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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 채문기의 길따라 절에 들다
57. 제주도 성지순례 ③ 불탑사-불사리탑사-연북정허응 보우·기황후 삶의 질곡 배인 산사에 서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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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6.19  14: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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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은 돌담 너머로 ‘불탑사 오층석탑’이 보인다. 한 도량에 현재의 불탑사와 과거의 원당사가 공존하고 있다.

제주시 삼양동에 서 있는 원당봉(170m)은 주봉인 원당악과 망오름, 도산오름, 동나부기, 서나부기, 앞오름, 펜안오름 등 7개의 봉우리와 3개의 능선이 이어져 있는 삼첩칠봉(三疊七峰)의 제주 명산이다. 이 오름 중턱에 중국 원(元)나라의 당(堂)인 원당(元堂)이 있었다고 하여 원당봉(元堂峯)이라 이름 했다고 한다.
 
원나라 공출돼 끌려간 여인
재색·정치력 발휘해 황후로
오빠 국정농단 연루 오점 남겨

훼불사태 만연했던 조선중기
불교중흥 횃불 든 허응 보우
제주목사 변협에 타살돼 순교


저 원당은 이 땅에 원 나라의 힘이 막강하게 미칠 때 들어섰을 터. 그렇다면 원의 연호를 사용해야만 했던 고려의 원나라 복속기(1270∼1356), 적어도 제주도를 기반으로 대몽항쟁을 펼쳤던 삼별초군이 원나라 군대와 고려 정부군에 의해 토벌 당한 이후(1273) 원당이 지어졌을 터다.

산 아래 작은 마을, 높이 1m가 좀 넘을 법한 낮은 돌담 너머로 오후 햇살을 가득 안은 탑 하나 보인다. 제주도에서 발견된 탑 중 고려시대 유일의 석탑으로 평가받고 있는 보물(1187호) ‘불탑사 5층석탑’이다. 불탑사의 고려 때 이름은 원당사였다. 고려의 여인이요, 원나라 순제 황후였던 기황후 삶의 질곡이 저 탑에 담겨 있다.

   
▲ 불사리탑사가 품고 있는 5층석탑은 제주도의 유일한 고려 석탑이다.

고려의 선종이 몽고군에 항복(1270)한 뒤 원나라는 공물과 함께 벼슬 집안의 동남동녀를 요구했다. 요구는 관례로 이어졌다. 목은 이색의 아버지, ‘죽부인전’ 저자 이곡(李穀)은 ‘동녀 차출 금지’를 청하는 상소문 ‘대언관청파취동녀서(代言官請罷取童女書)’를 중국 황제에게 올린 바 있는데 고려의 참상을 이렇게 전했다.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새어나갈 것을 걱정하여 비밀에 붙여 이웃도 알지 못합니다. 중국 사신들이 올 때마다 얼굴빛이 변해서는 서로를 보며 수군댑니다. 동녀를 잡으러 왔는가? 아내와 첩도 잡아가는 건 아닐까? 중국 사신이 당도하면 곧바로 군인들이 집집마다 여자를 찾아다닙니다. 숨기면 이웃과 친족을 잡아 매질하여 반드시 찾아냅니다. 선발되면 부모와 친척이 통곡하기에 밤낮으로 곡성이 끊이지 않습니다. 국경 밖으로 갈 때는 서로 옷자락을 부여잡고, 땅에 엎어지기도 하고, 길을 막고 울부짖습니다. 비통하고 분개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이도 있고 피눈물을 흘려 눈이 먼 사람도 있습니다.’

절에 숨어 있던 익주(익산)의 열다섯 살 기순녀도 공납 여자 징발을 담당했던 과부처녀추고별감에 발각돼 원나라로 떠나는 배(1331)에 올라야 했다. 아버지 기자오는 통곡했고, 어머니는 실신했다. 그의 오빠 기철, 기원 역시 밀려오는 분통에 땅을 쳤을 터다.

   
▲ ‘제주 돌 문화공원’에 서 있는 ‘불탑사 5층석탑’ 복제품. 제주박물관 정원에도 불탑사 5층석탑 복제품이 자리하고 있다.

기순녀는 재색을 겸비한 여인으로 대담하면서도 영특했다. 원나라의 왕 순제(順帝, 재위 1333~68년)의 다과 시봉을 드는 궁녀로 발탁된 후 최고 권력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남다른 정치력을 발휘해 제2황후 자리에까지 오른다. 기황후에게 한 스님이 ‘북두칠성의 명맥이 비치는 삼첩칠봉에 탑을 세운 후 기도 올리면 아들을 얻을 것’이라 귀띔 한다. 삼첩칠봉! 바로 여기다.

