저술들이 전시돼 있으며, 용성 스님의 유지를 배우고 이어가기 위한 교육공간도 마련돼 있다. ‘보살은 원력으로 살고 중생은 업력으로 산다’는 말처럼 도문 스님의 원력이 빚어낸 놀라운 성과들이었다.

그러면 도문 스님은 왜 용성 스님의 사상과 가르침을 펴는 데 평생을 바쳤을까.

“용성 스님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순교한 환성지안 조사의 후신으로서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계승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용성 스님의 가르침을 선양하는 것이 곧 석가모니부처님 때부터 이어오는 바른 가르침을 펴고 후세에 전하는 중대한 일입니다.”

도문 스님은 용성 스님이 주창한 대각사상의 핵심을 자각(自覺), 각타(覺他), 각행(覺行), 각만(覺滿)이라고 설명한다. 나도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함으로써 너와 나 모두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 깨달음이 충만한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용성 스님께서는 ‘마음 가는 곳에 부처님이 계시니 일과 이치에 불공하라(心處存佛 理事佛供)’고 하셨습니다. 이는 용성 스님께서 제시한 악을 그치고 선을 닦는 지악수선(止惡修善),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다는 이고득락(離苦得樂), 미혹을 굴려 깨달음을 연다는 전미개오(轉迷開悟)의 수행생활 3대 지침과 상통하는 것이지요.”

도문 스님은 용성 스님과의 인연이 숙세에서부터 이어져왔다고 믿는다. 1935년 전북 남원군 운봉면 동천리의 명문가 외아들로 태어난 도문 스님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출가자의 길이 예정돼 있었다.

도문 스님의 아버지 임철호 거사는 용성 스님의 재가 상좌이자 물질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애국지사였다. 용성 스님은 이런 그에게 자손을 잘 가르쳐 출가시킨 뒤 인도와 중국에서 전해진 정법을 이을 수 있도록 신신당부했다. 그러고는 세속의 이름은 윤화(允華), 법명은 도문으로 부르라고 직접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불심이 돈독했던 가족들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용성 스님이 어린 윤화를 찾아온 것은 입적을 얼마 앞둔 1940년 음력 1월이었다. 스님은 6살 된 윤화의 손을 꼭 잡더니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집안 어른들에게 12살이 되면 자신의 법을 이은 동헌완규(東軒完圭, 1896~1983) 스님을 은사로, 만암 스님을 계사로 출가해 공부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거듭 당부했다.

이때부터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를 매일 앉혀놓고 한학을 가르쳤다. 천자문을 비롯해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사서와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의 5경까지 가르쳤다. 그리고 손자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아가야, 너는 용성 큰스님의 법을 이을 아이란다. 이번 생은 안 태어난 셈치고 부디 열심히 공부해서 큰 도인이 되거라.”

1946년 8월, 12살의 윤화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따라 전남 장성 백양사로 향했다. 어린 손자를 절에 보내는 마음에 안타까움이 전혀 없을 리 없었다. 조부 임정준은 손자 윤화의 출가를 지켜보며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마음을 시로 남겼다.

‘조부모의 구운몽 읽는 소리와/ 금강반야바라밀경 육조단경을 듣고/ 선세의 인연을 따라 출가 발원하니/ 천지도 막을 수 없는데 누가 있어 막으리오.“

그곳에서 윤화는 만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 10계를 수지하고 동헌 스님을 은사로 출가자의 삶을 시작했다. 만암 스님은 어리지만 사뭇 총명해 보이는 소년 도문 스님에게 오른손을 서서히 들며 이렇게 말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라. 만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 이놈은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이를 지켜보던 도문 스님이 곧바로 손을 들더니 아래로 서서히 내렸다.

그러자 만암 스님이 감탄하며 말했다.

“아하, 그렇지. 썰물도 밀물, 밀물도 썰물이지. 하나 이놈이 어디로 돌아가느냐, 바로 만법으로 돌아가는 게지.”

만암 스님은 이전 세상에 도문 스님이 수행했던 습(習)을 보았다며 크게 기뻐했다. 이어 스님은 제방의 큰스님들에게 인편과 우편으로 이 사실을 알리고 점검을 요청했다.

“스승은 제자 업장 녹일 수 있는 용광로여야 합니다”

▲ 용성 스님의 ‘아난’이라고 불렸던 불심도문 스님. 용성 스님 유훈 실현에 신명을 바쳐온 스님은 이제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의 가르침을 쉽게 풀어내는 것이 마지막 바람이다. 그런 뒤에는 육체의 헌옷을 훌훌 벗어놓고 극락세계에 가서 부처님의 미묘법문을 듣고 무생법인을 얻는 것이 원이다.

