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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 스님 내면의 ‘아빠’가 진여불성이라는 건가”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17.05.10 15:06
  • 수정 2017.05.11 08:24
  • 댓글 69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기고- ‘대행선연구원장 이평래 교수에게 묻는다’

한마음선원이 설립한 대행선연구원장을 맡고 있는 이평래 충남대 명예교수가 5월19일 ‘대행선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첫 학술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런 가운데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이 ‘대행선연구원장 이평래 교수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으로 이평래 교수 및 한마음선원 대행 스님의 불교관을 비판하는 기고문을 보내왔다. 이에 대한 이평래 교수의 반론이 있을 경우 이를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

대행선연구원장 수락 소식 듣고
이 교수 연구업적에 깊은 회의
대행스님 가르침은 심각한 오류
정법 아닌 이적과 신통에 의존

어릴 때 정신적 갈등서 파생된
‘아빠’ 내적 존재 변형이 주인공
전통 선가의 주인공과는 무관
불성작용 아닌 무명업식에 불과

불교사에 없는 전대미문 행장을
佛祖와 연결하는 것은 어불성설
대행 스님 가르침 안 살폈다면
학자답지 않은 매우 경솔한 태도

평생 불교학 연구에 헌신한 원로불교학자 이평래 교수가 한마음선원에서 설립한 대행선연구원장을 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교수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나 역시 40년이 넘도록 불교계에서 활동해온 터라 이 교수의 불교관과 연구 결과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왔다. 특히 근자에 펴낸 ‘대승기신론강설’은 나에게 대승의 일심론(一心論)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지면을 통해서나마 감사드린다.

하지만 이러한 심정에도 불구하고 이 교수가 대행선연구원장직을 수락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을 때에 솔직히 나는 이 교수의 불교관과 연구업적에 깊은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 교수뿐만 아니라 이 교수의 후배 불교학자들까지 그 단체에 대거 참여했다는 소식은 나로 하여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게 하였다. 과연 이 교수는 대행선의 주체라 할 수 있는 한마음선원 창건주인 대행 스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얼마나 면밀히 살펴보고 그 직책을 수락하였는지 의심이 간다. 만약 이 교수가 대행 스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원장직을 수락하였다면 이는 매우 경솔한 태도라 아니할 수 없고, 그 반대의 경우라면 이 교수의 불교관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얼마 전 나는 이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신분을 밝히고 정중히 용건을 말하였다. 그러나 이 교수는 마치 보이스피싱을 당하는 사람처럼 황망히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이 교수의 인품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예의를 갖추어 조심스레 접근한 후배 불교인에게 이처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양식 있는 불교학자가 취할 행동은 아니라고 본다. 이 교수로서는 이와 같은 나의 행동에 상당한 불쾌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무슨 자격으로 자신의 거취에 대해 왈가불가하고 시비를 거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충분히 이 교수를 향해 나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찍이 대행 스님이 머리를 깎고 출가하기 전 몇 년 동안을 지근거리에 모신 적이 있으며 출가를 한 다음에는 10년 가까이 한마음선원에서 상임법사로 활동하였다. 나는 누구보다 대행 스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으며 법문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리고 한마음선원이 지금처럼 성장하는 데 있어 일익을 담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이처럼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나의 불교에 대한 좁은 식견에 비추어 보아도 대행 스님의 말씀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조사들의 종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빠’로 출발하여 후에 ‘주인공’으로 탈바꿈한, 대행 스님의 대부분의 가르침은 심각한 불교적 오류를 안고 있다. 나는 일찍이 대행 스님 생전에 이 같은 문제를 인지하고 직접 대행 스님과 몇몇 출가제자들에게 가르침의 부당성을 제기하면서 시정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끝내 대행 스님과 제자들은 나의 충언을 거부하고, 오히려 대행 스님의 가르침을 더욱 공고히 하여 국내외에 막강한 불교세력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냉정히 평가하자면, 한마음선원의 비약적인 성장은 대행 스님의 가르침이 정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적과 신통을 앞세운 대행 스님의 기행(奇行) 때문이다. 불교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말에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고, 이에 대한 증거는 ‘한마음요전’ 및 기타 설법자료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대행선연구원의 설립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결코 개인적 감정이나 이익 때문이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행 스님의 인격을 존경하였으며, 그 분으로부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은혜는 은혜이고, 사상은 사상이며, 소신은 소신이다. 대행 스님에게 받은 은혜를 이유로 종교적 신념을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나는 한마음선원이 과거 대행 스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연구하여 비(非)불교적 요소를 과감히 청산하고 정법도량으로 우뚝 서기를 기원한다. 이것이 대행 스님의 은혜를 갚는 길이라 생각한다. 내가 이 교수의 답변을 요구하는 것은 나 역시, 수십 년 전에, 대행 스님의 비불교적 요소를 정당화하고 확산시킨 데 큰 책임이 있다는 통렬한 반성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밝혀둔다.