기순녀가 항후에 오르기 전 원당이 들어섰다고 보면, 삼첩칠봉 정보는 고려와 원나라를 오고 간 사람들로부터 입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기황후가 보낸 사신이 직접 확인하고는 절을 짓고 탑을 세웠다. 그 절이 현 불탑사의 옛 절 원당사(元堂寺)요 ‘원당사 오층석탑’이다.

가피가 있었던 듯 기황후는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았다. 훗날 원나라 12대 황제에 오른 소종(昭宗)이다. 1365년 제1황후가 세상을 뜬 뒤 기황후는 원나라 제1황후가 되었다. 

원 나라 내정 간섭을 받고 있던 고려에서도 기항후의 세력이 미쳐 그의 가문 또한 득세했다. 특히 오빠 기철은 기황후의 아들, 즉 자신의 조카에 머리 숙이는 공민왕을 보고는 왕조차도 안하무인으로 대하며 신하 도리마저 내팽개쳤다. 마을 사람들을 겁박해 재산 빼앗는 일도 다반사였다. 공민왕은 결국 기철의 역모혐의를 잡아 제거했다. 오빠의 숙청 비보를 접한 기황후는 분개하며 복수를 결심하고 군사 1만명을 동원해 고려를 쳤다. 그러나 압록강을 넘은 원병(元兵)은 최영과 이성계에게 대패했다.

   
▲ 평화통일 불사리탑사는 남방불교 양식의 원형탑으로 조성됐다.

공납 대상에 올라 이국 땅으로 끌려갔으나 황후 자리에 올랐던 여인. 고려인의 공녀 관행을 폐지하는 데 앞장서고, 고려를 원의 성(省)으로 귀속시키려는 계획도 무산시켰던 그였다. 그러나 오빠의 국정농단 사태를 직시하지 못한 그는 모국에 칼을 겨누고 말았다.

원당사는 세월에 무너져 탑 하나와 터만 남겼으나 1900년대 초반 중창불사가 이뤄져 불탑사라 불리고 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조천포구는 화북포구와 함께 제주도와 육지를 잇는 주요 관문이었다. 조천포구에서는 지금도 성곽과 높은 성루를 볼 수 있는데 눈길을 끄는 정자 하나가 있다. 연북정(戀北亭)이다. 지명 ‘조천(朝天)’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 한 토막이 있다.

   
▲ 남북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탑과 제주 조천 전경.

불로초를 찾아오라는 진시황의 명을 받은 서복(徐福. 또는 서불, 徐市)은 배를 타고 영주산(한라산)을 찾아 나섰다. 거친 풍랑을 헤쳐 온 배가 포구에 무사히 닿자 서복 일행은 큰 바위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다’는 뜻의 ‘조천(朝天)’을 새겼다. 그 바위가 ‘조천석’이고 ‘조천포구’ ‘조천읍’이라는 지명도 여기서 비롯됐다.

조선 선조 왕 재위 당시 중국 지관이 조천석을 보고는 ‘저 바위를 감추지 않으면 조천에는 불량한 사람이 많이 나서 마을 사람들을 해칠 것이고, 감추면 훌륭한 인물이 끊이지 않고 배출 될 것’이라 예언했다. 관아는 성을 쌓아 조천석을 메운 후 정자 하나 올리고는 ‘쌍벽정(雙碧亭)’이라고 했다. 이후 1599년(선조 32) 제주목사 성윤문(成允文)이 쌍벽정을 보수하고 ‘연북정’이라 했다.

연북정(戀北亭)! 제주도에서 바라본 북쪽엔 조선의 도읍 한양이 있다. 하여, ‘북쪽을 사모한다’는 건 ‘임금을 그리워 한다’는 것이다. 유배, 좌천된 관료들이 임금의 부름에 따라 한양으로 돌아가기를 학수고대하며 제주 바람을 맞이했던 곳이다. 조선의 허응 보우 스님도 저 정자에 기대어 한양을 그리워했을까? 일각의 주장이기는 하지만 보우 스님이 제주목사 변협에게 타살당한 곳이 연북정 부근이었다고 한다. 연북정에서 1.5Km 거리의 평화통일 불사리탑사에는 보우 스님의 추모비가 서 있다. 

   
▲ 평화통일 불사리탑사에는 제주에서 순교한 허응당 보우 스님을 추모하는 비가 서 있다.

세납 24살의 보우는 금강산 오현봉 꼭대기의 이암굴에 가부좌를 틀고 용맹정진에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산 속 수행에 있어 최대 난제는 양식. 굶는 건 예사였다. 허약한 몸에 병고도 자주 들어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던 보우는 당시의 고난을 이렇게 전했다.

