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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현재 생사 일어나는 그 자리가 원각도량

기자명 정운 스님

중생이 곧 불성이며 불성이 곧 중생

원문: 10월8일 선사가 배휴에게 말씀하셨다. 화성이란 이승 및 십지ㆍ등각ㆍ묘각을 말한다. 모두 방편인데, (중생을)이끌기 위한 가르침으로 화성이라고 한다. 또한 보배가 있는 곳이란 진심의 본래 부처인 자성의 보배를 말한다. 이 보배는 사량분별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설정될 수도 없고, 부처와 중생이라는 것도 없으며, 주관과 객관도 없다. 그런데 어느 곳에 성(城)이 있겠는가? 만약 ‘이곳이 이미 화성이냐?’고 묻는다면 어느 곳이 보배 있는 곳이라고 하겠는가? 보배 있는 곳이 어디라고 지적할 수 없다. 혹 어디라고 지적한 장소가 있다면 이는 참된 보배 있는 곳이 아니다. ‘법화경’에서도 가까이 있다고만 했을 뿐 일정한 장소를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당체에 계합하는 그곳이 바로 이곳[진실함]이다. 천제란 신근(信根)을 구족하지 못한 자를 말한다. 일체 육도중생 및 이승은 불과를 믿지 않으니 이들은 선근이 끊어진 천제라고 할 수 있다. 보살은 불법을 깊이 믿고 대승과 소승을 구별하지 않으며 ‘부처와 중생이 동일한 법성을 갖고 있다’는 견해를 가진 이들이다. 이를 일러서 선근이 있는 천제라고 한다.

법화경에 거론된 화성은 방편
포기할까봐 성문·연각 설해
일천제란 선근이 없는 중생
선법을 갖추면 성불은 가능

해설: 원문에서 화성을 언급하고 있다. 화성은 ‘법화경 화성유품’에 언급된 내용이다. 경에서는 비구들이 소승법을 좋아하고, 5욕락에 빠지기 때문에 이들을 경각시키기 위해 화성으로 방편을 들어 비유한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들은 거짓으로 설한 열반을 진짜 열반으로 믿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경에서 비유를 들었는데 길라잡이가 사람들에게 오백 유순쯤 되는 지점에 진귀한 보물이 있으니 험난한 길을 지나 보물을 구하러 가자고 한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잘 따라가다가 중간에 지쳐서 포기하려고 하자 길라잡이가 삼백 유순쯤 되는 곳에 환상의 성을 지어 놓고 사람들에게 ‘잠깐 쉬어 가자’고 한다. 사람들이 성에 들어가 편안히 쉬었을 무렵 길라잡이는 ‘이곳은 화성이고 조금만 더 가면 진짜 목적지가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길라잡이는 여래를 말하고, 사람들은 중생, 화성이란 방편에 비유를 든 것이다. 중생들이 일불승을 들으면, 쉽게 포기할까 염려되어 방편[성문ㆍ연각]을 설하였다.

‘법화경’에서도 단순히 5백 유순이라는 곳에 보배가 있다고 했을 뿐 정확한 장소를 언급하지 않는다. 어록 원문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보배가 어디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실은 ‘어느 곳’ ‘어디’라는 장소는 있을 수 없다. 바로 자신에게 내재된 당체에 계합하는 그곳이 바로 깨달음의 당처요, 보배가 있는 곳이다. ‘열반경’에서는 “만약 중생의 신체 중에 불성이 특별히 어디에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중생이 곧 불성이고, 불성이 곧 중생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깨달음의 근원인 불성이 사람의 신체, 어디에 있다고 할 수 없거늘 어찌 공간적인 이동을 통해서 일불승을 찾을 수 있겠는가. 

해인사 팔만대장경 당우 주련에 “원각도량이 어디인가? 현재 생사가 일어나는 바로 그곳이다[圓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是]”라는 내용이 있다. 바로 현재 번뇌로 살아가는 자신이 열반의 자리요, 깨달음의 당처이다. 멀리 있다고 길을 찾아나서는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또 고개를 돌리는 그 자리가 바로 피안[回頭是岸]이라고 하였다. 자신이 서 있는 그곳에서 고개를 돌리면 바로 그곳이 열반 언덕인 것이다.   

원문에서 ‘천제란 신근(信根)을 구족하지 못한 자’라고 하는 부분을 보자. 천제란 일천제(一闡提)를 말한다. 일천(icchant)은 믿음ㆍ방편ㆍ정진ㆍ생각ㆍ선정ㆍ무상한ㆍ지혜의 의미를 함축하고, 제(ika)는 믿음을 갖추지 못했거나 좋은 방편을 갖추지 못한 것, 정진을 갖추지 못한 것 등등으로 번역된다. 일천제에 대해 ‘열반경’에 자세히 설하고 있다. 그런데 ‘열반경’에서는 아무리 악한 성품을 가진 자라고 할지라도 현재 선법(善法)이 없을 뿐이지 앞으로 성불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한다. 

황벽선사는 천제에 대해 보살로서 대승법을 갖추지 못한 자를 일천제라고 하며 범위를 넓혀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뛰어난 천제란 ‘부처와 중생은 마음자리에 있어 동일한 성품을 갖고 있으며, 중생도 청정한 본성 차원에서는 곧 부처라고 자각하는 자’라고 강조하고 있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395호 / 2017년 6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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