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7. 순례여행의 매력

기자명 조정육

감동과 울림서 건져 올리는 가치의 재발견

▲ 손봉채, ‘물소리바람소리’, oil on polycarbonate, LED 1on, 2013 : 한 그루의 나무가 거목이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바람과 햇볕과 태풍과 눈보라를 견디며 고목으로 성장한다. 우리는 마음속에 어떤 나무를 기르고 있는가. 작가는 한 그루의 나무를 그리기 위해 팔이 고장 나도록 붓질을 하고 또 한다. 우리는 내 인생의 나무를 그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삼국유사 순례를 다녀왔다. 구미의 도리사, 영천의 거조암, 군위의 석굴암과 인각사 등 아도화상과 지눌법사와 일연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순례였다. 여러 차례 답사를 다녀봤지만 도리사와 인각사는 처음 방문이었다. 꽃 피는 계절에 찾은 역사적인 유적지. 여기에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앞장서서 감칠맛 나는 설명까지 곁들여주니 이보다 더 좋은 여행이 있을까 싶었다. 순례(巡禮)는 종교적으로 의미 있는 곳이나 여러 성지(聖地)를 찾아다니며 참배하는 것을 뜻한다. 뜻은 거룩하고 무겁지만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장소를 찾아가는 행위이니만큼 설렘과 기대가 더 크다. 순례를 여행으로 불러도 좋은 이유다. 남이 해 준 밥이 가장 맛있듯 다른 사람이 진행하는 답사여행이 가장 재미있다.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 없이 진행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니기만 하면 원하는 장소에 착착 데려다주는 여행이니 마음의 부담이 없어 더욱 좋다. 나 혼자 저 모든 것을 준비하고 조사하고 찾아다닌다고 생각하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여행에서 먹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주최측에서 맛집까지 미리 섭외를 해 도착하자마자 바로 먹을 수 있게 조처를 취해주니 금상첨화다.

삼국유사 성지순례 참여하며
전문가의 상세한 설명 듣고
일연 스님 발자취 더듬어봐
신화의 공간서 상상력 발휘

순례여행의 매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순례지에서 느끼는 감동이다. 이번 순례 여행 중 가장 큰 울림을 준 곳은 인각사였다. 인각사는 동화사의 말사로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역사적인 장소다. 절은 아담한 평지에 위치해 있었다. 여기가 진짜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 맞을까. 찬란한 명성과는 달리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듯한 모습이 애잔하기까지 하다.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듯 건너편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단번에 눈을 사로잡는다. 인각사(鱗角寺)는 바위 위에 기린(鱗)의 뿔(角)을 얹은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의 기린은 목이 긴 동물 기린이 아니다. 중국 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로 성인(聖人)의 탄생과 죽음을 상징한다. 한때는 번성했으나 지금은 퇴락한 고찰(古刹)을 거닐며 일연 스님의 발자취를 더듬어본다.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한 장소이니만큼 여기 있으면 저절로 글이 써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었을까. 부득 스님과 박박 스님이 목욕한 후 아미타불이 되었다는 스토리를 정리한 곳이. 저기였을까. 계집종 욱면이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묶고 방아를 찧으면서도 합장하고 염불하던 스토리를 구상한 곳이. 걸으면서였을까. 선덕여왕과 향기 없는 모란꽃을 연결시킨 순간이. 바위 위에 앉아서였을까. 달빛 아래 춤추는 처용을 생각한 곳이. 한때는 일연 스님이 사색하며 걸어 다녔을 인각사를 어슬렁거리는데 ‘삼국유사’에 묘사된 무수한 인물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그들 모두 이미 사라져버리고 이 지상에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한사코 되살리려는 기록자에 의해 영원히 살아 있다. 역사 속에 문학을 넣고 문학 속에 신화를 버무린 사람이 스님이라니. 역사책을 쓰면서 사람들의 삶을 은유와 상징의 연꽃 속에 기록한 일연 스님은 얼마나 매력적인 작가인가. 먼 훗날 눈 밝은 해독자의 발견을 기다리며 상징의 그물을 촘촘히 엮어 놓은 작가는 얼마나 치밀한 수학자인가. 그런 명작을 허술하게 몇 번 읽고 읽었다고 하면 부끄럽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인각사를 떠나올 때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는 신동엽의 시 구절이 떠올랐다. 내가 본 것은 단지 쇠락한 절. 그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먹구름과 지붕 덮은 쇠항아리를 하늘로 알고 살아온 것처럼 마음속의 구름을 찢고 머리 덮은 쇠항아리를 벗어던져야 외경(畏敬)을 알게 될 것이다. 외경을 알면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하며 ‘삼국유사’를 다시 읽게 될 것이다. 아니 일연 스님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순례여행의 두 번째 매력은 사람에 대한 감동이다. 지난 번 순례 때는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의 ‘유마경’ 강의를 듣고 경전에 대한 이해가 마구마구 쌓인 느낌이었다. 이번 순례에서는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의 조운찬 소장님을 만나게 된 것이 큰 소득이었다. 그는 ‘삼국유사’ 전문가가 이끄는 윤독회에서 원전을 읽으며 토론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는 오랫동안 ‘삼국유사’를 연구한 연구자답게 ‘삼국유사’의 가치와 의의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었다. 또한 지금까지 학계에서 진행된 ‘삼국유사’ 연구성과를 자세히 소개해 주어 이 분야에 전혀 문외한인 사람까지도 쉽게 정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육당 최남선의 말을 빌려 “‘삼국유사’는 우리 고대사의 최고 원천이며 저자 일연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에 비견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역사적인 사실과 풍부한 설화가 담긴 ‘삼국유사’에 대한 연구성과를 수렴해 ‘삼국유사학(學)’으로 승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치 중국의 ‘돈황학’이 중국 고유의 학문이면서 세계 학계가 연구하는 분야가 된 것처럼 ‘삼국유사’ 또한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는 설명이었다. 전문가의 강의를 들으면 이래서 좋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짧은 시간에 들은 강의였는데도 ‘삼국유사’에 대한 핵심은 거의 다 들은 셈이다. 내가 이 지점에 서 있구나. 일연 스님 같은 위대한 선배가 걸었던 길을 내가 걷고 있구나. 이런 안도감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만남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삼국유사학의 연구성과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의 얘기는 단지 ‘삼국유사’를 좋아하는 연구자의 열정으로만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일본에서의 삼국유사연구회 활동을 듣고 나서 심한 충격을 받았다. 삼국유사연구회는 한때 서울에서 교수를 한 미지나(三品彰英)에 의해 1958년에 일본에서 결성되었다. 회원들은 매주 윤독회를 하고 여름방학이면 합숙을 하면서 번역과 고증을 계속했다. 연구 도중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제자가 연구를 계속했고 손제자로 이어졌다. 그 결과 1995년에 5권으로 된 ‘삼국유사고증’ 역주본이 출판되었다. 38년 동안 3대에 걸쳐 사제 간의 공부가 계승된 결과였다.

우리도 잘 몰랐던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일본 학자들이 먼저 알아봤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자신의 나라 역사책도 아닌 이웃나라의 책을 40여년 동안 대를 이어 연구하는 그들의 집념도 부러웠다. 아니 두렵기까지 했다. 이것이 어찌 ‘삼국유사’의 연구에만 국한된 얘기겠는가. 이래서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삼국유사 순례를 떠난다. 내가 알지 못했던 지식을 얻고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우리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달에도 삼국유사 순례는 계속된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390호 / 2017년 5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