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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없이 꽃다웠던 고난의 역로, 동아시아에 불교 뿌리내리다

2. 역사 속 순례자들

▲ 구법승들의 순례가 있었기에 동아시아에 교리와 문화가 유입되며 궁극적으로 불교의 발전을 일궈낼 수 있었다. 사진은 현장 스님이 천축으로 향하던 중 들렀던 교하고성으로 현재는 폐허로 남아있다.

불교를 제외하고 동아시아 역사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래 이후 사람들의 정신에 빠른 속도로 아로새겨지며 파생된 영향력이 정치·사회·문화·경제 등 각 분야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지금도 현대인들은 곳곳에서 불교를 기억하고, 배우며, 믿고 있다. 나아가 탄신으로부터 무려 2600년 훌쩍 넘긴 시점이라는 사실까지 떠올리면, 부처님께서 열어 보이신 세계가 얼마나 올곧고 찬란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구법승, 3~11세기 인도 순례
이름 알려진 스님만 140여명
성도지 보드가야 ‘최다 방문’

난관들 뚫고 천축 이른 현장
대·소승 범본 657부 가져와
동아시아 불교사에 획 그어

의정 스님 ‘대당서역구법~’
신라·고구려스님 9명 기록
현각 스님, 인도에서 병사
대다수 귀국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위없는 법일지라도 그것을 탐구하여 전하는 이가 없었다면 널리 퍼져나가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시원(始原)에 닿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생생한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자 했던 구법승들의 노력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이 단행했던 순례 여정은 가히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했으며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고단했다. 그럼에도 길에 나섰던 것은, 당시까지 동아시아지역에서 갖춰지지 못했던 불전을 구하고 동시에 부처님 성지를 참배하려는 목적이었다. 구법승들의 숭고했던 순례는 동아시아에 교리와 문화를 유입시키며 궁극적으로 불교의 발전을 일궈낼 수 있었다.

구법승들은 3세기부터 11세기까지 다양한 루트를 통해 인도로 향했다. 2009년 사회평론에서 펴낸 ‘동아시아 구법승과 인도의 불교 유적’에 따르면 문헌에 나오는 구법인은 이름이 알려진 사람만 최소 165명으로, 이 가운데 140여명이 스님이었다. 이들은 서역을 거쳐 현재의 파키스탄 혹은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내려오는 육로나, 말레이반도를 지나 동인도나 남인도로 들어오는 해로로 인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간다라 등 인도 서북부와 성지가 밀집된 갠지스 중하류를 중심으로 방문했다. 특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던 보드가야는 기록상 가장 많은 28명이 방문하는 등 당시에도 최고의 성지로 추앙받았다. 교학의 중심지 나란다에 13명이 방문했던 것을 감안하면, 참배가 무엇보다 중요한 순례 목적이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구법승들의 순례 과정의 구체적인 모습과 순를 통한 궁극적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일반인들을 포함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구법승은 현장(602~664) 스님이다. ‘서유기’를 통해 소개됐던 것처럼, 현장 스님의 순례는 난관의 연속이었다. 11세에 출가한 스님은 전국 각지에서 경론을 배우며 빼어난 실력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던 중 경전 번역에 오류가 많다는 사실을 알았고, 29세가 되던 해 구법순례를 결심했다. 629년 장안에서 출발했으나 당나라 조정이 출국을 금지해 양주 변경에서 군사들에게 붙잡혀 도망쳐야 했고, 사막에서는 길을 잃고 헤매다 목숨을 잃을 뻔도 했다. 신심 깊은 불자였던 고창국의 왕 국문태(麴文泰)의 간청에 고창고성서 한 달 동안 머물며 법문을 해주었던 이야기는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다.

우여곡절 끝에 인도에 도착한 스님은 17년간 머물다 645년 대·소승 범본 657부를 가지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이는 동아시아 불교사를 송두리째 뒤바꾼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스님은 대승경 224부, 대승론 192부를 비롯해 상좌부의 경·율·논, 대중부의 경·율·논 등의 경전들을 번역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664년 입적할 때까지 20년 동안 74부 1335권을 번역했는데 산술적으로 5일에 한 권씩 번역한 셈이다. 현장 스님의 목숨 건 순례 목적이 오류가 많던 당시까지의 경전들을 대체하기 위해서였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현장 스님에 앞서 최초의 구법승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법현(337~420) 스님 역시 율장 부족을 개탄하며 길에 올랐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죽음의 땅 타클라마칸 사막과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을 넘어 천축에 도착했을 때 스님의 나이는 60세. 스님이 ‘불국기’에서 ‘하늘에는 새도 없고 땅에는 짐승이 없으며 오직 앞서간 이들의 뼈와 해골이 이정표가 된 길’이었다고 썼을 만큼 외롭고도 위험천만했던 여정이었다. 평균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을 당시에 노구를 이끌고 부처님 성지를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여정은 그 자체로 구도행이였다. 스님은 여행기 ‘법현전’에 지역별 이동거리와 거리, 풍습은 물론 불교세, 승려 수, 대·소승 여부를 기록해 불교사 연구에 있어 소중한 자료를 남겼다. 하지만 천축에 도착한 뒤에도 스님의 순례는 계속됐다. 북인도지역 경율이 구전됐던 까닭에 책이 없었고, 천축 곳곳을 순례하며 율을 얻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결국 중인도와 현재 스리랑카인 사자국에서 율장을 얻어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천축을 순례한 3대 구법승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의정(635~713) 스님은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을 통해 서역과 인도에서 구법한 61명 스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여기엔 신라의 스님 8명과 고구려 출신 스님 1명도 포함됐는데 전체 61명 가운데 1/7에 해당하는 숫자다. 서역으로의 구법 행렬에 한반도스님들의 동참 비중이 컸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은 많은 신라스님들이 천축으로 순례하는 것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는데, 특히 ‘왕오천축국전’을 지은 혜초 스님도 의정 스님의 기록을 바탕으로 순례에 나선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기도 한다.