‘금강산에 자취 감춘 지 오래되니/ 살림살이 날로 엉성하여/ 서리 내린 아침엔 얼어빠진 밤 줍고/ 노을 지는 저녁에는 마른 나물 뜯네/ 빈 바리때는 거칠어 거미가 줄을 치고/ 불기 없는 재 위엔 새들이 전(篆)자를 쓰네.’

6년 뒤 토굴에서 나와 만행길에 올랐을 때(중종 33년, 1538)는 훼불사태가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지 않은 사찰은 모두 헐어내고 전라도 지역 승려 3000명을 군대로 내몰고 있었다. 불경을 간행하던 간경도감은 이미 폐쇄됐고, 승과마저 폐지됐다. 선종을 상징하는 흥천사와 교종을 대표하는 흥덕사는 그들의 유희 장소로 활용했다. 조선 땅에서 벌어지는 훼불사태를 목도한 보우는 이렇게 적었다.

“불교가 쇠퇴하기가 이보다 더하겠는가/ 피눈물 뿌리며 수건을 적시네/ 구름 속에 산이 있어도 발붙일 곳이 없고/ 티끌세상 어느 곳에 이 몸을 맡겨야 하나.”

   
▲ 연북정. 허응당 보우 스님이 제주 목사 변협에게 타살당한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독실한 불자였던 문정왕후(1501∼1565)는 정신적 스승을 찾던 차 보우와 인연을 맺는다. 문정왕후의 배려로 보우는 서울 봉은사 주지를 맡게 되는데 이를 기점으로 어두운 숭유억불 시대에서 불교중흥의 횃불을 든다. 사찰에 난입해 성보를 훼손한 유생들은 그 즉시 출입을 금지시켰다. 선교 양종을 다시 세워 불법의 기틀을 다졌고, 승과를 부활(1552)시켰다. 청허 휴정은 보우가 시행한 첫 승과를 통해 배출된 인재였다.

보우의 행보를 가만 보고만 있을 유생들이 아니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선교양종 복립과 승과부활 반대 의사로 성균관을 일제히 비우는 공관(公館), 즉 집단 수업 거부 사태를 일으켰다. 상소문이 줄을 이었다. 뇌물을 받았다는 허위 정보가 담긴 상소문은 봐줄만한 것이었다. 암탉이 수탉으로 바뀌었다는 허무맹랑한 ‘가짜 뉴스’를 만들고는 그 책임을 보우에게 물었을 정도다. 그러나 보우는 손에 쥔 횃불을 결코 놓지 않았다.

문정왕후가 세연을 다하자 유생들은 ‘불교가 흥하면 유교가 망한다’는 왜곡주장을 내세우며 명종에게 보우 축출을 요구했다. 결국 보우는 제주로 유배를 떠났고, 급기야 변협에 의해 살해됐다. 일각에서는 변협이 보우를 납치한 후 며칠 동안 괴롭히다 죽였다는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세수 56, 법랍 41세였다. 순교 직전 보우는 임종게를 남겼다.

‘일없이 허깨비 마을에 와서/ 오십여 년을 한바탕 놀았구나/ 인간사 영욕이야 무슨 상관이랴/ 적정한 그 자리에 돌아가느니!’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참고자료 : 박영기 저 ‘허응당 보우’(한길사).

 


[도·움·말]

 

   
 

길라잡이

불탑사가 자리한 골목길은 예쁘다. 한적한 길이어서 산책하기에 그만이다. 원당봉 둘레길과도 이어진 이 길은 제주 올레 18코스에도 포함돼 있다.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불탑사와 마주하고 있는 지금의 원당사는 현대에 지어진 태고종 소속 사찰이다. 평화통일 불사리탑사에서 연북정까지의 거리는 1.5km 남짓. 차가 좀 많이 다니는 게 단점이나 걸어 볼 만한 길이다. 제주의 푸른 하늘과 어우러진 불사리탑사의 둥근 탑을 다양한 각도에서 감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것만은 꼭!

   
 
불사리탑사 원탑 내부 전경 :
둥근 탑 안에는 약사전, 설법전, 선방, 사경실, 문화원 등의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 있다. 1층 법당에 약사여래불, 2층 법당에 석가모니불, 3층 법당에 는 아미타불을 봉안했다.

 

 

 

   
 
불탑사 :
이 절은 고려 후기에 창건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당사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경내 참배 후 옛 절터를 돌아보며 복원불사에 힘을 보태 주었으면하는 바람이다.

 

 

 

[1396호 / 2017년 6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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