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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의상대사, 신라를 불국토로 만들다-상

기자명 주수완

삼국통일 이론 제시했다지만 정작 스님은 끝까지 변방서 수행

▲ 범어사 소장 의상대사진영. 1767년.

삼국시대 말기에서 통일신라 초기로 이어지는 시기에 걸쳐 활동했던 스님들 중에 ‘삼국유사’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룬 스님은 아무래도 자장(590~658), 원효(617~686), 그리고 의상(625~702) 이렇게 세분을 먼저 손꼽을 수 있겠다. 비록 자장율사는 신라가 백제를 점령한 660년 직전에 입적하셨지만 활동 연대의 일정 기간이 원효, 의상 스님과 겹쳐 서로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의상 스님 당에 들어간 연도
삼국유사에 두 개로 기록 돼

650년 배 타고 당에 갔다가
670년 당 침공 알리러 귀국

당으로 떠날 때 원효와 동행
원효 해골물 먹고 유학 포기

의상 스님 ‘일즉일체 다즉일’
통일 이론적 근거 제시 논란

신라 수도 경주에서 벗어나
태백산 기슭에 부석사 창건

설사 정치권과 긴밀했더라도
결코 정치 물들지 않은 방증

원효와 의상은 물론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두 스님은 함께 당나라 유학을 떠나려고 했었던 일화로도 유명하다.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에서 인용한 ‘부석사 본비’에 의하면 원효와 의상은 650년에 일단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으나 고구려에서 통과시켜주지 않아 실패했다. 즉, 육로로 들어가려던 시도가 실패한 것이다. 이후 의상 스님은 661년 마침내 당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같은 ‘삼국유사’에서 의상을 조명한 ‘의상전교’편에서는 원효와 함께 유학길에 오른 것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그 목적지는 일단 요동이었고, 고구려에서 첩자로 몰려 수십 일 동안 갇혀있다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다음 다시 시도해서 당에 들어간 것이 650년경이라 기록하고 있어 ‘전후소장사리’와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 또한 당나라 사신의 배가 들어왔다 돌아가는 편에 편승하여 당에 들어갔다고 하여 첫 번째와 달리 해로를 선택한 것을 알 수 있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온 것은 삼국이 통일된 후 당나라에 인질 겸 대사 성격으로 가있던 김인문이 당이 곧 신라를 칠 것을 알아차리면서 의상대사에게 이 사실을 급히 본국에 알리라는 부탁을 받고서였다. 그래서 신라로 돌아온 것이 670년이었으니, 만약 650년에 유학한 사실을 받아들이면 의상은 20년을 중국에서 배운 셈이고, 661년을 인정한다면 9년간 중국에 머물렀던 셈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떨친 의상의 위엄을 생각해보면 9년은 다소 짧지 않나 생각된다.

▲ 의상을 사모하여 단월이 되었던 선묘의 설화를 그림으로 엮은 일본의 ‘화엄종조사회전’, 가마쿠라시대. 일본 쿄토 고잔지(高山寺).

더구나 650년에 배편으로 당에 들어갔다는 설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이 배는 당 사신의 배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진덕여왕이 당나라에 파견한 신라 사절이었으며, 이 배 바로 후에 문무왕이 되는 법민(法敏)이 타고 있었다. 만약 의상이 이 배를 타고 당에 들어갔다면, 이때부터 문무왕과의 인연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셈이다. 왜 왕족 김인문 등이 하필 의상에게 당나라의 침공 준비 사실을 본국에 전하라고 부탁했을까? 아마도 당으로 들어가는 배 안에서 법민과 의상이 친분을 쌓은 인연으로 서로 알고 지낸 덕분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렇다면 원효 스님이 당으로 유학가는 길에 해골물을 마신 설화는 언제였을까? 첫 번째 시도에서는 의상 스님도 함께 신라로 돌아왔기 때문에 원효 스님 혼자 당 유학을 포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 두 번째 유학길도 시작은 원효와 함께 했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650년에도 원효가 의상과 시작을 함께 했고 경주에서부터 법민의 사절단과 같이 움직였다면 초라한 움막에 들어가 해골물을 마실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스님은 배에 누가 타는지도 모르고 그저 신라 사절단이 당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 배편에 부탁을 해보고자 신라의 배가 출발하는 당항성으로 무작정 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원효가 해골물을 마신 곳이 당항성 인근이었다고 하므로 법민의 사절단과 만나기 전날이나 전전날 쯤 되었을 것이다. 이때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를 깨달았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것이 아니고 ‘송고승전’이라는 중국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도 원효의 기록에서가 아니라 의상의 기록을 전하는 ‘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에 나온다. 원효의 이 유명한 설화가 막상 원효전에 나오지 않고 의상전에 기록된 것은 뭔가 의상과 원효를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설화로서 활용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원효가 깨달은 ‘일체유심조’도 실제 ‘송고승전’에서는 비슷하긴 하지만 “삼계유심만법유식(三界唯心萬法唯識)이 심외무법(心外無法)”, 즉 “세상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 것이요, 그 질서는 오로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니 마음을 벗어나면 법도 없음이라”고 깨달았다고 되어 있어 더 구체적이다.