또 하나, 대행선연구원이 설립된 이 시점에서 이 교수의 대행선연구원 원장직의 부당함을 밝히는 이유는 대행 스님의 가르침이 이 교수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대승의 일심론이나 불성사상과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 한마음선원 대행선연구원이 지난 2월27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학술대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행 스님의 ‘주인공’은 대행 스님의 어릴 적 정신적 갈등과 혼란에서 파생된 ‘아빠’라고 이름붙인 정체불명의 내적 존재의 변형(變形)에 불과하다.

‘한마음요전’과 기타의 설법 자료집에 나와 있듯 대행 스님의 과거 어린 시절은 매우 불우했다. 산속 외딴 집에서 가난과 고독에 시달려야 했고, 폐인이 되다시피 한 아버지의 핍박으로부터 고통을 당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행 스님은 감당하기 어려운 외로움과 고통을 나무와 풀과 돌 등의 자연물에서 위로받고자 하였다. 대행 스님은 이들 자연물에 “아빠”라는 호칭을 부쳐, “나무아빠” “풀아빠” “돌아빠” 하는 식으로 불렀으며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놀았다. 이러한 대행 스님의 행동은 9세부터 시작하여 유년기의 대부분에 걸쳐 진행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대행 스님의 내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아빠’라는 이름의 정체불명의 존재가 말을 걸어온 것이다. 내면의 그 아빠는 자신을 “너의 진짜 아빠”라고 밝히면서 앞으로 네가 원하는 모든 소원을 들어 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때부터 대행 스님은 아빠라는 존재에 의해 모든 삶을 지배당하기 시작한다. ‘한마음요전’을 보면 알 수 있듯 대행 스님의 이성과 판단력은 아빠에 의해 철저하게 잠식당한다. 대행 스님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에서 대행 스님의 정체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아빠는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적으로 발전한다. 아빠는 자신을 ‘하나님’ ‘부처님’ ‘만물의 근원’ ‘우주의 주인’이라고 말하며 대행 스님에게 무조건적인 믿음과 복종을 요구한다. 갖가지 기행과 이적을 나타내 보이는가 하면 대행 스님을 자신이 보낸 구세주나 보살이라고 계시한다. 이로 인해 대행 스님은 오로지 아빠에게 모든 삶을 내던지고 그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종이 된다. 아빠가 이 길로 가라면 이 길로 가고, 저 길로 가라면 저 길로 갔으며, 죽음의 길을 가라면 죽음의 길로 갔다. 아빠는 대행 스님의 보호자였고 스승이었으며, 조종자였고, 지배자였다.

이를 어찌 불성의 작용이라 할 수 있으랴? 이는 불성의 작용이 아니라 대행 스님의 정신적 갈등이 만들어 낸 거대 망념으로, 무명업식(無明業識)의 작용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필경 공하여 실체가 없는 무자성(無自性)의 청정한 불성을 무명업식에 의해 조작된 아빠와 동일시하는 것은 부처님과 조사들의 안목을 크게 훼손하는 행위이다. 불교 역사 가운데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전대미문의 행장을 불조의 종지와 연결시킨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다.