1960년대 초부터 불법홍포에 주력
강원지역 19개 시군 순회하며 법문
용성 스님 실천했던 ‘촉목지법’으로
눈에 띄는 대로 실천하고 대중교화

1967년 경주 분황사 주지 맡은 뒤
서울대 등 불교학생회 창립 주도
보광·학담·법륜·혜능 스님도 상좌
“이제 불조 혜명 밝히는 책 펴낼 것”

얼마 후 도문 스님을 점검해보겠다는 답을 보내온 것은 오대산 상원사의 한암 스님이었다. 경허 스님에게서 깨달음을 인가받은 한암 스님은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며 오대산으로 발길을 돌린 이후 평생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암 스님은 밝은 선지(禪旨)와 높은 학문으로 당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만암 스님은 도문 스님의 종조부이자 방정환의 사위였던 동양화가 임봉권에게 도문 스님을 오대산까지 데려다 줄 것을 요청했다. 1949년 여름, 출가한 채로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도문 스님은 방학을 이용해 종조부와 오대산 상원사 청량선원을 찾았다. 한암 스님은 소년 도문 스님에게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을 참구하라고 했다. 이 화두는 위산영우 선사와 향엄지엄 선사 사이에서 벌어진 선문답으로 ‘부모님의 몸을 빌려 태어나기 전 본래의 자리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도문 스님은 선방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그렇게 여름 내내 정진하고 점검을 받기 위해 조실방에 들어갔다. 만면에 미소를 띤 한암 스님은 도문 스님에게 말했다.

“네가 앉아 있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더구나. 내년 여름에 다시 와서 인가를 받도록 하여라.”

이때 도문 스님의 눈앞에 다음해인 1950년부터 52년까지 3년간 부산을 제외한 나라 곳곳이 불바다가 되는 광경이 나타났다. 도문 스님은 조실방을 나온 뒤 이러한 내용을 종조부에게 얘기했다. 그러고는 조실 큰스님도 내년에 입적하는데 어떻게 인가를 받을 수 있겠느냐며 지금 인가해달라고 청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종조부는 “이 평화로운 세상에 불바다 운운하니 큰일 날 사람”이라며 노발대발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한암 스님은 종조부를 달래며 “식(識)이 맑으면 그렇게 될 수도 있으니 그리 알고 내년에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다음해 6월25일, 실제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통도사 조실 경봉 스님은 한암 스님과 탄허 스님에게 사람을 보내 난을 피해 남쪽으로 급히 내려오라는 말을 전했다. 한암 스님은 상원사를 지키겠다며 탄허 스님을 비롯한 제자들만 떠나보냈다. 그리고 탄허 스님에게 “전쟁이 끝나면 도문 수좌를 찾아서 전쟁 통에 불타 없어질 월정사 적광전 복원불사 화주·증명법사로 삼으라”고 신신당부했다.

오대산을 떠난 도문 스님은 화두 공부를 계속 이어갔다. 1950년 7월 남원 실상사에서 견도(見道)한 것을 시작으로 1954년에는 부산 범어사 조실 동산 스님으로부터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로, 1959년에는 순창 대모암에서 학선 스님으로부터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화두로 각각 인가를 받았다. 또 1961년에는 범어사 주지를 맡고 있던 은사 동헌 스님으로부터 시심마(是甚?) 화두로 인가를 받고, 마침내 용성 스님에서 동헌 스님으로 이어지는 정법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 불심도문 스님의 활동을 돕고 있는 김정광 죽림정사 사무국장과 한수승행 후원회장.

이 무렵 오대산 월정사 중창불사에 착수한 탄허 스님은 제자들을 보내 도문 스님이 와줄 것을 거듭 요청했다. 이에 도문 스님은 오대산으로 가 월정사 불사를 돕는 한편 본격적인 전법활동에 나섰다. 낙산보육원장을 시작으로 삼척 흥복사, 강릉 관음사, 평창 극락사 주지를 맡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 강릉 중·고등학교 불교학생회와 강릉불교청년회 지도법사를 맡아 이들 단체를 크게 활성화시키고, 극락사에 연화유치원을 설립한 것도 이때다. 도문 스님은 독실한 불자였던 박경원 강원도지사의 도움으로 도내 19개 시군을 돌며 법문을 설했다. 용성 스님이 해설한 ‘금강경’과 ‘육조단경’, 그리고 부처님의 일대기를 쉽고 명료하게 설명했다. 도문 스님의 해박한 지식과 거침없는 언변, 확고한 신념에 대중들은 환호했고, 속속 불교에 귀의했다.

