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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스님 하안거 결제법어

  • 교계
  • 입력 2017.05.11 21:01
  • 수정 2017.05.11 21:24
  • 댓글 1

“혼침과 산란 벗어나 지금 여기 본래면목을 보라”

▲ 지유 스님.

오늘 아침 어떤 분이 ‘초발심’에 대해 물었습니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 처음 마음 발할 때가 바로 깨달음이라고 했는데 무슨 뜻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화두들 들든 무엇을 하든 괜찮습니다. 우선 가장 급하게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선문에서는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를 닦는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수고만 더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공부를 하느라고 애를 썼는데도 피곤하기만 하고 상기만 오르는 이유가 뭘까요. 바로 마음을 바로 알지 못해서입니다. 마음을 알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화두를 들고 의심을 하게 하는 이유는 다시는 의심하지 않고 믿게끔 하기 위해서입니다. 의심이 깨져 버려서 더 이상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신성취(信成就)’라고 합니다. 옛날 어느 선사가 불법을 터득하기 위해 고심을 거듭하다가, 아무리 연구를 해도 답을 찾지 못해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생각하고 생각해도 더 이상 생각할 도리가 없는 상황, 더 나아갈 수도 없고 포기하고 물러설 수도 없는 그 때, 갑자기 어디에서인가 종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깨달았다는 것은 무엇을 깨달았다는 뜻입니까?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종소리를 듣고 알아차린 것이고,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같은 종소리를 똑같이 들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도 종소리를 들었는데 깨닫지 못하고 왜 그 사람만 깨달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를 알았다는 겁니다.

종소리뿐만이 아닙니다. 좌선을 한다고 벽을 향해서 앉아 있을 때나 차를 마실 때에도 벽을 향해 앉은 것도 자신이요 차를 마신 것도 자신입니다. 종소리를 들은 것도 자신이 들은 겁니다. 여기에서 자신은 무엇입니까? 종소리는 있다가도 사라지지만 종소리가 났다고 해서 자신이 새로 생기거나 종소리가 사라졌다고 해서 자신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종소리를 듣고 자신을 알아차리고 보면 깨닫기 전에도 종소리이고 깨닫고 난 후에도 종소리 이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세속 사람들이 노동을 하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살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되고, 명예도 얻어야 되고, 권력도 얻어야 되겠다고 해서 치열하게 경쟁을 하고 싸움도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스님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예불 하고 염불 하고 청소 하고 식사 하고 밭일을 하면서 움직이는 것과는 무엇이 다를까요? 스님들의 움직임은 명예나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움직이는 모습은 스님이나 세속인이나 같지만 그 내용이 다릅니다. 스님들은 좌선할 때나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할 때나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실 때, 자기 속에 가지고 있는 모든 욕심과 감정 그리고 산란한 생각을 움직임의 동작을 통해서 쓸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조용히만 있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음이 옵니다. 일상생활에서 몸을 움직이고 소리를 듣고 물질을 보고 차를 마시면서 혼침에서 깨어납니다. 다시 말해 자기 속에 누적되고 있는 혼침과 산란을 덜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함도 돈을 벌기 위함도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닙니다.

원효 대사의 발심문에 있듯이 이 몸은 틀림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옷으로 몸을 감싸고 보호해도 목숨은 반드시 마침이 온다는 겁니다. 이 몸은 언젠가는 사라지고 맙니다. 이 몸이 사라지기 전에 몸 속에서 느끼고 있는 이 마음을 닦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음을 닦는다는 내용이 뭡니까? 남들이 욕했다고 해서 화가 나고 칭찬을 했다고 해서 들뜨고 있다면 안정된 마음이 아닙니다. 좌선을 한다는 것은 조용히 앉아서 물체를 보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서 어떤 마음으로 물체를 보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눈을 뜨고 벽을 보고 있는 겁니다. 벽은 내가 아닙니다. 벽을 보고 있는 자신이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하다 보면 가장 가까운 물체가 자신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물체가 눈에 들어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쓸데없는 생각을 다 털어버리고 어떤 생각에도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부처를 찾아도 안 되고 도를 찾아도 안 됩니다. 찾는다는 것 자체가 망상입니다. 모든 생각을 털어버리면 현실에 돌아옵니다. 현실이란 지금 이 자리를 말합니다. “두두물물이 진리요 도”라는 말이 바로 지금 이 자리를 표현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앉아 있을 때만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털어버리고 현실과 하나가 된 그 마음으로 일상생활에서 예불도 하고 청소도 하고 공양도 하고 사람을 상대하면 됩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바로 수행도량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 마음을 찾는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을 확실하게, 철저하게 의심 없이 확인해야 되는 겁니다. 옛 선사들이 목탁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는 말은 자기를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남을 깨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경허 선사도 모든 학인들을 다 쫓아버리며, “내가 강사라서 그동안 너희들을 가르쳤지만 불교의 문자를 알고 있는 것뿐이지 불법의 진리를 알았던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홀로 조용히 화두를 들고 고심을 했습니다. 아무리 연구하고 생각해봐야 답이 나올 수가 없고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랬던 것이, 지나가던 사람이 “콧구멍 없다”라고 말하는 소리에 홀연히 깨쳤습니다. 바로 자기 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겁니다. 눈을 뜨면 물체를 보고 있고, 목탁 소리가 나면 목탁 소리를 듣고 있는 자신입니다. 그 때를 ‘한시름 놓는다’, ‘견성했다’, ‘한소식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한소식하고 견성한 사람은 어떻게 생활합니까? ‘반야심경’에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깨달았다는 새삼스러운 지혜도 없고 더 얻을 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속에 온갖 그림자가 왔다 갔다 하면 그 생각을 탁 털어버리면 됩니다. 특별한 기술이 아닙니다. 현실에 돌아오는 겁니다. 구할 것도 찾을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법은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물론 겉은 똑같습니다. 하지만 밥 먹으면서 옷 입으면서 온갖 사량분별 속에서 종소리도 듣고 목탁소리도 듣고 있으니 언제 깨닫겠습니까. 그 마음을 비워 보십시오. 아무런 잡념이 없는 바로 그 자리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이고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모습입니다.

