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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진 바람에도 부서지지 않는 한 점 티끌이고 싶다

기자명 법보신문

108순례회 회주상-최용자

▲ 그림=근호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개나리, 진달래는 말할 것도 없고 벚꽃도 목련도 다투어 피는 호사스런 봄날이다. 해마다 맞이하는 봄이건만 느낌이 다르다. 내가 멀쩡하게 숨 쉬고 있다니 대견스럽다. 이 신비함은 전율로 퍼져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어김없이 오는 계절이건만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암환자 낙인, 5년째 투병생활
목숨 붙어있음에 항상 고마워

30년간 다니던 직장 떠나면서
마음공부로 평정심 지극 갈망

불교신자 친구덕에 전법회관서
처음으로 ‘금강경’ 사경 인연

우연한 기회에 길상사와 인연
길상사 다니려 고시원에 거주

사찰순례와 108배 하며 정진
진리 체득하려 공부도 열성적
부정적인 시각과 편협한 사고
서서히 사라지는 가피 체험해

요즈음 환절기의 불청객인 감기처럼 두세 집 건너 한 집 꼴로 암 환자라는 불편한 낙인이 나를 덮친 이후 유난스러워진 내 모습의 한 단면이다. 건강하다고 자신만만했던 나는 그로 인해 수술을 받았고 지금 5년째 투병 중이다. 그러다 보니 목숨이 붙어있음이 고맙고 생명에 대한 소중함에 새록새록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또 하나의 착각이 있다. 나는 불교와 인연이 먼 줄 알았다. 관심이 거의 없었다고 해야 옳다. 게다가 가족을 따라 80년대 초반 천주교 신자가 되면서 그 신앙이 깊든 아니든 불교에 대한 호기심은 접어버렸다.

그러던 내가 30여년간 다니던 직장을 떠나 홀가분해졌을 때 마음공부를 해서 평정심을 누리고 싶다는 막연한 갈망이 일어났다. 내 의지를 꺾곤 했었던 내 마음의 실체를 올바로 알고 돌파하고 싶다는 욕구가 밀려오곤 했다. 애써 흔들리는 마음을 잡았음에도 그 안정감은 며칠도 가지 않고 무겁게 짓누르는 우울감에 굴복당할 때 속을 알 수 없는 그 마음을 추스르려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동안 나를 줄곧 따라다니며 괴롭혀대는 지독한 번민도 따지고 보면 무심하기 짝이 없는 세속적인 물질에 대한 욕심이나 집착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른다. 직장동료들이 떠벌리는 자랑에서 멀찌감치 밀려날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내 현실은 절망뿐이었다. 엄청난 산이나 바다가 딱 가로막고 있는 막막함이 직장을 다닐 때는 어쩔 수 없었다손 치더라도 직장을 떠난 지금까지도 그림자처럼 따라와서 똑같이 나를 짓눌러댔다.

남들과 비교당하고 싶지 않다고 발버둥 쳐도 내 신세가 처량하고 하찮다는 것, 양념처럼 화제로 떠올리는 손자 자랑, 재산 자랑 등 입에 침이 마를 새 없이 주절대면 내 자존감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나는 강 건너 불구경 신세가 되었다.

그런 환경에서 절대로 달아날 수 없는 내 마음은 늘 칙칙했다. 내 소외감은 도를 넘었다. 삶에 대한 무의미, 마음을 옥죄는 열등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벗어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발길이 닿게 된 불교와의 인연! 그 뒤로 놀랍게도 내 삶에 점진적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항상 슬픔에 절어 살았던 콧날의 시큰함은 내면 깊숙이 침잠해 들어가는 선정과 삼매의 기쁨을 알면서부터 화해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신통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신자인 친구의 말을 빌리면 그랬다. 드디어 내가 시절인연이 닿았다는 것이다. 그 친구를 따라가 전법회관에서 처음으로 ‘금강경’ 사경을 하게 되었다. 외롭고 쓸쓸하기만 했던 나는 그냥 친구가 그리웠고 그 친구를 만나 종알거리는 게 좋았을 뿐이었는데 ‘금강경’을 멋모르고 쓰다 보니 집중력만 길러졌다. 적어도 ‘금강경’을 사경할 때만큼은 잡념이 멀리 떨어져 나가니 다행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글로 풀이한 것도 읽게 되고 ‘아상’이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 하는 단어의 뜻이 무척 궁금해서 마음에 걸렸다.

