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 2017.9.20 수 21:02
> 연재 | 강병균의 수학자가 본 금강경
16. 앎은 외계에서 내계로깨달음은 언어 영역 밖…체험만이 있을 뿐
강병균 교수  |  bgkang@postech.ac.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05.16  13:28:10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생명체의 앎은 외계에 대한 앎으로 시작한다. 갓난아이의 성장은 먼저 외계에 대한 탐색과 인식으로 출발한다. 자신에 대해서는 몰라도 생존이 가능하지만, 외계에 대해 모르면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 35억 년간의 지구 생명체의 삶은, 외계에 대한 정보의 축적이다. 모든 생명체가 그렇다. 그러다가 인간이 등장하면서 겨우 수천 년 전에, 장장 35억 년 만에,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주체에 의한 주체의 탐구’라는 인식론상의 혁명이다. 소위 회광반조(回光返照)이다. 인식의 힘을 밖으로부터 안으로 돌리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나는 모른다'는, 외계에 대한 무지가 아니라, 내계인 인식주체에 대한 무지의 고백이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 전혀 몰라
뇌기능 알게 된 것 백년도 안 돼
번뇌 소멸해도 원리 알길 없어


인간은 자신에 대해 모른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자기라고 알아보는 침팬지·돌고래·까마귀·문어가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르듯이,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른다. 35억년 동안 모른 걸 이제 조금 알았다고 다 알 수 있겠는가? 심장의 기능과 혈액순환을 알게 된 것은 400년도 안 되고, 뇌의 기능을 알게 된 것은 100년도 안 된다. 병정개미에 해당하는 백혈구와 면역체와, 일개미에 해당하는 체세포와, 여왕개미에 해당하는 난소와, 수개미에 해당하는 정자를 발견한 것도 150년이 안 된다.

여왕개미가 개미집 안에 벌어지는 일을 모르듯이, 그리고 실시간으로는 더욱 모르듯이, 우리는 우리 몸과 마음에 벌어지는 일을 모른다. 침입군 종기균과 결핵균과 싸우느라 수억 백혈구가 전사해도 모르고, 수억 마리 정자가 자궁을 향해 장도에 올라 산성 바다에서 무수히 죽어나가며 사투를 벌여도 모른다. 그 생과 사의 순간 우리는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고 노래방에서 ‘내 마음 나도 몰라’ 고래고래 노래를 부른다.

변연계가 희로애락애오욕구(喜怒哀樂愛惡慾懼)를 생산해도 의식에 떠오를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감정이 생체전기에 실려 뇌신경회로를 타고 의식에 다다를 때까지는 수밀리 초 정도 걸린다. 어떤 감정은 도달하기 전에 생체전기가 다해 힘을 잃고 사그라든다.

심왕(心王)은, 설사 있다 해도, 생각 외로 무기력하다. 대기업 사장이 회사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실시간으로 알 수 없듯이, 심왕도 몸과 마음속에 벌어지는 일을 다 알 수 없다. 실시간으로는 더욱 불가능하다.

뇌에는 1억 개 정도의 수많은 부서가 있고, 그 많은 부서 사이의 상호 작용은 우리 의식에 잡히지 않는다. 신경다발인 뇌량(腦梁)을 통한 좌뇌와 우뇌의 유기적인 작용은 이음새 없이 매끄러워 평소에는 하나의 단일한 작용으로 느껴지지만, 정신분열증 환자와 간질환자와 뇌량절단수술을 받은 사람에게는 좌우 두 개의 의식이 나타난다. 그걸 본인은 모른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에 대해서 모른다. 35억년 동안 모르다가 겨우 100년 전에 좀 알기 시작했는데,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실존은 앎에 선행한다. 무의식의 활동은 의식에 선행하고, 의식은 언어에 선행한다. 수행은 우리 커넥톰(connectome 뇌신경세포와 뇌신경망과 그들 사이의 연결형태)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변화한 커넥톰은 무의식을 변화시킨다. 그 변화는 때로 언어적 표현을 넘어선다. 뭔가 우리를 근본적으로 바꾼 변화가 일어났지만, 의식은 모른다. 무의식은 그걸 감지는 했으나 표현할 말과 길이 없다. 문화부가 아직 국토발전을 따라오지 못하는 격이다. 마음속에 정체성과 번뇌를 보고 다루는 시각과 수단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 ‘나’에 대한 집착이 끊어지고 번뇌가 소멸했지만 그 작동기제를 알 길이 없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에서처럼 자기 뇌 속으로 들어가 볼 수도 없으니, 당사자는 꿈을 꾼 당달봉사 벙어리이다.

이런 (미묘한) 경험은 언어화하려는 순간 곧잘 (성글고 엉뚱한) 언어에 오염되어 사라진다. 풍경에 컬러필터를 들이대면 풍경에 색편향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파장이 작은 소립자에 큰 소립자를 들이대면 작은 소립자가 오염되는 것과 같다. 순수한 경험은 경험 그대로 느껴야 한다. 무의식적이건 의식적이건. 그게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다.

깨달음이 온다면 분명히, 먼저 무의식의 세계로 온다. 그리고 그게 의식으로 나타날 때 언어화된다. 의식상에 나타난 깨달음은, 무의식 속에 있는 나타나지 않은 깨달음에 비해 훨씬 더 작기에, 빙산의 일각이다. 숨어있는 깨달음은 언어의 영역이 아니기에 체험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체험을 촉발시키는 게 직지인심이다. 그리고 그게 성공하면 견성성불이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391호 / 2017년 5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기사 댓글 1
전체보기
  • 푸른솔 2017-05-28 04:00:30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리 마음의 신비함!
    그 위대하고 위대한 힘을

    우리 인류는 언제쯤 알게 될까요?신고 | 삭제

    라인
    포토뉴스
    라인
    가장 많이 본 기사
    여백
    실시간뉴스
    라인
    여백
    법보신문은찾아오시는길구독·법보시광고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03157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편집국 : 02-725-7014  |  광고문의 : 02-725-7013  |  구독신청 : 02-725-7010
    사업자 등록번호 : 101-86-19053  |  정기간행물·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07229  |  등록일자 : 2005년 11월 29일  |  제호 : 법보신문
    발행인 : 김형규  |  편집인 : 이재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형규
    Copyright © 2013 법보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