이와 관련해 조주 스님의 일화도 있습니다. 조주 스님이 임제 선사의 회상에 당도하셨습니다. 마침 임제 선사께서는 외출을 갔다가 돌아오셨습니다. 밖에 다녀와서 발을 씻고 있을 때 조주 스님이 임제 선사께 질문을 하셨습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임제 선사께서 뭐라고 답을 하신 줄 아십니까? “나는 지금 발을 씻고 있습니다.” 그것이 답입니다. 조주 스님께서 정말 발 씻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고개를 내밀자 임제 스님이 “거기 비키시오.” 하면서 발 씻은 물을 조주 스님에게 부어 버립니다. 그 자리에서 조주 스님은 물을 탁탁 털고 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달마 대사 뜻이 뭐냐고 물었는데 임제 스님은 나는 지금 발을 씻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조주 스님이 다시 ‘알긴 아는구나.’ 하고 확인한 겁니다. 그것이 이심전심(以心傳心)이고, 그것이 불법의 골자이며 달마 대사의 큰 뜻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곧 각자 자기를 설명한 겁니다.

이런 소리를 흘려보내면 안 됩니다. 여기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바로 보고 느끼는 이것입니다. 쓸데없는 감정과 욕심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소소영영(昭昭靈靈)하다’는 말의 뜻은 “분명히 들었고 분명히 차 맛을 본 바로 이놈”입니다. 여태까지 온갖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에서 깨어났다는 겁니다. 이제 잠꼬대를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날로 마음에 갖고 있던 감정과 산란한 마음이 차차 없어지면서 혼침과 산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마음의 그늘이 없어지니까 마음이 소통이 됩니다. 몸은 마음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그늘지면 곳곳이 막힌다고 합니다. 만약 어떤 수도인이 어떤 소리를 듣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라고 하면 그는 수도인의 자격이 없습니다. 쓸데없는 생각을 왜 품고 있느냐는 겁니다. 마음을 비워 버리면 자신이 보고자 하는 자성이 나타납니다.

이 이상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도달해서 1700공안을 하나하나 짚어보면 의심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이야기는 한 번 두 번 들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종소리를 듣고도 왜 깨닫지 못한 걸까요? 종소리는 오고 가고, 생하고 멸하지만 듣고 있는 나는 종소리가 났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종소리가 끝났다고 해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종소리를 들었지만 소리 없는 소리도 들었다는 겁니다. 종소리를 알아차리는 그 놈은 불생불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그렇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초발심때 깨닫는다는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때가 묻으면 깨닫기 어렵습니다. 초발심 때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서 계합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일할 때도 산란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일상생활 전체가 불법이고 도이며 수행이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임제록’의 한 구절을 읽어드리고 내려가겠습니다.

“나의 소견에서 볼 때는 조금도 어려운 것이 없다. 다만 평소대로 옷을 입을 때는 옷을 입고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고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을 보내면 된다.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나에게 찾아와서 자꾸 따지고 부처를 구하기도 하고 법을 구하고 삼계를 초월하고 싶다고 한다. 이 어리석은 자들이여. 삼계를 떠나서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부처라고도 하고 조사라고도 하는 것은 다만 그 사람의 덕을 높여 붙인 명칭일 뿐이다. 삼계(三界)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은가. 설법을 듣고 있는 너희들의 그 마음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생각 탐내는 마음이 욕계이며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색계이며 한 생각에 우치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무색계이다. 이것이 너희들의 집에 갖춰져 있는 가구이다. 지금 거기에서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하나하나 분별하고 의식하고 있는 그 마음이 전 우주까지 알고 있다. 그놈이 삼계라고 이름 붙인 것뿐이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내용은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스님이 5월10일 불기 2561년 부산 범어사 하안거 결제법회에서 설한 법어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391호 / 2017년 5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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