‘대당서역구법고승전’(아연출판부, 2015년 발간)을 통해 확인된 신라스님은 아리야발마, 혜업, 구본, 현태, 현각, 부유 등이고 고구려 출신 스님은 현유다. 해동인으로 기록된 한반도스님들의 순례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7세기 초부터 시작됐지만 불행하게 마무리된 경우가 많았다. 현각 스님은 현조 스님과 함께 정관 연중(627~649)에 아소카왕이 금강좌 자리를 찾아 세운 사찰인 대각사에 이르렀으나 곧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가 40세를 갓 넘겼던 것으로 기록됐다. 또한 이름을 알지 못하는 신라스님 2명도 장안에서 출발해 해로를 통해 실리불서국 서쪽 파사노국(현재 몰디브 바로스)에 이르렀는데 병을 얻어 모두 죽고 말았다.

아리야발마 스님은 신라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정관 연중에 장안을 떠나 인도에 도착해 나란다에 머물며 율과 논을 익히고 경전들도 필사하며 귀국을 준비했다. 하지만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은 ‘슬프다! 돌아올 마음이 많았으나 기약한 바를 이루지 못하였다. 계귀의 동쪽 지경에서 나와 용천의 서쪽 변방에서 돌아가셨다. 나이가 70여세였다’고 전하고 있다. 혜업 스님 역시 나란다에서 생을 마감했다. 혜업 스님은 인도 보리사에 머물면서 예배한 뒤 나란다에서는 강경을 듣고 경전을 읽으며 법을 구했다. 의정 스님은 나란다에 방문했을 시 경전에서 ‘불치목 나무 아래에서 신라 승 혜업이 배껴 쓰다’라고 적힌 것을 발견했다. 이에 나란다의 한 스님이 “이곳에서 (생을) 마쳤고 60여세 가량이었다”고 증언했다.

현태 스님은 영휘 기간(650~655)에 티베트를 거쳐 네팔로 가 천축에 도착했다. 보리수에 예배하고 경과 론을 상세히 살펴보았으며 당나라로 갔으나 생을 마친 곳은 기록되지 않았다.

갖은 어려움을 뚫고 천축에 당도했지만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 세연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스님들의 이야기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을 수많은 구법승들을 떠올려주기에 충분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구법승으로 꼽히는 혜초(704∼787) 스님도 귀국하지 못했다. 719년 당나라에 유학해 광저우에서 인도스님 금강지에게 밀교를 배웠고, 723년 금강지의 권유로 순례에 나섰다. 상선을 타고 동천축(칼카타 근방)으로 들어가 칼카타에서 쿠시나가르, 녹야원, 파트나, 나란다, 왕사성, 보드가야, 바라나시, 상카시아, 사위성, 룸비니를 순례했다. 4년간 순례를 마치고 나서 쓴 책이 ‘왕오천축국전’이며 733년 장안으로 돌아와 787년 입적할 때까지 역경사업을 지속했다.

“진실로 아득하기만 한 거대한 사막과 긴 강에서 이글거리는 해가 토해내는 빛과 넓디넓은 거대한 바다의 큰 파도는 하늘까지 닿을 세찬 격랑을 일으켰다. 홀로 철문 밖을 걸어 계속 이어지는 만령에 몸을 던지고, 홀로 동주 앞을 표시하고 천강을 넘으면서 목숨을 버렸다. 간 사람의 그 수가 백의 절반을 넘었지만 머문 이는 겨우 몇 명이었다. 아아! 진실로 그분들의 아름다운 정성은 칭찬받아야 하고, 꽃다운 행적이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의정 스님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서 구법승들에 대한 찬탄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표했던 것은, 당시 순례에 갸륵한 신심의 숭고함과 그만큼의 위험이 병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아름다운 정성”이었고 “꽃다운 행적”이었다. 그들의 순례가 있었기에, 부처님 법이 동아시아지역에 깊게 뿌리내릴 수 있었고 법의 수레바퀴는 현재까지 돌아갈 수 있었다. 더없이 꽃다웠던 순례 하나하나 모여 지금껏 그윽한 법향을 퍼뜨리고 있다.

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1390호 / 2017년 5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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