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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빈승이 정한 새로운 계율 ①

“첫째로 아침밥을 잘 먹고 상대를 긍정의 표정으로 받드세요”

▲ 불광산의 거리 탁발행각을 알리는 의식. 대만 불광산 제공

"아침밥을 잘 먹지 않는 사람의 생활에는 규율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아침밥을 먹어야할 뿐만 아니라 정해진 식사 시간을 꼭 지켜야 합니다. 이러한 좋은 습관을 기르면 규칙적으로 생활할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을 긍정의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두가 모든 계율을 지킬 수 있어서 남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고 포용할 수 있다면 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이며 세상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교단을 세우시고 많은 계율 항목을 제정하시면서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와 심지어 재가 남녀인 우바새, 우바이와 식차마니 등 칠부 대중들에게는 각각의 계율이 마련됐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회적 환경과 물질조건, 문화배경, 지리적 기후와 풍토 등이 수많은 계율항목의 제정과 모두 연관되어 있습니다.

21세기 오늘날에 불교는 이미 세계적인 종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세계 각 지역이 풍토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지리적인 기후와 생활방식 및 관념과 생각이 각각 다릅니다. 제정하신 계율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개차법(開遮法)’을 말씀하셨던 것처럼 계율규정의 내용이 변할 수 없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다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계율을 제정하신 것은 당시의 인연법에 따른 것입니다. 시간이 흐른 뒤 고집스런 제자들은 “부처님께서 제정한 계율을 바꾸면 안 된다. 부처님께서 정하지 않은 계율은 늘리면 안된다”라고 강조합니다. 이런 주장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상의 진리에 부합된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불법에서는 세간이 무상하여 고정불변의 법이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상의 법칙에 따라서 변화하지 않는다면 불교는 발전할 수 없고 지금의 세계적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다(偏袒右肩)”라고 하는데, 가령 하얼빈이나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 불제자들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살아야 한다면 어깨가 얼어버리지 않을까요? 사미계에 “금은 보물에 손을 대지 말라”고 하였는데 만약 장학금이 없거나 차비가 없다면 어찌 운수행각 공부하면서 구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당초에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사미계는 설사 오늘날의 노장 비구라고 하더라도 지켜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당시 인도의 열대기후에서 ‘하루 한 끼, 나무아래 하룻밤(日中一食 樹下一宿)의 생활’이란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겠으나 만약 환경이 다른 지역이라면 ‘하루 한 끼, 나무아래 하룻밤의 생활’이 어찌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불교계에서 계율을 전하는 많은 강사 스님들이 자신들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계율항목이지만 어느 누구도 바꾸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위선적이고 허상이며 현실적이지 못한데 불교가 어찌 시대와 함께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면서 계율이 없다면 승단을 이룰 수 없기에 옛 조사대덕들께서는 일상의 생활에서 계율항목이 중요함을 깨달으셨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계율조항에 맞추어야 한다면 불교가 인간 세상의 사회 여러 면에서 발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장 스님께서 청규를 세우신 것처럼 중국의 조사 스님들께서는 매우 총명하시어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규칙을 무너뜨리지 않고 청규로서 계율을 대신하도록 하였습니다. 총림의 청규에 의지하여 불교는 1000년이 넘도록 불교교단의 지혜생명을 이어 내려오면서 승단을 안주시키고 불교의 찬란한 빛을 발하도록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불교는 사찰에서 뿐만 아니라 불교가정 외에도 학교와 기관, 사회, 국가에서도 인간불교의 실천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광산 창건 초기에 “어떻게 불광인이 될 것인가”라는 주제로 18차례의 강의를 하면서 불광산 교단을 위해 ‘제자 지침서’를 만들었는데 불광산의 법을 이어받은 제자들이 어떻게 생활에서 운용하는가를 보충 설명하고자 합니다.

빈승은 어려서부터 불가에서 자라면서 엄격한 수행과정을 거쳤지만 제 자신이 겪었던 합리적이지 못한 교육을 남들에게 적용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음 교단을 세우면서 가진 이상이 ‘다스리지 않는 것 같은 다스림(無爲而治)’만을 바랐습니다. 교육이라 함은 남으로부터 야단을 맞는 가르침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스스로 배워나가야 합니다. 유교에서 “배운 것을 수시로 익힌다(學而時習之)”라고 하는 것처럼 스스로 배워나가야 마음에 느끼는 것이 있고 발전하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교육에 대해서 한걸음 더 앞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교육에 대한 절차에서 먼저 스스로 깨달아야 하고 다시 남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는 깨달음이어야 원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깨닫는다고 함은 배움의 초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만약 자신 스스로 깨달아 알아차리고 스스로 각성하지 못한다면 가르치는 사람이 아무리 간곡히 일러주어도 듣는 사람이 가볍게 여기게 되니 더없이 좋은 가르침의 말씀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육에서 가장 먼저 모두들 부처님의 ‘스스로 깨닫는 교육(自覺敎育)’을 따라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 근기가 다르다보니 누구나 다 지혜와 선근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옆에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거나 교칙규범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수십 년의 출가생활에서 빈승은 저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것을 남에게 가르치고자 하였습니다. 제가 인생을 살펴보니 “불법은 세간에 있으며 세간을 떠난 깨달음은 없다(佛法在世間 不離世間覺)”라는 혜능 대사의 말씀처럼 세간에 대한 자아의 깨달음과 자아실천이 있어야 남의 규범이 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수십 년 이래로 세계 여러 곳에서 홍법 교화하며 지내다 보니 빈승은 아쉽게도 한 곳에서 머무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의식주행(衣食住行)과 행주좌와(行住坐臥)에서 비록 자신이 나름의 원칙을 정하고 있지만 남들에게 저의 방식대로 하라고 요구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점점 나이가 많아지다 보니 빈승은 너무 엄격한 조항으로 사람들이 지킬 수 없게 하느니 그런 규범을 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완전히 편하게 마음대로 생활한다면 그 역시 출가 수행자에게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빈승이 할 말이 있습니다’라는 글을 통해 저 자신의 수행적인 계행과 남들과의 관계에서 준수해야 하는 법칙, 심지어 불광 제자교육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계율조항으로 간단한 생활규칙을 제정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여기에서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계율조항은 매우 많아서 이런 조목, 저런 조목 모두 다 규정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마음속에 원칙을 갖고 남을 침범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행해야 하고 행하지 않아야 하는 열 가지 표준으로 제가 제정한 ‘불광 새 계율 조목(佛光新戒條)’입니다. 사회대중과 불가제자들 모두가 준수하면서 수행과 사람됨의 원칙으로 삼는다면 인간관계에서 다툼이 줄어들 것이며 의식주행 생활에서 만족하게 되며 대중과의 교류에서 평화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행해야 하는 열 가지와 행하지 않아야 하는 열 가지’를 모두가 지켜낼 수 있다면 성불하거나 성현이 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진실한 수행자의 모습은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겠습니다.

