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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불시대, 왕실발원 불사로 불교문화정수 계승의 보루 되다

기자명 법보신문
  • 집중취재
  • 입력 2017.06.26 15:28
  • 수정 2017.08.08 10:04
  • 댓글 0

흥천사 소장, 160여점 성보의 의미

▲ 1. 흥천사종(보물 1460호) 2. 극락보전 목조여래좌상 3. 약사여래, 아미타여래, 지장보살상 4. 대방(국가등록문화재 583호) 5. 극락보전(서울시유형문화재 66호) 6. 명부전(서울시유형문화재 67호) 7. 42수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보물 1891호) 8. 극락보전아미타불도(서울시유형문화재 367호) 9. 지장시왕도(서울시유형문화재 368호) 10.연화대 감로왕도(근대문화재 지정신청중)

조선 태조 6년(1397) 신덕왕후 강씨의 능사 창건된 흥천사는 숭유배불 시대 도성 내에 건립된 기념비적 사찰이다. 창건부터 왕실과 깊은 연관이 있었던 흥천사에서는 왕족과 궁녀 등 왕실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이들의 발원으로 다양한 불교문화재가 조성됐다. 왕실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며 조성된 불상과 불화, 동종 등은 왕족과 상궁들의 적극적인 시주에 의해 조성되었던 만큼 예술적 완성도도 뛰어나다는 평가다. 이는 불교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던 조선시대에도 수준 높은 불교문화재의 명맥이 흥천사를 통해 이어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며 현재에도 그 가치를 재조명받고 있다.

창건 초기부터 왕족·궁녀 발원
불상·불화 등 불교문화재 조성
불교 쇠락기에도 문화명맥 이어

흥천사에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동종(보물 제1460호), 대방(국가등록문화재 제583호), 42수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보물 제1891호)을 비롯해 23점의 지정문화재 등 모두 160여점의 문화재가 전해지고 있다. 대방과 극락보전 등 건축물 외에도 조각, 불화, 동종 등 동산문화재도 다수인 점은 사격의 변화 속에서도 흥천사의 명맥이 면면히 이어져 왔음을 대변한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불교는 억압당했지만 대중들은 여전히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왕실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왕실은 개국 초기 불사를 후원하고 불교에 기대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다. 이러한 전통은 비빈(妃嬪), 종친, 상궁들에 의해 조선 말기까지 지속됐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왕실의 여인들은 흥천사의 불상·불화 조성에 적극 동참했다. 특히 조선 말에는 금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불화가 많이 조성됐는데 이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불교가 여전히 숭상되고 있었다는 방증으로 분석된다. 또한 흥천사에는 여러 점의 조선후기 불교조각이 전해지고 있는데 16~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극락보전 목조여래좌상부터 1701년 조성된 관음전 관세음보살상, 그리고 1829년 조성된 석조 약사여래좌상·아미타여래좌상·지장보살상 등 다양한 시기에 조성된 불보살상은 모두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극락보전과 대방은 조선후기 불교건축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19세기 중반 왕실의 후원을 받아 대대적으로 중창된 이들 건축물은 19세기를 조선 후기 사원건축의 전환점으로 규정하는 근거로 거론되기도 한다. 공포를 생략하고 불단을 건물의 벽체에 붙여 설치한 극락보전의 독특한 건축 양식과 19세기 들어 사찰에 새로운 건축유형이 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방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흥천사 대방은 극락보전과 함께 19세기 중반 왕실의 후원을 바탕으로 대대적으로 중창됐다. 이는 사찰에서도 예불의식과 집회, 기거, 휴식이라는 다양한 기능을 소화하기 위한 공간의 필요성이 대두됐으며 흥천사 대방에서 이러한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현재 대방은 국가문화재 제583호다. 

이에 대해 도윤수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는 대방의 등장과 기능에 주목하며 “조선후기 사찰 건축이 정형화되는 시대적 여건 속에서도 새로운 가구법을 적극적으로 적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없었던 창의적인 시도를 제시하였고, 새로운 유형의 건축물을 도입하면서 이를 더욱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18~19세기 흥천사의 영건활동과 건축적 의미’ 중에서)”고 평가한바 있다.

이처럼 수많은 불교문화재의 보고인 흥천사는 억불숭유의 조선사회에서 불교의 위상과 불교문화의 발전을 주도한 사찰로 그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손신영 한국미술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흥천사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왕실의 원찰이자 국가의 복을 기원하는 사찰로 자리매김했다”며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에서 불교 및 불교사찰의 위상과 변천을 잘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최신 양식·문양 동원 새 왕조의 역량 천명

조선전기 이뤄진 국책불사 범종

조선 건국 직후인 15세기에는 왕실발원 범종 주조가 급격히 증가했다. 흥천사, 원각사와 같은 왕실의 원찰들이 잇따라 창건되고 한양을 중심으로 왕실 주도의 중창과 개창 등 불사가 많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흥천사종(1462. 보물 제1460호)과 보신각종(1468), 봉선사종(1469)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성향은 종의 크기만 축소되었을 뿐 16세기까지 꾸준히 이어졌지만 이후 민간 발원의 범종이 주조되면서 범종의 역사는 조선후기로 접어들게 된다.