대행 스님이 출가하기 전 한마음선원 법당에는 불상 대신 비석 모양의 형상이 모셔져 있었으며, 신자들은 염불 대신 “심주 한마음”이라는 말을 외웠다. 당시 대행 스님은 신도들에게 자신을 ‘이생(利生) 보살’이라고 부르게 하였고, 신앙 원리로 ‘아빠’라는 명칭과 함께 ‘심주님’ ‘자기의 주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출가 후, 대행 스님은 이 다양한 명칭을 ‘주인공’으로 바꿨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조계종 수선회’라는 수행단체의 회장이었던 정모씨의 의견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당시 나 또한 정모씨와 함께 명칭을 주인공으로 바꾸는 데 역할을 했었다.

안타깝게도 대행 스님은 입적할 때까지 ‘아빠’를 전통 선가에서 사용하는 주인공과 동일하다고 착각하였으며, 지금도 수많은 불자들이 의심 없이 대행 스님의 가르침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그렇다면 대행 스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수행법은 어떠할까? 역시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수행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 자체가 불법과 일치하지 않는데 어떻게 올바른 수행의 결실을 가져올 수 있겠는가? 대행 스님이 가르치는 모든 수행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대행 스님과 동일한 ‘아빠’를 만들게 하는 삿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주인공을 믿고’ ‘주인공에 놓고’ ‘주인공을 관하는’ 공부법이 일변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는 정견이 아니며 선방편이 될 수 없다. 아빠와 연결된 수행은 관념놀음에 불과하며, 불성을 어둡게 하는 업 짓거리에 불과하다. 부처님이 설하신 수행 원리와 역대 조사들이 제시한 수행 방편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간과할 수 없는 일은 대행 스님의 이러한 전력과 가르침들이 객관적으로 누구로부터 검증을 받거나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대행 스님의 스승은 오로지 내면에서 나타난 정체불명의 아빠뿐이며 수행과 탁마와 검증도 모두 아빠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이는 사자상승(師資相承)과 인가(認可)를 중시하는 조계종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에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라 할 수 없다. 어찌 여기에 대행선이라는 명칭을 부여할 수 있으며, 연구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겠는가? 지금 한마음선원의 과제가 있다면 이런 식의 연구 단체를 설립하여 대행 스님의 가르침을 비호할 것이 아니라 대행 스님의 비불교적 요소를 과감히 걸러내어 정법으로 회향시키는 일이다. 부디 살불살조의 정신으로 돌아가 한마음 선원의 미래를 구상하기 바란다. 이것이 입적하신 대행스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나는 이평래 교수의 대행선 연구원장직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이번 결정이 한마음선원의 미래와 불교의 발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피력하고자 한다. 불교학자는 흙덩이에 금칠(金漆)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며, 여우 몸에 사자 가죽을 씌워주는 사람이 아니다. 진정 이 교수와 후배 학자들은 맞춤형 논문 제작자들이 되려하는가? 만약 한마음선원의 외양에만 치우쳐 대행 스님의 가르침을 정당화시키는 데에 앞장선다면 훗날 비판의 화살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나는 이 점을 우려하면서 이 교수에게 정중히 예의를 갖추어 묻는 바이다.
첫째, 이평래 교수는 대행 스님의 주인공이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삼세육추(三細六麤)를 벗어난 진여불성과 동일하다고 여기는가.
둘째, 이평래 교수는 대행 스님이 정체불명의 아빠라는 존재에 이끌려 취한 모든 행동들이 정상적 구도행각이며 진여훈습(眞如薰習)의 작용이라고 인정하는가.
셋째, 이평래 교수는 대행 스님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가르침들’이 과연 정법에 부합하며 불조의 뜻과 일치한다고 판단하는가.
이평래 교수의 소신 있는 답변을 기대한다.

[1391호 / 2017년 5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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