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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부처를 죽여서 사리를 얻겠다고-중

선사의 무람한 행동, 수평적 관계 위한 장치

▲ ‘웃음을 모르는 자들을 조심하라’ 고윤숙 화가

이른바 ‘원시사회’에 대한 관찰 속에서 인류학자들은 ‘농담관계’와 ‘회피관계’라는 특이한 두 가지 관계를 찾아낸 바 있다. 그러나 농담관계란 단지 ‘농담을 주고받는 관계’를 뜻하지 않는다. 예컨대 멜라네시아에서는 젊은 남자의 경우 길을 가다 사촌을 만나면 그에게 모욕을 주는 관습이 있다. 그다음에는 모욕을 당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다시 비슷하게 모욕을 주게 된다. 이는 아마존 지역 같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이처럼 농담관계란 어느 한 쪽이 상대방에게 조롱하거나 괴롭히기도 하고 공격하기도 하고, 다음에는 상대방이 그에게 그렇게 하도록 하는 의무화된 관계다. 어쩌면 강제적이라고 할 만한 무례와 비격식성을 특징으로 하는 관계다.

강제적인 권력 장착한 제도적 권위
가르치는 것 그대로 받아들이게 해
안목은 관습화된 권위 벗을 때 가능

반면 회피관계는 특정한 종류의 언행이 금지(‘회피’)된 관계를 뜻한다. 이는 지위가 높은 인물이나 경의를 표해야 할 사람 앞에서는 먹고 싸는 일, 섹스 등에 대한 언행이 ‘회피’되어야 하며, 종종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회피’되어야 한다. 가령 왕이나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코를 후비거나 방귀를 뀌는 것은 아주 몰상식하고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된다. 부모의 이름을 물으면 한 자 한 자 분리해 답하는 우리의 관습도, 함부로 부모 이름을 부르는 행동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니 회피관계에 속한다.

굳이 의무화된 농담관계가 아니더라도 농담을 주고받고 심지어 욕설을 써가며 말하는 관계, 배설이나 성에 대한 말을 주고받는 관계는 친밀하고 편한 관계다. 양쪽이 동등한 지위를 갖는 관계가 ‘농담관계’와 가까이 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반대로 회피관계는 지위의 고저가 뚜렷하고 위계와 권위가 지배적인 관계고, 서로에 대해 격식과 예의가 중요하며 친밀하기보다는 서로 어려워하는 관계다. 회피관계에서도 농담이나 외설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데, 이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만 허용된다. 성스러운 것에 대한 금기(taboo)도 모두 이런 회피관계에 속한다.

어떤 종교도 신이든 창시자든 대단히 성스럽고 지고한 것을 가지며, 그에 대한 경배를 요구한다. 신이나 창시자를 형상화한 조각이나 그림이 종교적 공간의 초점을 차지하며, 사람들의 시선이나 행동은 모두 그 초점을 향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함부로 접촉해선 안 되며, 그 앞에선 언행에 경건함이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성스러운 공간은 언제나 ‘회피관계’가 요구되는 공간인 셈이다. 이는 불교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양한 종류의 불상이 있고, 그 불상 앞에서 사람들은 절하며 적어도 그 앞에선 조심스럽게 말하고 행동한다.

