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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만법귀일 일귀하처-하

조건 따라 변하는 개체 하나가 만법 귀착점

▲ ‘뜰 앞의 잣나무’고윤숙 화가

어떤 스님이 고덕 귀종(古德 歸宗)에게 물었다.

천지와 만물의 보편성에만 머물면
눈앞에 핀 꽃을 제대로 볼 수 없어
특정한 조건 속 개체의 특이성이
만법이 돌아가야 할 바로 그 하나

“깊은 산 가파른 벼랑처럼 전혀 사람의 자취가 없는 곳에도 불법이 있습니까?”
“있지!”
“어떤 것이 깊은 산속의 불법입니까?”
“돌멩이가 큰 것은 크고 작은 것은 작지.”

깊은 산 속의 불법, 그것은 사람이 있든 없든 작용할 불법의 요체를 묻는 것이다. 돌멩이가 큰 것은 크고 작은 것은 작다는 말은 어디서나 적용될, 어쩌면 하나마나한 말이다.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깊은 산 속이라고 무슨 심오한 불법이 따로 있을 리 없고, 불법이라고 특별한 것이 따로 있을 리 없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자연스런 이치, 그것이 불법이란 말이다. 물론 반드시 ‘자연스런’ 것만 불법이라 할 순 없다. 겨울인데도 뜻밖에 오이가 열렸다면, 더구나 그 오이가 놀랍게도 아주 크다면, 흔치 않은 일이고 특이하고 놀라운 일이지만 그 또한 자연의 이치에 따른 것이며, 그렇게 오이가 열리게 만든 연기적 조건의 결과다. 그럴 만한 조건이 있었기에 그리 된 것이다. 어떤 스님의 물음에 대한 목평(木平)의 대답이 그러하다.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겨울 오이가 이토록 크구나!”

불법의 요체를 묻는 것은 이처럼 자연의 이법을 묻는 것이다. 수많은 현상이나 사태들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법칙, 그것이 곧 자연의 이법이고 그것이 곧 불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 물리학의 어떤 법칙이나 생물학의 어떤 법칙을 들어 답한다면 그 또한 옳다 할 수 있을까? 간단히 답할 순 없지만, 일단 그렇다고 하자. 허나 그렇다면 이는 근대과학처럼 세상사를 하나의 법칙이나 원리로 환원하거나 통합하려는 저 형이상학적 태도를 반복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모든 것을 오직 하나의 법칙으로 통합하려는 태도가 형이상학적인 것이지, 주어진 조건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법칙들을 찾는 게 그런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보편적인 것을 향해 올라가려는 태도다.

만법을 포괄하는 ‘하나’의 법칙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매우 적다. 유전자에 대한 보편적 지식이 개체마다 조건에 따라 다르게 발생하는 과정을 알려주진 못한다. 보편적인 것일수록 구체적인 것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아주 적거나 하나마나한 얘기이기 마련이다. 가령 사람에게 눈이 둘이라는 것은 분명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성을 갖지만, 그게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가? 그런 ‘하나’를 붙들고 있으면 정작 중요한 걸 보지 못하게 된다.

남전이 육긍대부(陸亘大夫)에게 했다는 말을 나는 이런 뜻으로 이해한다. 육긍대부는 평소에 세상의 이치와 본성에 대한 관심이 깊었는데, 승조(僧肇)의 ‘조론(肇論)’을 깊이 연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남전과 대화를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조법사(승조)는 ‘천지가 나와 한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 하였는데, 매우 놀라운 말인 듯합니다.”

이에 남전은 뜨락에 핀 꽃을 가리키며 “대부”하고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이 한 포기 꽃을 마치 꿈결 속에서 보듯 한다네.”

