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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총림 해인사 방장 원각 스님 하안거 결제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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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5.11  11:4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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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上堂)하시어 주장자(拄杖子)를 세 번 치시고>

세존불설설(世尊不說說) 하고,
가섭불문문(迦葉不聞聞) 이로다.

세존은 설함 없이 설하고,
가섭은 들음 없이 들음이로다.

담주녹원(潭州鹿苑傳)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습니다.
“세존은 설하지 않고 설했고 가섭은 들음없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세존불설설(世尊不說說)이란 말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수미산도(須彌山倒)! 수미산이 거꾸러졌다.”
“가섭불문문(迦葉不聞聞)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대해고갈(大海枯渴)! 바닷물이 말라버렸다.”

앙산혜적 선사의 법맥은 서탑광목(西塔光穆) 자복여보(資福如寶)로 이어져 담주녹원 선사에게 전해집니다. 선사는 호남성 담주 지방을 중심으로 법을 널리 폈고 운집하는 많은 납자들을 제접 하였습니다. 녹원선사의 불설설 불문문(不說說不聞聞)의 법문은 세존과 가섭존자 사이에 이루어진 삼처전심(三處傳心)을 통한 선종전법의 시작이며 동시에 완성이기도 합니다. 설두지감(雪竇智鑑)선사는 “세존유밀어 가섭불부장(世尊有密語 迦葉不覆藏)”이라고 한마디를 더 보태면서 자기 살림살이를 대중들에게 들어낸 바 있습니다. 부처님은 은밀한 말씀이 계셨고 가섭은 그것을 덮어 감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은밀한 말이란 꽃을 들어 전한 종지를 가르키며, 가섭의 미소는 덮어 감추지 않는 방식의 응답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종문(宗門)에서는 많은 선지식들이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방식의 문답을 남겼습니다.
남양혜충국사에게 어떤 학인이 물었습니다.

“가섭이 부처님 곁에서 법문을 들을 때 들었습니까? 듣지 않았습니까?”
“듣지 않음으로써 들었다.”
“듣지 않음으로써 들었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듣되 듣지 않았다는 뜻이다.”
“세존이 하신 말씀이 있음에도 듣지 않음으로서 들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신 말씀이 없어서 듣지 않음으로써 들었다는 것입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지 않음으로서 말씀하신다.”
“세존께서 말씀하지 않음으로서 말씀하신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말이 세상에 가득 차도 말하는 입에 허물이 없나니라.”

남양혜충(南陽慧忠)국사는 육조혜능스님의 법을 이었습니다. 혜능스님 열반이후에 하남성 남양(南陽) 백애산(白崖山) 당자곡(黨子谷)으로 들어가서 40년동안 산문을 내려오지 않았던 당대의 대선지식이었습니다. 동구불출(洞口不出)은 선사들의 또 다른 가풍입니다. 혜원(慧遠)스님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서 30년간 그림자조차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오조홍인의 법을 이은 혜안(慧安)스님도 40년동안 숭악(嵩嶽)에서 두문불출 하였습니다.
대혜종고의 제자 둔암종연(遯菴宗演)스님도 누더기 한 벌로 추위와 더위를 이기면서 30년을 한 산중을 지켰습니다. 이런 선지식들은 3~40십년을 한 철로 삼아 결제정진하신 것입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했습니다. 송곳은 숨겨도 호주머니를 뚫고 나옵니다. 사향의 향기는 감추어도 바람따라 멀리 퍼져나가기 마련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인과 납자들이 찾아오고 왕과 고관대작은 물론 평범한 청신사와 청신녀들이 그 산문으로 법을 듣기 위해 모여들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혜충국사에게 숙종(肅宗) 대종(代宗) 두 황제가 귀의하였으며, 혜안스님은 측천무후의 요청으로 궁내설법을 하였고, 중종(中宗)이 내린 비단가사를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충스님과 혜안스님은 항상 초심을 유지하였으며 담백한 본성을 절대로 잃지 않고서 늘 천진 자연한 본래모습 그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어떠한 좋은 순 경계를 만났을 때도 그리고 나쁘고 악한 역 경계를 만났을 때도 늘 여여(如如)함을 잃지 않는 득력처(得力處)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정진을 통한 결제의 힘이란 이런 것입니다.