그 첫째는 ‘정상적으로 아침밥을 먹는다’ 입니다.

불교 계율에 규정한 ‘오후불식’은 옛날에는 저녁에 일하지 않아서, 날이 어두워지면 전기불도 없으니 아주 일찍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저녁에 먹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일부 열심히 수행하고 홍법포교에 애쓰는 사람들은 경전도 보아야 하고 강의도 하고 책도 쓰고 연구도 하면서 대중을 위해서 봉사하느라 저녁 늦게까지 등불을 밝히고 바쁘게 지내는데 어찌 저녁을 먹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위장에 필히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저는 오늘날 이 사회에서 ‘오후불식’은 그리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당뇨병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오후불식을 할 수 있을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아주 중요한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상적으로 아침밥을 먹는 것’입니다. 아침밥을 먹으면서 하루 일과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인 가운데는 아침식사는 거르고 저녁은 많이 먹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왜 아침밥을 먹지 않는 것일까요? 일찍 일어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더라도 밤늦게 잠에 들었기 때문에 어제 먹은 음식이 아직 소화기관에 남아있어서 아침에 배고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침밥을 잘 먹지 않는 사람의 생활에는 규율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아침밥을 먹어야할 뿐만 아니라 정해진 식사 시간을 꼭 지켜야 합니다. 이러한 좋은 습관을 기르면 규칙적으로 생활할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을 긍정의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표정이 있는 호응을 한다’ 입니다.

발심하여 수행하는 사람은 먼저 단체생활을 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대중 속에 있다’고 부처님은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입문한 사람이 대중을 떠나서는 승단에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대중(衆)이라고 함은 한자로 볼 때 ‘세 사람이 대중을 이룬다(三人成?-?)’는 것입니다. 수행하고 싶은 어느 한 사람의 마음에는 무문관도 하고 싶고 조용히 은거를 하고 싶기도 하겠지만 대중과 함께 하지 않고 대중 속에서 교양을 배우지 못한다면 ‘한 그루의 나무는 숲을 이루지 못한다’라는 가르침과 같이 성취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불도를 공부하려는 입문자는 대중 속에서 단련하며 배우는 과정에서 예의를 갖추고 표정이 있어야 하며 남을 공경해야 남들에게 당신이 받아들여지게 되고 대중 속에서 당신 역시 안주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의 세상은 온갖 색깔이 어우러지고 소리가 퍼져나가는 사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동정일여(動靜一如)의 생활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돌덩이도 아니고 나뭇조각도 아닌데 어찌 표정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돌덩이나 나무토막이라도 돈황석굴의 그 수많은 벽화들에서 보듯이 조성된 불보살상에도 자상함과 미소와 자연스러운 자태의 장엄함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출가자인 당신에게 아무런 표정이 없다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적절한 표정으로 반응하고 알맞은 응대예절을 배워야 합니다.
셋째는 ‘후학을 끌어줄 수 있어야 한다’ 입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자신이 성취하였다고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후학을 키워서 성공시킬 수 있어야 진정으로 위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는 따르며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많고 많은 대보살과 대아라한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흔히 1250명의 제자라고 하고 심지어 십대제자까지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능력에 맞도록 그 자신들의 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하게 하셨습니다. 중국 역대 각 종파의 조사 스님들을 다시 살펴보더라도 후학을 발탁하였던 종파는 크게 발전하였고 후학을 등용하지 않은 곳은 구름이 흩어지듯 점차 기세가 꺾였습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처럼 아랫세대가 앞 세대를 넘어서게 해야 합니다. 아랫세대로 내려갈수록 못하게 된다면 필히 그 가르침을 이을 수 없게 됩니다. 만약 우리 사회에 천리마는 항상 있지만 백락이 별로 없다면 이는 매우 안타깝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불교계의 상황을 보면 어른이 자리를 잘 물려주려고 하지 않거나 한 번 자리에 오르면 평생을 가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94호 / 2017년 6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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