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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도적을 자식으로 오인하지 말라

기자명 정운 스님

만물은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

원문: 밖으로 대상경계에 쫓아가는 것을 삼가고 그 대상경계를 마음이라고 오인하지 말라. 이는 마치 도적을 자식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탐ㆍ진ㆍ치 3독이 있기 때문에 계ㆍ정ㆍ혜 3학이 시설된 것이다. 본래 번뇌가 없는데, 어디에 보리가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조사가 이렇게 말했다. “부처가 일체법을 설한 것은 일체의 마음[번뇌]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그대에게 번뇌가 없는데, 무슨 법이 별도로 필요하겠는가?” 본원청정불에게는 한 물건도 필요치 아니하다. 비유하자면 저 허공에다 무량한 보물로 장엄하려고 해도 영원히 꾸밀 수 없는 것과 같다. 불성이 허공과 같기 때문에 비록 무량한 공덕으로 장엄하려고 해도 마침내 장엄되지 않는다. 다만 본성을 미혹해 전도되어 보지 못할 뿐이다. 

감각기관, 대상 만나 생긴 의식
참된 마음으로 착각하면 안 돼
중생은 청정한 성품 이미 구족
굳이 배움도 수행도 필요 없어

심지법문이란 만법이 다 이 마음을 의지해 건립된 것을 말한다. 대상경계를 만나면 (마음이) 있고, 대상경계를 만나지 못하면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청정한 성품자리를 전도하여 대상경계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라.

해설: 원문에서 ‘대상경계에 쫓아가는 것을 삼가고, 그 대상경계를 마음이라고 오인하지 말라. 마치 도적을 자식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는 부분을 보자. 교학에서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 6근을 ‘6적(六賊)’이라고도 한다. 눈으로 좋은 것만 보려고 하고 귀로 좋은 소리만 탐착하며 혀로 맛있는 것만을 탐착하여 (수행과 거리가 먼) 번뇌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6적, 여섯 도둑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6근이 대상경계와 만나서 만들어진 의식을 참 마음이라고 굳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곧 대상과 만나서 형성된 경계의 마음[번뇌]를 청정한 마음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상의 삶에서도 이런 유사한 일이 많이 발생한다. 오해에서 빚어지는 참극인데, 단순히 눈으로 본 그 하나만으로 오해를 하고, 완전히 믿어 상대를 해하는 경우가 있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가운데 하나인 ‘오셀로(Othello)’를 보자. 주인공 오셀로는 아내가 갖고 있는 손수건을 보고, 아내가 자신의 부하와 부적절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점점 색안경으로 아내를 보다가 결국 아내를 죽인다. 이후 모든 진실이 밝혀지자 그도 결국 자살한다.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믿고 오해한 뒤에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격이다. 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듣는 것이 다가 아니다. 곧 진정한 견해, 삶을 바라보는 안목이 갖춰졌다면 이런 실수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유식에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말이 있다. 즉 같은 물이라도 천인(天人)은 보석으로 장식된 연못이라고 보고 인간은 단지 물로 보며 아귀는 피[血]로 보고 물고기는 자신이 사는 주처(住處)로 여긴다. 즉 동일한 대상일지라도 보는 자의 견해에 따라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곧 자신의 견해로 내린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여주는 실례이다. 

모든 중생이 부처와 다름없는 성품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굳이 설법할 필요가 없었다. 굳이 ‘도를 닦으라’고 할 필요도 없었고, 3학이나 8정도 등의 교리를 시설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중생이 번뇌를 일으켜 대상과 만난 경계를 마치 참 마음이라고 오인하기 때문에 계정혜 3학과 8정도를 언급하며, 수행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중생이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부처님은 굳이 어떤 법문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곧 중생이 참다운 성품을 모두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것도 갖다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곧 현실에서 당면한 탐욕과 그릇된 행동, 어리석은 중생이 있기 때문에 진리의 자료가 탄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초기불교 학자는 “부처님은 괴로움이라는 부정성, 즉 ‘나쁜 것’을 교리와 실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라고 했는데, 대승선에서는 원래 청정한 바탕인데,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릇된 성품을 대치시키기 위해 방편으로 법을 설한 측면으로 본다. 원문에서 ‘심지법문이란 만법이 다 이 마음을 의지해 건립된 것을 말한다’고 한 것도 곧 이 세상 모든 만물이 자신의 마음이 만든 허상이므로 청정 본원 자리에 입각할 것이요, 허상의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392호 / 2017년 5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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