도문 스님이 교화에 나서면서 늘 염두에 두었던 것이 용성 스님의 ‘촉목지법(觸目之法)’이다. 촉목지법은 눈에 띄는 대로 실천에 옮기고 상대를 교화하라는 가르침으로 용성 스님의 일생이 그대로 반영된 말이었다. 대한민국 독립의 절실함이 눈에 띄었기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대중들이 경전을 쉽게 읽지 못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기에 우리말로 옮겼으며, 대처식육으로 한국불교가 왜색화 돼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기에 지계건백서를 썼던 것이다. 도문 스님은 용성 스님이 그러했듯 눈에 띄는 대로 여법하게 일을 처리해나갔고, 곳곳에서 대중들을 교화해나갔다.

그렇게 6년을 보내고 월정사가 제 모습을 회복해갈 때 도문 스님은 은사 동헌 스님이 머물던 경주 분황사로 내려왔다. 1967년 분황사 주지 소임을 맡은 스님이 역점을 둔 것은 젊은 층 포교였다. 경상남북도를 통합한 영남불교 중고등학생회를 창립해 초대 지도법사를 맡았고, 서울대 총불교학생회 창립도 이끌었다. 도문 스님은 젊은이들에게 불교가 최상의 진리에 이르는 길임을 간곡히 일러주었고, 젊은이들은 그런 도문 스님에게서 불교가 자신의 전부를 걸어도 좋을 가르침임을 확신했다.

이들 중에는 출가자의 길을 걷겠다는 이들도 나타났다. 1970년 경주고등학교 재학생 때 출가한 동국대 총장 보광 스님, 서울대 법대생으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학담 스님,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 네팔 룸비니 대성석가사의 법신 스님,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장 월암 스님, 해인사 전 율원장 혜능 스님을 비롯해 분황사에서 설법을 듣고 비구니가 된 평택 명법사 회주 화정 스님도 도문 스님과의 인연으로 출가했다.

도문 스님은 상좌들에게 어떤 상황이든 그 자체가 자신의 스승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악업을 짓는 사람을 보면 ‘나는 악업을 짓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선업을 짓는 사람을 보면 ‘나도 선업을 지으리라’고 발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 경계에 사로잡히지 않고 성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재가불자에게 한없이 너그럽고 깍듯한 도문 스님이지만 상좌들에겐 그렇지 않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불호령이 떨어지고 자칫 쥐어박히기 일쑤다. 상좌들이 팔순을 훌쩍 넘긴 은사를 어려워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스승은 펄펄 끓는 용광로여야 합니다. 그런 용광로여야 쇳물을 녹여 다른 무언가를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스승도 쇳물을 녹일 수 있는 용광로처럼 힘이 있어야 하지요. 그래야 제자의 업장을 녹여 반듯한 수행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승이 해야 할 일입니다.”

지난 50여년 도문 스님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다. 법당이 아니더라도 학교, 군부대, 병원, 교도소, 야외에서도 법을 펼쳤다. 수시로 수계법회를 열어 남녀노소 모두가 계를 스승으로 삼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었다. 법명을 줄 때는 마음대로 짓지 않고 반드시 ‘만불명경(萬佛名經)’에 나오는 부처님 명호에서 취했다. 도반들이 서로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인연으로 꼭 성불하라는 지극한 마음을 담았다.
용성 스님의 ‘아난’이라고 불렸던 불심도문 스님. 용성 스님 유훈 실현에 신명을 바쳐온 스님은 이제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의 가르침을 쉽게 풀어내는 것이 마지막 바람이다. 그런 뒤에는 육체라는 헌옷을 훌훌 벗어놓고 극락세계에 가서 부처님의 미묘법문을 듣고 무생법인을 얻는 것이 원이다.

올해 부처님오신날 맞아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지 묻자 도문 스님은 ‘모든 악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업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청정히 하여 깨달아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라는 칠불통게(七佛通偈)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리고는 간절함이 담긴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했다.

‘사월이라 초파일에 부처님 오시었네/ 고해중생 제도하려 이 세상에 오시었네/ 가야 시작 3국 모두 불교전래 되었도다/ 자등명법등명 등불을 밝혀 찬양하세 오분법신향 피워서 예배하세.’

장수=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390호 / 2017년 5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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