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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곤란을 해결하는 방법 ②

“부당한 괴롭힘은 능력을 키우고 수행을 돕습니다”

▲ 불광산 개산 초인 1960년대 말 청년들과 함께 포교에 나선 성운 대사. 대만 불광산 제공

"사람이 바른 행동으로 옳은 일을 하면 종교는 종교이고 정치는 정치인 것으로, 어느 누군가가 황당한 말로 모함을 해도 불광산의 일체 불사가 바르기 때문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생존의 어려움이 해결되자 사찰의 합법화’라는 문제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저에 대한 지방정부 책임자의 오해 때문에 10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불광산사의 사찰등록 신청이 줄곧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선출직 공직자의 경우 언젠가 자리에서 내려올 때가 있을 것이고 출가자인 빈승의 경우 평생 수행자로 살아갈테니 천천히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10년이 지나고 나서 1977년 빈승은 수산사의 사찰등록증을 받게 되었고 내정부(內政部)의 허가를 거쳐 삼단구족대계를 봉행했는데 대만 불교계의 모범적인 수계의식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0년의 세월이 저에게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던 것은 제가 시간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만수원 공원묘지’를 허가받는 과정에서도 수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대만 북부의 이란에 있으면서 ‘진백분(陳洦汾)’ 선생을 알게 되었는데 그 분은 대만성의회 의원이었고 ‘당단(黨團) 서기’이기도 하였는데 허가증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빈승은 과거 40~50년 전 고속도로가 없던 시절에 이란에 상주하였고 불광산은 남부 가오슝에 위치하였기에 오고가는데 보통 하루 24시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특히 우리 불교도는 채식을 하므로 도중에 식사를 할 곳이 없어서 중도에 국수집을 찾아 식사문제를 해결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북으로 왕래하는 불자들에게 식사를 준비해 줄 수 있는 분원이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결정이 있은 후 제자들은 중부지역의 여러 곳에서 마땅한 장소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에는 ‘장화(彰化) 복산리’란 지역에 쓰레기 처리장이 있었는데 구매 비용이 저렴하였기에 쌓여있는 쓰레기는 천천히 처리하기로 하고 즉시 구입을 했습니다. 이곳에 ‘복산사’를 지으면 남북으로 왕래하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였으니 숙소도 되고 식사문제도 함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우리는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만 했지 어려움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복산사’도 수산사와 마찬가지로 건축허가의 신청부터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처음 민정국에 가서 사찰등록을 하려고 하니 담당 공무원은 저에게 “사찰의 건축허가증도 없고 절도 지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민정국에 와서 사찰등록부터 하려는 겁니까?”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저는 담당자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이번에는 건설국으로 갔더니 이번에는 “사찰 등록도 하지 않고 사찰을 지으려는 건가요? 사찰등록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 건설국에서 어떻게 건축허가를 해줄 수 있습니까?”라는 또 한번의 핀잔을 들어야 했습니다.

양쪽이 서로 공을 치듯이 등록을 미루는 상황에서 저는 건설국과 민정국 사이를 여러 차례 왕래를 하면서 수년의 시간을 보냈지만 결코 진척이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다시 ‘진백분 선생’의 도움으로 우리는 중앙 성정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도 되는 장화지방정부로부터 건축을 허가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우리들의 건축사전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 못마땅한 지역정부 관료들은 우리들에게 “신도대표 27명 모두가 다 빠짐없이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며 애국가도 불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불광산 초기 불자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다들 젊은이들이었기에 신도대표 27명의 동참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사람을 무시하고 고압적인 관료들의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27명이 함께 불러야 하는 애국가가 걱정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27명이 함께 아주 잘 음률에 맞게 부른 애국가는 제가 듣기에도 매우 좋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평소 자신들이 얕잡아보던 출가자들이 애국가를 이렇게 잘 부르는 것을 보고 그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바로 태도를 바꾼 뒤 어떻게 이렇게 부를 수 있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들은 국가행사에서도 이렇게 듣기 좋은 애국가를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불교도들은 사회의 편견과 괄시와 배척을 받고 있었고 지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출가자들이 애국가를 부를 줄 알뿐만 아니라 이렇게까지 잘 부르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게 되면서 관료들은 우리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우리들이 사찰을 건축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해주었습니다. 이렇듯 많은 어려움들이 단지 금전적으로 해결하는 것뿐만 아니라 운도 따라주어야 하고 또한 자기의 기본적인 역량과 자신의 실력 또한 갖추고 있을 때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빈승이 처음 불사를 시작할 당시의 불광산은 지역이 골짜기가 이어진 아주 척박한 언덕이어서 평지에서의 공사보다 몇 배가 넘는 공사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야외 변두리에 위치한 관계로 당장 등록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저 역시도 급한 마음보다는 자신의 능력이 되는대로 천천히 발전을 도모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간의 규모로 건물들을 지은 뒤 사찰등록을 하려고 하자 관계자로부터 “당신들은 필히 소방차 2대와 소방대원 50명을 갖추어야 등록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요구사항을 듣게 되었습니다. 법령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들의 말에 아마도 매우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고 이 사람들의 무리한 요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불광산보다 더 큰 규모의 건축물들도 많은데 중앙청에는 몇 대의 소방차를 갖고 있습니까? 지역의 정부청사에는 몇 대의 소방차를 갖고 있나요? 우리처럼 작은 사찰이 어찌하여 소방차 2대와 소방대원 50명을 갖추어야 하나요?”