그러던 차에 길상사와 인연을 맺었는데 우연의 소산이었다. 나는 그때 직장이라는 틀에 박힌 생활에서 막 자유로워진 터라 온수에서 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따라와 원룸에 간신히 끼어 살고 있었다. 너무 비좁아 서로 반대로 누워 잠자는 거 빼고는 할 일이 없었다. 그곳에서 낮 시간을 소모한다는 건 답답한 노릇이었다. 이곳저곳 떠돌았다. 광화문도 기웃거리면서 산책하듯이 거닐고 한양 도성길 탐방에 끼어 4대문과 성곽길, 둘레길 걷기에도 서슴없이 따라나섰다.

‘숙정문’을 탐방할 때 약속시간에 맞추지 못해 팀에 합류하지 못했다. 가까이 길상사가 있다는 팻말을 보고 무작정 그쪽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해서 마주친 곳, 이미 알고 있었고 내가 언젠가는 찾아보리라 벼르고 있다가 발길이 우연히 닿은 곳이 길상사였다.

법정 스님에 대한 기사와 책을 읽었기에 처음 발걸음이었음에도 친근감이 생겨 어색하지 않았다. 일주문을 통과할 때부터 ‘삼각산 길상사’라는 편액이 정다웠다. 거의 물이 흐르지 않는 골짜기도 숲 가운데 자리 잡은 선원도 여기저기 놓인 벤치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항상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찾아오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자연스럽게 여유로워졌다. 겨울이 오고 있는 길목에 동네 뒷산을 오르듯 찾아와 너럭바위에 앉아 극락전을 바라보았고 오순도순 정답게 손 마주잡고 서있는 나무들을 감상하고 주변을 느릿느릿 소요하고 극락전 마당 오른쪽에 서있는 인자하고 너그러운 모습으로 조각된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눈감고 두 손을 모아 묵상하기도 하고, 탑 주위를 별 생각없이 돌다 보니 오묘한 즐거움이 불끈 솟았다.

더욱이 진영각까지 한땀 한땀 걸어가며 단풍이 물들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흠씬 받아들였고, 지장전 건물 안에 품격을 갖춘 사찰도서관에 들어가 ‘반야심경’을 사경하다가 책도 읽다 보면 저녁 무렵까지 지루한 줄 몰랐다. 그렇지만 나는 항상 혼자였고 말을 주고받을 상대도 없었다. 사람들이 오락가락 왕래하고 있었지만 가족 중심이어서 내겐 눈길조차 건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때보다 일찍 경내에 들어선 참이라 탑돌이가 하고 싶어 탑 쪽으로 걷고 있는데 설법전 들어가는 문이 열리면서 법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가 나긋한 음성으로 들어와 차 한 잔 마시고 가라고 내게 권했다.

딱히 바쁜 일도 없었던 나는 따라 들어갔다. 알고 보니 새신도회에서 하는 법회장소였다. 불경에 대한 갈증이 있었기에 열심히 귀 기울여 참여했다. 불경은 가까이 하기에 난감한 경전이었다. 문장이 전부 한문인 데다가 낯선 단어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어 새신도회를 이끌던 스님에게 나답지 않게 엉뚱해 보일 수도 있는 질문을 했다. 그 때 스님은 부처님 같은 온유한 미소를 지으며 내 물음에 막힘없이 술술 답변을 해주었다. 난 스님의 해박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일이 인연이 되어 나는 시골에 집이 있고 이제 아들은 더 이상 서울에 있을 필요가 없어져 시골로 내려갔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입문을 하고 불교대학을 다닐 목적으로 길상사와 가까운 곳에 있는 고시원에 내 임시 거처를 정하고 열심히 불교공부에 매진했다. 드디어 하릴없이 떠돌던 영혼이 정착지를 향해 둥지를 틀게 된 것이다. 하나씩 세상 이치에 대한 법문을 배워 익히는 습성이 일상이 되어갔다. 곁들여 이루어지는 종교체험도 놀라웠다. 템플스테이로 하룻밤을 사찰에 묵으면서 송광사를 무박 2일로 갔을 때도, 선운사와 내소사로 사찰 순례를 다녀올 때도, 108배 하기에 성치 않은 무릎임에도 건강한 땀을 흘려가며 정성을 다해 절을 올렸다.