원효전에는 그가 당나라 삼장법사 현장의 가르침을 흠모하여 유학을 결심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유학 목적은 현장법사가 창시한 ‘법상종’, 즉 유식불교를 배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에 반해 의상은 당에 들어가 화엄을 배웠으니, 애초부터 두 스님은 같은 길을 가면서도 목적은 화엄과 유식으로 서로 달랐던 것일까? 여하간 원효는 이미 배를 타기 전에 ‘만법유식이 심외무법’임을 깨달아버렸으니 유식학을 배우러 굳이 유학 갈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그런데 그가 깨달은 앞의 구절 ‘삼계유심’은 ‘화엄경’의 ‘십지품’에 나오는 구절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식을 배우려던 원효는 사실상 화엄과 유식의 종지를 회통하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고, 이를 떠나기 전 후배인 의상에게 알려주지 않았을 리 없다.

이 이야기는 원효가 의상보다 연배도 위였고, 이렇게 당나라 불교도 필요없다고 할 정도로 스케일이 큰 인물이었던 것을 강조하고 있다. 어쩌면 의상도 원효와 마찬가지로 유식을 배우러 함께 길을 떠났지만 원효의 이 깨달음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가 결국 당에 가서는 화엄으로 전공을 바꾼 것인지도 모른다. 현장법사가 인도 유학을 마치고 당나라로 돌아온 것이 645년이었기 때문에 650년 당에 들어간다면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현장법사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그렇다면 어쩌면 원효가 아니었더라면 의상 스님은 현장법사의 문하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간 당항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의상 스님 혼자였다. 아마도 왕자에 준하는 귀인이 타는 배에 아무나 태워줄 수는 없는 일이어서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관리들과 옥신각신하던 이 스물다섯의 꽃스님 의상을 멀리서 본 법민이 승선을 허락해주라 은근히 지시하는 모습이 왠지 머리에 떠오른다. 그리고 바다를 건너며 법민은 차나 한잔 마시러 오라며 의상을 초대했고 전혀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던 둘의 인연은 이렇게 서해를 건너며 시작되었으리라.

▲ 의상이 창건한 많은 사찰 중에서 제일 먼저 세워졌고, 가장 널리 알려진 영주 부석사. 그의 화엄사상이 오롯이 녹아있는 사찰이다.

그러다 정세의 변화로 당의 신라 침공 사실을 알려달라는 긴급한 지령을 받아 670년 의상은 긴 유학생활을 급히 마무리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이 특별히 의상에게 메신저의 사명을 부탁한 것은 문무왕이 과거 한 배를 탄 특별한 인연을 가볍게 보지 않고 직·간접적으로 의상을 후원하며 인연의 끈을 놓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유학생활 동안 선묘(善妙)라는 여인의 도움도 지대했다.

의상 스님을 사모하여 그의 단월로서 뒷바라지를 했던 소녀 선묘는 의상이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귀국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 일화가 담긴 ‘송고승전’에는 의상의 긴급한 귀국에 대해 특별한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삼국유사’의 정황상 신라의 국운을 건 정보를 전달해야하는 상황이었기에 의상은 선묘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출항하는 배에 올랐던 것 같다. 선묘는 이것이 아쉬워 결국 용으로 변해 의상을 따라 신라까지 오게 된다.

이렇게 귀국한 의상은 아마도 10년 만에 법민, 아니 이제는 문무왕과 재회했다. 법민은 의상과 같은 해에 당에 들어간 이후 660년 귀국했기 때문에 당에서 10년 정도는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 같다. 입당(入唐) 동기에 메신저 역할까지 해준 의상 스님이 이후 신라 왕실과 얼마만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후 경주를 둘러싸는 성을 축성하려고 의상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이때 의상 스님이 ‘정도(正道)를 행하느니만 못하다’고 상소하여 그만 두었다는 설화는 의상 스님의 막강한 정치적 파워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특히 화엄의 ‘일즉다 다즉일’, 즉 ‘하나가 곧 모두고, 모두가 곧 하나’라는 마치 알렉산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의 구호 비슷한 구절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뿐 아니라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전제왕권의 이미지에도 부합하는 것이며 사실상 그런 이론적 틀을 의상이 제공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다. 그가 676년 경주에서 벗어난 외진 태백산 기슭에 부석사를 창건한 것을 두고, 실상 의상은 순수한 수행자였으며, 왕권의 후원을 받았다면 그는 경주 시내의 황룡사나 흥륜사에 머물렀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더불어 평범한 수행자로서 처음 창건한 부석사는 지금처럼 거대한 사찰이 아니라 작은 암자 수준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실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이유는 틀림없이 의상 스님이 정치권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으면서도 그가 결코 정치에 개입하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든 정치권과 친했다면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을 모두 얻어냈을 것이라 생각하고 언뜻 그렇지 못한 의상의 행적을 보며 그가 정치 중심세력으로부터 소외된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친하긴 친했으나 결코 의지하거나 무엇을 바라지 않은 사람, 나아가 많은 이권을 준다고 해도 거부하고 오로지 순수한 친분만 유지하는 사람. 단지 어려운 유학길을 가능하게 열어주고, 그 후에도 고단한 유학생활에 직·간접적으로 뒷배가 되어준 법민에 대한 순수한 감사의 마음, 그리고 세상을 바꾼 문무왕에 대한 개인적 존경심. 의상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 같다.

주수완 고려대·서울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396호 / 2017년 6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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