이는 원래 고귀한 것, 탁월한 것에 대한 경외감이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고귀한 것이란 이루기 어렵고 희소한 것이기에, 그런 것에 대한 감탄과 존경의 마음이나 그것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경탄과 기쁨이 경외감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함부로 해선 안 된다는 존중의 태도가 조심스런 ‘회피’의 언행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외감으로 시작된 이런 존중의 태도는 시간이 지나면 안목 없는 이들로부터 고귀한 것을 보호하기 위한 관습과 제도를 만들어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제 모든 이에게 무조건적인 복종과 경배를 요구하게 된다. 무릎 꿇고 기도함으로써 믿게 만들고, 경배함으로써 따르게 만들게 된다. 존경심이 만들어낸 자생적 권위는 강제적인 권력을 장착한 제도적 권위로 바뀌게 된다. 존경에 따른 ‘회피’는 의무화된 회피관계로 고형화된다. 이는 역으로 자연발생적 경외감을 차단하고 자기 눈으로 고귀한 것을 알아볼 기회를 제거한다. 자유로운 사고는 제약되고, 정해진 규칙들이 각자의 사고를 대신하게 된다. 진정한 경외감이란 수평적 관계가 주는 자유로움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런 경탄과 존경이다. 이는 관습화된 제도적 권위관계를 깰 때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선사들이 스승에 대한 ‘대신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종종 당혹스러울 정도의 파격적 언행으로 사제관계의 도를 깨거나 넘어서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굳이 ‘농담관계’로 국한하지 않아도, 익살스런 언행이나 무람한 행동들은 수직적인 관계 안에 수평적인 관계를 만들어낸다. 권위에 억눌린 사고를 깨고 자유롭고 분방한 사고가 흘러넘치게 된다. 심하게 말하면 가장 높이 있는 인물과 내가 동등한 지위에 서게 된다. 부처님과 내가 말이다! 말해보라, 단하의 행동에서 부처를 보았는가?

그러나 수평적 관계를 만드는 게 무조건 타당한 것은 아니다. 이미 깨달음을 얻어 지고한 안목을 얻은 이와 그렇지 못한 이를 평등이란 말로 동등하다 하는 것 또한 억지다. 높이 올라간 이는 높은 곳에 있고 낮은 곳에 머문 자는 낮은 곳에 있는 것이다.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깨달은 자의 명성이 있고 절 안에서의 지위가 주어져 있는 한, 높은 곳에 오른 이는 그냥 자신이 발 딛고 선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새 권위적인 관계 속에 들어서기 십상이다. 권위적인 관계는 가르치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나 이는 깨달음이나 부처도 자신이 직접 맛보고 체득하라며 부처나 조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걸 독이라도 되는 양 경계하는 선(禪)에서는 매우 난감한 것이다. 불조의 언행을 스승들이 나서서 엎어버리는 것은 이 때문일 게다. 

웃음을 야기하는 문답과 달리 상대방을 면전에서 욕하거나 심지어 때리는 것 또한 앞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선승들은 심지어 부처와 동급인 자신의 스승들에 대해서도 이런 ‘짓’을 한다. 가령 마조 회하에 있을 때 남전이 대중에게 죽을 돌리는데 마조가 물었다.

“통 속은 무엇이냐?”
“닥치거라 이 늙은이야! 무슨 말이냐?”

그러자 마조는 그만두었다.

통속에 들어있는 게 뭐냐는 물음이 아니라 통속, 혹은 통속에 든 것의 당체를 묻는 것일 게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 이전의 것이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여 무엇이라는 규정을 하는 순간 벗어난다. 하여 남전은 저리 거칠게 입을 막아버리는 말을 한 것일 게다. 마조가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 마조가 거기서 그만두어 버린다. 남전의 답을 그대로 긍정한 게 아니다. 거기서 몸을 돌려 답을 하길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남전이 저리 말한 것을 그저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니 다시 되받아치지 않고 그만두어 버린 것이기도 하다. 그만두는 행위 자체가 또 하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욕설마저 섞어 주고받는 문답에서 스승과 제자의 고식적인 위계 같은 건 없다. 도를 묻고 답하는 수평적 관계만 있을 뿐이다. 허나 이게 다는 아니다. 욕설마저 구사하며 자신의 기틀을 내보인 제자가 있고, 그 말을 듣고 물러서며 응수하는 스승이 있다. 제자의 식견을 한눈에 알아보는 스승이 있고, 그런 스승임을 잘 알기에 과감하게 자신의 기틀을 펼치고 밀고나갈 수 있는 제자들이 있는 것이다. 욕을 얻어듣고 그냥 뒤로 물러서는 스승을 보고 남전은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을까? 그럴 리 없다. 묻지 않았을까? 왜 저 노인네가 저러는 것일까? 스승이 물러서며 열어준 여백의 공간, 거기서 남전 스스로 몸을 돌려 빠져나와야 한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91호 / 2017년 5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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