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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세월 불법에 의지했던 어머니는 내게 오신 부처님

기자명 법보신문

불교방송 사장상-이경숙

▲ 그림=허재경

엄마 가시기 두 달 전, 아들이 대학 입학 후 첫 여름방학을 맞아 3박4일 간 부산 외가에 다녀왔다. 손자가 집으로 출발했다고 부산역에서 공중전화를 거신 엄마는, “결이가 사춘기인 갑다. 대답도 잘 안하고 웃지도 않는 거 보이.” 하시길래, “대학생인데 무슨 사춘기예요? 성격이 원래 그래요.”하니, “형제 없이 자라 그렇제!” 걱정하셨다. “그저 부처님 전에 가 엎드려 있어요”하고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더니 “문수보살! 맞다. 그럴 수밖에…” 하셨다.

새 살림 차려 나간 지아비 대신
홀로 팔남매의 맏며느리로 살며
30여년 세월을 감내한 어머니
늘 공부하며 기도로 하루 시작해
스님 법문 들으며 삶 의욕 다져

극락정토 다녀온 꿈 두 번 꾸고
나에겐 ‘문수보살’이라 부르시며
지혜롭고 마음 넓게 살라 당부
진정 이 땅에 오신 부처님이셨던
엄마 편 되어주지 못한 날 회한
“부디 이제 극락서 평안하소서”

언제부턴가 엄마는 나를 ‘문수보살’이라 부르셨다. ‘숙아, 이 선생, 사모님, 애미야…’ 등 세월 따라 엄마가 나를 부르는 호칭도 변해갔기에 어느 날부터 문득 나를 ‘문수보살’이라 부르셔도 크게 궁금하지 않았다. 아들이 고3이 되며 입시기도를 시작한 나는 그제야 불법에 눈을 떴는데, 부처님의 가피인지 아들은 무사히 대학에 합격했다. 그러나 고교시절 내내 공부와 진로를 두고 실랑이를 한 나와 아들 간에는 상당한 고랑이 패여 있었다. 손주 때문에 딸의 속이 썩는 걸 안 엄마는 절에 올라 딸 대신 기도를 하셨다. 자식 넷을 홀로 기르며 속이 다 문드러진 엄마는 그날도 전화로 나를 위로해주셨다. “그기 자식이고 그기 부모인기다.” 하시며….

그날, 엄마가 나를 ‘문수보살’이라 부르게 된 연유를 전화로 처음 얘기하셨다. 몇 년 전 엄마 꿈에 어떤 스님이 오셔서 뭘 건네시며 “문수동자다” 하셨단다. 엄마가 그걸 받으며 “우리 큰딸한테 줘도 될까요?” 물으니 “그래라”하셨다고. 돌아가시기 직전, 병상에서 이 이야기를 또 한 번 더 해 주셨다. 나를 ‘문수보살’이라고 부르신 엄마의 뜻은 부디 딸이 그렇게 지혜롭고 마음 넓은 보살이 되라는 부탁이 아니었을까? 혹은 주문이!

40대 초반에 혼자가 된 엄마는 집을 나가 새살림을 차린 지아비 대신 팔남매 맏며느리로 30여년 세월을 감내해냈다. ‘차라리 남편이 죽고 없으면 과부라 동정이라도 받지’ 했던 탄식의 세월, 엄마는 외롭고 모진 그 세월을 부처님을 의지해 건너셨다.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삶의 의욕을 다졌다. 그 신산한 세월을 단정한 필치로 일기에 남겼다. 내가 몰랐던 엄마의 삶이 거기 있었다. 펼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

엄마는 시어머니가 두 분이셨다. 당시엔 두 분 다 돌아가신 뒤,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꼭꼭 눌러쓴 엄마의 일기. “1988.7.26. 백중이라서 절에 갔다. 항상 원하던 시어머님 두 분, 친정엄마 아버지 영가 천도했다. 마음이 개운했다.” “2008.8.8. 무자년 백중기도. 혜원정사 우란분절 49재에 나는 5재부터 참석했다. 어제 6재 때 조상천도에 쓰는 모든 용품을 준비해서 올리고 기도하고 왔다. 친정부모 2만원. 시부모 4만원.”

엄마는 해운대 폭포사와 범어사를 다니셨다. 자식들 생일과 부처님오신날, 동지엔 절에 올라 등을 다셨다. 아들네와 딸네 두 집 살림을 돌보며 무료진료소 찾아 아픈 다리를 달랬다. 노년에 이혼의 핍박을 받으며 심신이 피폐해졌지만 ‘부디 이 고통 견딜 힘을 주소서!’ 성심으로 기도하고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 견디셨다. 이 고난이 전생의 빚 때문이라 체념하시고 이생에선 열심히 살며 빚을 갚겠다고 마음을 다지셨다. 백중엔 며느리의 예를 지키느라 시부모 기도 동참금을 더 냈고, ‘여자가 한 번 출가하면 죽어서도 그 집 귀신이 되어야한다’는 부모님 유언을 끝까지 지켰다. 그게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 거라 생각했다. 참고 견뎌야할 사바세상! 엄마는 진정 이 사바세상에서 인고의 도리를 다하고 가셨다.