불교공부는 마음먹은 것만큼 쉽지 않았다. 마음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왔노라고, 한 자락 깔았지만 열심히 따라다녔다. ‘불성(佛性)’이니 ‘공(空)’이니 하는 말들이 강의의 화두로 떠올랐고 강의를 맡은 스님들도 진리를 체득하게 하려고 열성적이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기적이 일어났다. 그 동안 내 마음을 점령하고 괴롭혀대던 번민의 소굴에서 벗어났음을 느꼈다. 세상을 보는 편협한 안목이 나도 모르게 혜안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내 안에서 싹이 터서 변해가는 정신혁명이었다.

3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불교공부를 하게 되었고 ‘향운행(香雲行)’이란 법명도 갖게 되었고 불교대학을 졸업하면서 부동품계를 받았다. 그리고 조계사에서 다른 도반들과 함께 포교사 시험공부를 했다. 용어조차 생소해서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고 이해도 힘들고 암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한 보람이 있어 불교에 대해 문외한이라 여겨 어정쩡하기만 했던 내가 포교사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이젠 내가 쓸데없는 걱정 근심에 매달려 산 지난날이 후회스럽기조차 했다. 광대무변한 우주 안으로 들어와 마음공부에 정진해 온 뿌듯함은 활력소 자체였다.

돌이켜 보면 탐진치(貪瞋癡) 삼독에 빠져 끙끙댔던 허무감은 어떤 철학가의 말처럼 죽음에 이르도록 마음을 할퀴는 병이었다. 이젠 한갓 허탈감이 사소하게 느껴진다. 진리의 큰 바다 앞에서 겸허해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평상심이 회복되었다.

아직도 불교의 교리나 의례에 있어 새내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예전의 못된 고집이나 습관이 남아 불교의 한량없는 바다 안에서 헤엄치면서도 혼란에 빠져들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편할 날 없이 허투루 낭비하고 있던 망상들은 힘을 잃어갔다. 나를 괴롭히던 원흉이 물러나자 그 자리는 귀하고 좋은 선지식과의 만남으로 채워졌다. 옥죄던 마음에 평화가 찾아들었다.

포교사 연수 물품을 점검하면서 목탁을 사는 날 내 마음은 부풀었다. 나도 목탁의 낭랑한 소리를 들어가며 경전을 외고 독경을 하겠구나. 범종루에서 예불에 쓰이는 법고와 운판과 목어와 범종소리, 그 소리들! 제각기 축생, 지옥중생, 날짐승, 수중생물까지 꼼꼼히 챙겨 제도하는 그 엄숙함에서 천상의 조화를 배웠다.

새벽 종성에 묻어나는 생명존중사상에 두 손을 합장한다. 하찮은 생물에게도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고 함부로 대하지 않는 그 자비심이 얼마나 따뜻한지. 발우공양을 하면서 깨달은 발심, 무심코 뜨거운 물도 수챗구멍에 함부로 버리지 않는 마음, 그 수챗구멍에서 느닷없이 물벼락을 맞고 죽을지도 모를 미물에게조차 해를 입히지 않으려는 배려심이 감동적이었다.

비록 ‘늦깎이’로 들어온 불교신행이지만 나도 열심히 정진하리라. 그리하라고 포교사의 길을 부처님이 안내해 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가진 재능을 성심껏 풀어쓸 일이다.

참마음을 찾아서 해매이던 길에 만난 불교와의 인연! 온전히 찾았다고 자부한다. 인간이 가장 귀하다는 것,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자식이 부모를 선택한다는 것, 자력신앙이라는 것, 내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부처님 앞으로 겸손하게 나아가는 게 참다운 신앙인의 자세임을 체득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더 이상 내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에 빠져 허우적거리면 안 되겠다. 그러기엔 인생이 너무 존귀하고 남아있는 삶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 얼마나 내 여생이 남아있을지 모르나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신행활동을 실천하고 싶다. 하나의 티끌로 태어났지만 그 먼지는 세상의 모진 바람에도 함부로 부서지지 않는 의미 있는 티끌 한 점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다짐해 본다.


[1390호 / 2017년 5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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