혜충국사께서 열반한 이후 조성해달라고 부탁한 부도탑은 무봉탑(無縫塔)입니다. 무봉탑은 이음새 없이 통 돌로 만든 탑입니다. 그 탑전(塔殿)에서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화두에 막혀버린 향엄지한(香嚴智閑)선사가 한동안 머물렀습니다. 탑 주변에 풀을 뽑고 청소를 하는 일상이 한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마당에 튀어나온 기왓장이 발에 걸려 넘어질 뻔 했습니다. 그래서 두 손으로 뽑아 멀리 내던집니다. 날아가 대나무에 부딪히는 소리에 크게 깨달았습니다. 이 자리는 바로‘향엄격죽(香嚴擊竹)’의 현장으로도 유명합니다.
열반하신 뒤에도 후학의 눈을 열어주는 대자비심을 가진 종장(宗匠)이었던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도 학인이 묻는‘불설설 불문문’에 대하여 자상하게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낙초자비(落草慈悲)는 열반이전과 열반이후를 가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스스로 중생의 입장인 풀(草)의 위치로 일부러 내려와서(落) 자비심을 베풀었습니다. 낙초지담(落草之談)의 설법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선종의 초조인 달마대사는 2조인 혜가대사에게 법을 전하면서 ‘능가경’을 함께 전했습니다. 『능가경』에“부처님과 모든 보살은 한 글자도 설하지 않고 한 글자도 답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법은 문자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불설일자(不說一字)’를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법이란 보고 들을 수 없으며 말과 생각과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선종의 사상적 토양인『대반야경』에서는‘세존미설(世尊未說)’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일찍이 이 깊고 깊은 반야바라밀다와 상응하는 도리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설한 적이 없고 그대도 한마디의 설법도 듣지 않았는데 도대체 이해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하면서 반문하신 것입니다.

또 세존께서 열반을 앞두고 “49년 동안 세상에 머물면서 한 글자도 말한 적이 없다. 그대가 다시 법륜을 굴려달라고 하니 이 말은 내가 언제 법륜을 굴린 적이 있다는 말이냐?”라고 하면서 한 말씀 해달라는 문수보살을 사정없이 꾸짖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의 자취가 일어나면 흰 구름이 천리만리 덮힌 것처럼 그것으로 인하여 도리어 길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마경’에서 ‘법을 설하는 이는 설함도 없고, 보여주는 것도 없으며 설법을 듣는 이는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다’고 했습니다. 종일토록 행하여도 일찍이 행했다고 할 것이 없고 종일토록 말하여도 일찍이 말했다 할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언어이전의 한 구절은 일찍이 일천성인(一千聖人)도 전하지 못했습니다. 또 스스로 언어이전의 한 구절을 몸소 만나지 못했다면 그것은 마치 삼천대천세계가 꽉 막혀있는 것과 같습니다. 설령 언어이전을 분별하여 천하 사람의 혀를 꼼짝 못하게 했다고 할지라도 이 역시 아직 제대로 된 놈이라고 절대로 부를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본분(本分)자리에서 말할 것 같으면 일체의 법에 대해 설할 것도 없고 들을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관찰이 소멸하고 언어가 끊어졌으므로 설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설할 수가 없으므로 들을 수가 없고 들을 수가 없으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 없음으로 인하여 도리어 모든 법에 있어서 받아들이지도 집착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상은 보는 것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보입니다. 만법은 듣는 것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서 들리는 것입니다. 강과 호수는 사람을 막으려는 마음이 없지만 사람들이 스스로 지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강과 호수가 도리어 사람을 막아버린 격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강과 호수가 사람을 가로 막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세존과 가섭은 대중을 속이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중들 스스로가 불조의 말씀을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에 세존과 가섭은 대중을 속이는 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존과 가섭이 대중을 속였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일 세존과 가섭의 이러한 뜻을 제대로 체득한다면 비로소 불조(佛祖)와 같아지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불조에게 만겁토록 속임만을 당할 것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말씀하셨고 가섭은 듣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들었다고 했습니다. 깨달음을 여는 한 마디의 말인‘불설설 불문문’을 남겨놓고서 천고의 세월동안 하늘과 땅을 진압토록 한 것입니다. 담주녹원 선사는‘불설설’에 수미산이 뒤집어지고 ‘불문문’에 바닷물이 고갈된다고 했습니다.

불설설(釋迦不說說) 불문문(不聞聞) 이여.
요곡작직(拗曲作直)이요. 망공계고(望空啓告)로다.

설함 없이 설하고, 들음 없이 들음이여.
굽은 것을 펴서 곧게 만듬이요.
허공에 하소연 함 이로다.


<주장자(拄杖子)를 한 번 치시고 하좌(下座)하시다.>

 

[1391호 / 2017년 5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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