저는 그 사람이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고 하는 것을 알았기에 천천히 그 사람과 응대하다보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재난은 이렇듯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제가 총기류를 200정이나 숨기고 있다고 누군가 밀고를 했고 불광산을 조사하겠다는 지시가 있기도 했습니다. 저는 “저한테 몽둥이 200개조차 없는데 무슨 조사를 하겠다는 것입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또 관련 부서에서는 저에게 ‘공산당 반대, 소련 반대, 주은래를 죽이고 모택동을 제거하자(反共抗俄 殺朱拔毛)’라는 표어를 크게 내걸으라고도 했습니다. 빈승은 “종교 장소가 어찌하여 이렇게 살기로 가득해야 하나?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찰은 평화와 우호로서 조화를 추구하는 곳인데 어찌하여 반대와 살육을 표방해야 합니까?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라고 강력하게 말했고 나중에는 이러한 요청이 흐지부지되어 말이 없었습니다.

건축문제에서 어려움에 부딪친 것 외에도 불학원을 세우는데 있어서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망하게 하려면 그 사람에게 교육사업을 하게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당시 한편으로는 사찰 창건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를 따르는 청년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했기에 저는 불학원을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신도는 바로 저에게 “스님! 그러면 안 돼요. 학교를 세우면 밥도 먹지 못할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학인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정말 상황이 어려워지면 내가 장례식장에 가서 밤을 새워 염불을 해서라도 학인들에게 밥은 먹일 수 있을 테니 큰 어려움은 아니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불학원을 세우고 나니 좋은 강사들을 모셔다가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불광산이 위치한 곳이 외진 곳이어서 당시에는 교통이 아주 불편했습니다. “어찌 그런 곳에 좋은 강사를 모실 수 있겠느냐?”고 남들은 말렸지만 저는 믿지 않았고 저의 열정과 지극한 정성으로 좋은 강사들을 모시고자 하였습니다. 양국추(楊國樞), 위정통(韋政通), 진고응(陳鼓應), 이일장(李日章), 임정홍(林正弘), 방륜(方倫), 당일현(唐一玄), 왕회(王淮), 당역남(唐亦男) 등과 같은 대만대학교, 성공대학교, 중흥대학교, 심지어는 육군사관학교, 해군사관학교, 국방의과대학교 등에서 불교학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자, 언어학자 등등의 교수와 전문가를 초빙해 왔습니다.

생각지도 않게 나중에는 대만대학교의 엽아월(葉阿月)과 방동미(方東美) 선생이 “불광산은 공산당의 본거지다”라는 말로 저를 비평했습니다. 당시 계엄시대에 이러한 말은 매우 엄중한 비평으로, 불광산 전체 대중을 총살당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대륙의 거찬 스님에게 식사를 한 끼 대접하였다는 것으로, 타이난 개원사 주지 증광 스님이 총살당한 것과는 다르게 다행히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또한 저의 학생인 타이둥 해산사 수화 스님이 오태안 사건(1979년 당시 30년간 계속된 국민당 계엄령 하에서 일어난 첫 번째 정치시위, 역자 주)으로, 무기징역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가 결국 감옥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경우처럼 되지도 않았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는 한없이 자비한 모습을 보여야 하지만 불교 전체가 무고한 모함을 받을 경우 저는 금강신장의 성난 눈빛으로 물러서지 않고 그들과 투쟁할 것입니다. 어차피 빈승은 중국대륙의 전란 속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총탄이 빗발치는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시대의 바퀴는 계속해서 앞으로 굴러갔고 대만의 각 정당도 점차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불만세력들이 반대하는 대상이 국민당이었는데 국민당은 사전에 아무런 통지도 없었고 위임장 한 장 없이 신문보도를 통해 저를 당무고문, 평의회위원이라고 공표했습니다. 빈승은 정말 억울하게 얽혔고 그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나 자신이 국민당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불만세력들은 ‘불광산이 국민당 남부지역의 전초기지’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정부에 대항할 힘이 별로 없었지만 종교를 반대하고 약자를 대항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여겨서 일부 사람들은 불광산 산문을 가로막고 사중 대중들의 출입을 막았습니다. 저는 경찰서에 신고를 하였고 많은 경찰들이 왔지만 아무도 이 문제를 처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찰 입구를 가로막은 저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출입을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처리를 하지 않습니까?”

경찰들은 우리가 이렇게 항의를 해도 “그 사람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잖아요!”라며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행동이라니요? 우리보고 그 사람들과 밀고 당기면서 싸우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우리보고 무슨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까?”

저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파견 왔던 치안 요원들은 착한 사람은 무시하고 날뛰는 사람을 겁내는 부류들이라서 처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의 상급 책임자들이 수시로 불광산에 와서 산책과 운동을 하였고 심지어 최고 책임자인 경찰서장이 불광산 제자였지만 우리는 인맥으로 어려움을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대만의 현실상황은 경찰들이 일을 처리하기에 어려움이 있었기에 우리 역시 그들에게 강하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정문을 막고 있으니 우리는 별도의 방법으로 뒤쪽의 출입문으로 다녔습니다. 어쨌든 동서남북으로 불광산의 출입구는 넓으니 당신들이 이 산문을 막는다고 해도 얼마나 가겠습니까? 낮에 밥을 안 먹어도 저녁에 잠 잘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그 사람들이 소득없이 물러설 것이라고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92호 / 2017년 5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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