엄마는 늘 공부를 하셨다. 집 근처 작은 선원에서 불법을 배우며 부처님의 삶을 되새기셨다. tv를 보시다가 선인들의 지혜나 유익한 정보를 들으시면 일기에 꼭 적어두셨다가 전화로 내게 들려주시곤 했다. 엄마는 생전에 극락을 두 번 갔다. 그 중 첫 번째 얘길 병상에서 아픈 배를 부여잡고 조곤조곤 내게 말해 주셨다. 어느 날 꿈에 엄마가 극락에 갔는데 부처님들이 가득하시더란다. 방 안 가득 계신 부처님들을 보며, 중심에 계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엄마가 청을 했다. “부처님! 저리 많은 부처님들이 다 자리가 있는데, 왜 나는 없습니까? 나도 한 자리 주이소.” 했더니, 부처님이 “그래? 그럼 너는 이리 오너라!” 하시더니 부처님 오른 쪽에 자릴 내 주셨단다.

2010년 9월, 그 무덥던 여름 끝 무렵, 엄마가 떠나셨다. 49재를 마치고 범어사에 엄마의 위패를 안치했다. 종무소에서는 위패가 모일 때까지 사십 여일이 걸린다고 했다. 서울 집에 돌아 와 언제쯤 엄마를 뵈러 가나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러던 중, 남편이 부산에 강의 차 내려간 길에 범어사에 들렀단다. 혹시나 싶어 절에 올라 장모님 위패모신 곳을 찾았더니, 엄마는 설법전 한켠에 계시더란다.

밤늦게 돌아와 보여준 사진에, “행효 000, 진주 유인 *** 영가” 글자가 선명했다.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어쩌면!…” 하고 탄식했다.

엄마는 범어사 설법전 부처님의 오른 쪽에 앉아 계셨다. 그 모습은 바로 엄마의 꿈 내용이 실현된 것 아닌가? 엄마는 생전의 꿈대로 돌아가신 뒤 부처님 오른쪽에 안치되셨다. 언제나 겸손하고 사양하시는 성격인 엄마가 꿈에나마 어찌 그리 당당하게 부처님께 한자릴 요구하셨을까 의아해했는데, 엄마의 예지몽이 단순한 꿈이 아니었음을 마침내 입증하신 것이다. 엄마 가신지 백일 되는 날이었다. 그 날이….

너무나 놀랍고 신비스러웠다. 또 엄마가 진정 이 땅에 오신 부처님이셨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모든 불보살님은 세상에 나투실 때 모습이 정해져있지 않다고 했는데, 내게 오신 부처님을 어리석은 딸년이 몰라보고 그토록 홀대받고 고행을 겪으시게 했구나하는 자책이 가슴을 쳤다.

엄마는 가시기 2년 전 또 한 번 극락에 가셨다. 49재 동안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다 그 날의 일기를 발견했다. 엄마는 새벽에 극락에 다녀온 기쁨을 일기에 쓰고 종일 행복하게 하루를 보낸 후, 밤에 가계부 귀퉁이에다 또 극락을 본 기쁨을 적으셨다. 고단한 일상에 얼마나 큰 위안이 되셨을까….

*나 보일성 극락가다.(2008.3.20.)

“극락세계에서 사바세계로 오다. 나는 20일 새벽 꿈에 극락세계에 다녀왔다. 극락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극락세계가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20일 새벽 너무 황홀했다. 꿈을 깨고 나니 허황하다. 영원히 꿈을 깨지 말고 극락세계에서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생이 싫다. 미워하고 저주하고 그러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극락세계가 좋은지 말로 어찌 다 하리요. 남은 여생 착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자. 이 사바세계에서 깨어나지 말고, 극락세계에서 영원히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처님께서 남은 업장 다 풀고 오라고 보낸 것 같다. 나는 꿈에라도 극락세계 가 보고 오니 너무 기쁘기 한량없다. 내가 74년 동안 살아온 중 극락세계를 두 번째 가 보았다.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나는 지난 밤 좋은 꿈을 꾸었다. 부처님 원력으로 극락세계에 다녀왔다. 너무 극락세계가 좋아서 하루 종일 행복했다.”

올해로 16년째, 중앙박물관 연구 강좌를 듣고 있다. 엄마 가신 다음해에 용인대 배재호 교수의 불교미술사 강의를 들었다. 실크로드의 석굴사원을 훑은 뒤, 산서성 주변의 북제 시대 석굴사원의 불상을 공부했는데, 2학기 어느 강의 시간에 중원지방의 아미타정토도상을 보았다.

