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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최고의 유산은 지혜

열반 가는 길 일러주는 게 가장 위대한 보시

부자집 자식들이 망하는 경우가 많다. 수십 년 전에 7공자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해진 적이 있다. 동명목재 아들 등 재벌 2세들이 벌인 마약 음주 엽색 사건이었다. 재산은 물려줄 수 있지만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다음 생으로 가져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영계 간 송금업무를 담당하는 은행이 없다. 평생 지속되기도 힘들다. 하지만 삶의 지혜는 영원히 지속된다.

물질 보시 복덕 분명하지만
크기가 유한한 공덕임일 뿐
무한히 이어지는 윤회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지혜

그래서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운 금은보석으로 남을 도와주더라도 그 사람에게 지혜를 선사하는 것보다는 못하다. 비록 그 복이 크다 해도 지혜보다야 못하다. 물질이 주는 기쁨보다는 물질로부터의 해방이 주는 기쁨이 양에서나 질에서나 훨씬 더 크고 더 낫다. 물질은 언젠가 문자 그대로 먼지가 되지만 지혜는 영원하다. 무한한 윤회의 세계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지혜이다. 물질은 해변의 모래성처럼, 언젠가 시간을 타고 밀려오는 무상(無常)에 쓸려 사라진다.

물질적인 보시가 주는 복덕은 분명히 복덕이지만 크기가 유한한 복덕이다. 열반으로 인도하는 크기가 무한한, 지혜의 보시에 비하면 복덕이라고 할 수 없다.

세계역사는 생생히 증언한다. 권력자의 고뇌와 비참한 운명을. 제왕이라도 언제 칼날이 자기 머리 위로 떨어질지 몰라 두려움에 떨며 산다. 수많은 처첩과 자식을 거느리며 살지만 언제 반란이 일어나거나 타국의 침입을 받아 도륙이 날지 모른다. 원수는 그대의 목을 자르고 심장에 창을 꽂으며 그대 처첩과 자식의 비명소리를 음악처럼 즐긴다. 자식도 안심할 수 없다. 아무리 부처님을 섬겨도, 마음이 번뇌로부터 자유를 얻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간 부처님께 한 보시도 아무 소용이 없다. 대국 마가다의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이 성도하기 전에는 나라의 반을 떼어줄 터이니 같이 다스리자 제안하였고, 성도 후에는 부처님께 죽림정사를 지어 바치며 지극정성으로 섬겼지만, 반란을 일으킨 아들 아자타사투에게 제위를 빼앗기고 탑에 유폐되어 굶어죽었다. 코살라국의 왕 파세나디 왕도 아들 비유리가 일으킨 반란으로 왕위를 잃고 나라 밖을 떠돌다 굶어죽었다. 동양에서 불심천자 양무제는 50년 동안 제위에 있으면서 수천의 절을 짓고 승단에 천문학적인 보시를 했건만, 후경의 난을 당해 유폐되어 왕위를 빼앗기고 굶어죽었다. 아무리 보시를 많이 해도 소용이 없다. 타인의 욕망은 그대를 노린다. 그대가 아무리 착해도 소용이 없다. 아무리 힘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타인에게 그대의 착함은 나약함의 증거이고 그대의 힘은 탈취대상이다. 이런 일을 피해도 끝은 허망하다. 징기스칸은 화살에 맞아 죽었고, 알렉산더는 학질에 걸려 죽었다. 중세 유럽왕가는 유전적 환경적 광기로 시달렸고, 이집트 프톨레미 왕가는 오랜 근친결혼으로 인한 유전병이 만연했다. 

부처님을 배출해도 소용이 없다. 석가족은 대국인 코살라국 비유리의 침입을 당해 멸망했다. 석가족이 흘린 피가 강을 이루었다. 열반 이외에는 시간의 거친 흐름 속에서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겪지 않을 수 없다. 눈물과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부처님이 왕세자의 신분을 버린 것도 그래서였다. 아마 세속에 남았으면 그 성품상 자비로운 왕은 되었겠지만 차마 남의 나라를 정복하지 못해, 카필라국은 대국으로 크지 못하고 소국으로 남아, 여전히 대국 코살라국에 정벌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잊혔을 것이다. 가엾은 사슴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황금빛 사슴왕처럼. 한동안 소국의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보다는, 우주가 유지되는 한 영원히, 무한한 사람들에게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인 열반으로 가는 길을 보시하는 게 더 낫다. 이것은 분명히 다른 모든 보시보다 더 나으며, 이 앞에서는 그 어떤 보시도 감히 보시라고 주장할 수 없다.

이런 위대한 지혜를 설한 경전이 ‘금강경’이고, 여기에 모든 성인의 출세간 지혜가 담겨있다. 모든 생명체를 고통으로부터의 궁극적인 해방으로 인도하는 길이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법상(法相)에 사로잡히면 이 길은 막힌다. 일체가 무아(無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은 법이 아니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395호 / 2017년 6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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