이를 두고 많은 이들이 몸으로 체험하지 않은 채 그저 교학에 매인 육긍대부를 남전이 비판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천지와 나, 만물과 나가 하나라는 보편적인 이야기와 ‘지금 여기’ 피어 있는 ‘이 한 포기 꽃’간의 간극이 작지 않음을 지적하는 말일 것이다. ‘천지’와 ‘만물’에 대한 그 거창한 이론에 머물러 있는 한, 눈앞에 있는 ‘이 한 포기 꽃’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된다는 말을 하려고 ‘꿈결에 보듯 한다’했을 것이다. 정작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왜 난데없이 이리 더운 것인지, 필 때가 아닌데도 오늘 아침 저 꽃이 핀 이유는 무엇인지 하는 것이다. 남전이 뜨락에 핀 꽃을 직접 가리키며 말한 것도 그렇고, ‘지금 여기’ 있는 것의 ‘이러함(thisness)’을 표현하는 ‘이 한 포기 꽃’이라 한 말도 그러한데, 천지와 나가 하나라는 멋지고 거창한 이론으로 인해, 꽃이 피고 지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과정을 놓치는 일이 흔함을 지적하려는 말이었을 게다.

‘보편성과 개체성의 통일’을 본다고들 하지만, 보편성의 사례로 개체를 보는 것과 개체성을 이해하기 위해 보편성을 이용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만법이 귀착되는 ‘하나’든 아니면 ‘불법’이든 개별적인 경우에 머물지 않는 어떤 ‘보편적인 것’을 함축하기 마련이지만, 그런 ‘법’을 말할 때에도 그저 보편적인 법칙에 시선이 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 한 포기의 꽃’같이 그때마다의 개체적 특이성(‘이러함’)에 시선이 가 있는 것인지는 아주 다르다. 조주의 유명한 다음 이야기를 나는 이런 의미에서 읽었다.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스님께서는 경계를 가지고 설명하지 마십시오.”
“노승은 경계를 가지고 설명한 적이 없다.”

이 말에 저 스님은 다시 물음을 반복하지만 조주의 대답은 똑같다. “뜰 앞의 잣나무!”

조사, 즉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묻는 것은 그가 전하고자 했던 불법의 요체가 무엇이냐 묻는 것이다. 그에 대해 조주는 엉뚱하게도 “뜰 앞의 잣나무”라 대답한다. 불법을 물었는데 ‘뜰 앞의 잣나무’라는 말을 들은 학인은 경계, 즉 어떤 대상 하나를 드는 식의 답을 구한 게 아니라고 항변한다. 이에 대해 조주는 경계를 들어, 즉 어떤 대상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게 아니라고 답한다. 잣나무는 대상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나 조주가 ‘뜰 앞의 잣나무’를 들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 말이 지칭하는 어떤 사물이 아니라, 저기 뜰 앞에 있는 잣나무를 관통하고 있는 불법이다. 저기 뜰 앞에 잣나무를 피워내고 키워낸 자연의 이법. 그러나 저 ‘뜰 앞의 잣나무’를 예로 들어 불법을 설명하려는 건 아니다. ‘경계를 가지고 설명한 적이 없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보편법칙을 위해 잣나무 얘기를 한 게 아니라, 저기 저렇게 있는 잣나무란 개체와, 그 개체의 특이성을 구성하는 데 참여한 한에서의 ‘법칙’을, 저 나무를 저렇게 만든 조건 속에서의 법칙을 얘기한 것이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에 머문다면, 우리는 보편법칙을 얻을 뿐이다. 그것은 보편적이기에 어디에나 적용된다 하겠지만 어느 ‘이것’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걸 알기에 처음에 조주에게 물은 학인도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고 물었던 것일 게다. 그에 대한 조주의 답은 “내가 청주에 있었을 때 무명적삼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근이었다네”라는 것이었다. 지금 아닌 청주에 있었을 때, 그가 만들었던 무명적삼의 무게, 이 또한 바로 이처럼 특정 조건 속에서 개체적 특이성을, 그때 그 무명적삼의 ‘이러함(thisness)’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터이다. 만법이 귀착되는 ‘하나’, 그것은 이처럼 각각의 조건 속에서 그때마다 달라지는 개체의 ‘이러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답이라 하겠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95호 / 2017년 6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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