육중한 바위를 깎아 조성한 석굴사원에는 선인들이 믿은 아미타경의 세계가 구현돼 있었다. 다양한 불보살들의 모습과 아름다운 채색으로 가득한 석굴벽화를 보며 한때 그 땅에 살았던 선인들의 신심과 열정이 그대로 전해져 가슴이 벅차올랐다. 얼마나 지극함이 사무쳤으면 이런 예술작품을 남겼단 말인가?

아미타정토변상도는 마치 그림을 그리듯 돌을 깎아 극락정토의 경관을 표현한 작품인데, 부처님들이 가득 앉아계신 모습이 엄마의 그 꿈과 너무나 똑 같았다. 엄마가 꿈에 부처님의 오른쪽 자릴 받아 앉으셨다는 것이, 돌아가신 뒤 영구위패가 안치될 장소를 선몽하신 거라 생각했던 게 잘못이라 느껴졌다.

“엄마는 아미타부처님 계시는 극락의 모습을 꿈에 보시고, 돌아가신 뒤 바로 그 곳으로 가신 것이다. 엄마 꿈은 진짜 극락을 가리키신 것이었구나. 엄마는 진정 극락에 가셔서 그 많은 부처님들 한가운데 앉으신 것이었구나. 반신반의 당신이 믿으신 세계에 엄마가 가셨거니 위로 삼았더니 그 거대한 행복한 세상에 정말 엄마가 가셨구나!”

엄마 가신 뒤 일 년이 다 돼 깨달았다.

아름다운 극락정토에는 활짝 핀 연꽃송이마다 먼저 도착한 이들이 앉았기도 하고, 또 8공덕수 깨끗한 물에 뛰어 들어 헤엄치는 이도 있으며, 아직 연꽃이 피지 않아 오므린 꽃송이 속에 쪼그리고 앉은 이도 있다. 교수님 말로는 몇 겁이 지나서 그 사람의 공덕이 수준에 이르면 연꽃잎이 열리며 피어나 극락정토에 발을 내 디딜 수 있단다.

어쨌거나 전율이 일도록 놀란 난 집에 오자마자 지난 ‘고려불화대전’ 전시 때 산 도록을 펼쳐보았다. 먼빛으로 강의실에서 본 중국의 불화가 아니라 우리 불화에서 좀 더 확실히 확인하고 싶었다. 고려 후기 작품인 ‘관경십육관변상도’에는 무수한 부처님들이 그림 중간 부분의 극락세계에 그득 앉아계셨다. 보석으로 장식된 나무들과 천상의 음악이 연주되는 아름다운 누각이 있고, 왕생자들을 맞이하는 아미타 부처님이 계셨다. 말할 수 없는 환희심이 솟았다. 엄마가 꿈에 보셨다던 극락이 어떤 모습인지 늘 궁금했었는데….

‘그래! 선인들이 믿은 대로 극락은 저런 모습이겠구나! 엄마 임종 시 내가 통곡할 때에 아미타부처님이 이렇게 손을 내밀어 우리엄마를 맞으셨겠구나!’ 엄마가 계신 곳, 당신 힘으로 기어이 도달하신 곳, ‘극락정토!’ 눈물과 탄식이 같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6년 반이 흘렀다. 그 후로 하루도 엄마 생각 않고 울지 않은 날이 없다. ‘못난 아비나 다른 자식들이야 어찌 했던 간에, 나라도 마치 외동딸인 듯 엄마를 귀하게 여기고 노년을 보살펴드렸어야 했는데…’ 장남인 오빠를 더 귀해 하신 게 섭섭하기도 했고, 함께 기거하는 동생네가 불편할까봐 엄마께 자주 전화 드리지도 못했다. 엄마가 며느리 시집살이의 괴로움을 하소연할 때도 시누이 노릇 한다 소리 듣기 싫어, “요즘 것들 다 그래요. 나도 착한 며느리 아닌걸 뭐!”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렇게 엄마편이 돼 주지 않았던 날들…. 그 모두가 뼈아픈 회한으로 남았다.

엄마랑 쇼핑하고 차 같이 마시는 딸을 보면 부러움에 눈물이 솟고 찻값이라도 내주고 싶다. 동네 엄마 연배의 노인 분을 보면 한마디 말이라도 걸어 본다. 엄마가 주신 유산이다. “부디 지혜롭고 자비로운 보살행을 하는 사람 되어라. 문수보살 내 딸!” 엄마의 기원이 들리는 듯. 나도 마음속으로 가만히 축원한다.

“이미 극락에 가득하신 부처님들 중 한분이 되신, 이승에서 내 엄마이셨던, 강 보일성 보살님! 부디 이제 극락에서 평안하소서!”


[1390호 / 2017년 5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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