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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돌봄이 필요한 이유

8월 시행을 앞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으로 호칭)의 시행령·시행규칙에서 호스피스 전문기관의 인력 기준에 영적 돌봄 전문가가 빠져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현재 입법예고된 하위 법령의 인력 기준엔 의사·간호사·사회복지사만 두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극규 모현호스피스 원장은 2017년 4월21일 ‘호스피스·연명의료법 시행규칙에서 자원봉사자와 영적 돌봄의 중요성 제고를 위한 대토론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모현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는 환자의 95% 이상이 통증 때문에 입원하지만, 이게 완화되고 나면 모든 환자가 비육체적 고통을 겪는다. 이는 의료 처치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정 원장은 미국 오리건주 통계도 제시했다. 오리건주가 존엄사법에 따라 의사조력자살(의사가 처방한 극약을 먹고 죽음을 선택)을 하려는 환자 991명(1998~2015년)에게 가장 큰 고통이 뭔지 조사(복수 응답)했더니 ‘독자적 의사 결정력 상실’이 903명(91.6%)으로 가장 컸다. 다음은 ‘일상생활이 지루하고 재미없다’(885명), ‘존엄성 상실’(677명) 순이었다.  의료 처지와 관련되는 통증은 248명, 치료비 부담은 30명에 불과했다. 의사조력자살을 하려는 환자에게 필요한 의료적 조치는 이미 시행됐고, 경제와 관련된 문제 역시 이미 정리돼 고통이 별로 크지 않았다.  대신 존엄성 상실이나 독자적인 의사 결정력 상실 같은 문제로 인한 고통이 훨씬 심각했다. 그래서 정 원장은 “영적 돌봄이 없으면 호스피스 기본 이념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건강을 4가지 측면에서 제시한다. 육체적, 사회적, 정신적, 영적인 측면. 세계보건기구 규정에 따르면 호스피스 돌봄도 신체적, 사회적, 정신적, 영적인 전인적 돌봄을 특징으로 한다. 영적 돌봄은 말기 및 임종 과정 환자에게 죽음의 불안을 극복하고 편안하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한다. ‘연명의료결정법’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호스피스·완화의료란 말기환자 또는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말기환자)와 그 가족에게 통증과 증상의 완화 등을 포함한 신체적, 심리사회적, 영적 영역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와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의료를 말한다.” 그러나 ‘연명의료결정법’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말하고는 있지만, ‘죽음의 존엄과 정의, 죽음에 대한 전인적·포괄적 접근’은 말하고 있지 않다.

호스피스에서 신체적, 심리사회적, 영적 영역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와 치료를 목적으로 한다고 했으면서, 죽음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연명의료결정법’을 준비하면서 우리 사회는 의학적 죽음, 법률적 죽음, 다시 말해 육체의 죽음과 연명의료결정 문제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러니 시행령·시행규칙에도 호스피스 전문기관의 인력 기준에 자연히 영적 돌봄 전문가가 빠지게 된 것이다.

시행령·시행규칙에 호스피스 전문기관의 인력 기준에 영적 돌봄 전문가가 빠진 것만 문제가 아니다. ‘연명의료결정법’에 죽음에 대한 총체적, 전인적 접근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은 게 문제의 핵심이다. 우리 사회는 죽음을 의학적, 법률적 논의에만 집중해 육체의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이런 현대적 상황에 대해 현대 생사학의 창시자, 퀴블러로스는 이미 오래 전 “현대 사회에는 죽음 정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했다.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죽음을 육체의 측면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는가. ‘연명의료결정법’을 준비하면서 연명의료 중단 문제, 의학적, 법률적 논의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는가. 인간의 죽음을 의학적 치료와 법률적 문제로만 보았으므로, 영적 돌봄은 도외시하게 된 것이다. 육체의 죽음으로만 보면 영적으로 보살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인간의 존재와 죽음을 육체적, 사회적, 정신적, 영적 측면에서 총체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때, 영적 돌봄은 별 의미가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오진탁 한림대 철학과 교수 jtoh@hallym.ac.kr

[1394호 / 2017년 6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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