흥천사와 같은 왕실 발원 종은 국가에 소속된 장인들에 의해 주조됐다. 이들은 새로 등장한 왕조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위상을 높이기 위한 양식과 문양 등을 범종 주조에 적용했다. 조선 전기 왕실 발원 범종이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것도 이 때문이다.

흥천사 범종은 조선 전기 범종 중에서 가장 먼저 제작됐으며 이후 왕실 발원 범종의 기준이자 모본이 된 작품이란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특히 범종에 부조된 합장형 보살입상은 이전에 주조된 동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태로 흥천사 동종에 처음 등장한다.

최응천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는 “중국종의 요소를 수용하는 과정에서도 전통적인 연곽과 연뢰 부분이나 가장 중심적은 문양으로 보살입상을 배치하고자한 점은 비록 중국종 양식을 수용하면서도 한국종의 전통성만은 그대로 유지하고자 노력했던 당시 장인들의 의지를 엿보게 한다”고 밝혔다.

흥천사종은 1510년 흥천사가 소실된 후 1747년 경복궁 광화문으로 옮겨졌다가 일제강점기에 다시 창덕궁으로 이전됐다. 이후 덕수궁으로 자리를 옮겨 현재 광명각 안에 자격루와 함께 보관, 전시돼 있다.

 

 

“천촌만락의 시주물 모아 관음상을 조성하였습니다”

민중의 염원 간직한 불보살상


흥천사 극락전 목조여래좌상을 비롯해 좌우협시로 봉안돼 있는 대세지보살상과 천수관음보살상은 흥천사의 불보살상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된다. 이 가운데 보물 제1891호로 지정돼 있는 42수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은 국립박물관 소장 32수상, 기메박물관 소장 42수상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또 한 점의 32수상이 현전하고 있는 천수천안관음보살상의 전부일 만큼 희귀한 성보다. 이에 대해 문명대 동국대학교 명예교수는 “흥천사 42수 금동천수관음보살상은 우리나라 천수천안 관음보살상의 희귀한 예로 천수천안 관음보살상 연구에 크게 기여할 중요한 상으로 주목되어야 할 것”이라며 “우리나라 조각사상 가장 중요한 불상으로 높이 평가된다(‘흥천사 사십이주 천수천안 관음보살상의 도상 특징과 편년연구’ 중에서)”고 극찬했다. 이와 함께 관음전의 주불로 봉안돼 있는 목조여래좌상은 16~17세기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갖고 있어 조선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관음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사진 위>도 중요한 문화재로 주목된다.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에서는 “두감 비구가 모연문을 들고 천촌만락을 돌아다니며 시주물을 모아 금관음상을 조성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왕과 왕비, 세자의 장수를 발원하고 있다. 유근자 동국대학교 동국대 겸임교수는 “1701년이라는 확실한 제작 연도뿐만 아니라 제작에 참여한 조각승을 알 수 있다는 점, 보살상의 원 봉안처 및 불사를 주도한 승려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불교 조각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며 “조선 말기 왕실과 불교와의 관련성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1701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관음전의 남순동자상, 해상용왕상도 조선후기 관음보살 좌우 협시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과 두 손으로 정병을 들고 있는 새로운 남순동자상 도상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예로 여겨지고 있다.

 
명부전의 지장보살삼존상<사진 위>을 비롯해 27점의 명부존상은 얼굴표정, 두 손의 처리, 지물의 유무 등과 동자상들이 신고 있는 다양한 꽃신 등 다채로운 표현으로 주목된다. 특히 이들 조각상의 조성에는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시주자로 동참하는데 왕실과 사찰의 매개자 역할을 했던 상궁들의 시주가 주목된다. 이들은 단명한 왕자와 공주들의 천도를 발원하며 불사에 대대적으로 동참, 흥천사 불사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각상들에 대해 유근자 교수는 “흥천사는 조선초기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왕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으며 조선후기 불교 조각을 통해서도 그 일단을 살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전통 도상 계승하며 근대 사회상도 담아

19세기 신앙 진수 담긴 불화

흥천사에는 1832년 조성된 괘불을 비롯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조성된 불화 40여 점이 있다. 특히 19세기 후반 조성된 불화들은 이 시기 불화의 유형 외에도 왕실 신앙의 경향, 왕실의 불사 후원 양상, 왕실 발원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사료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신중도, 극락구품도 등을 조성한 화승 대허체훈의 불화에 대해 유경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전통적인 도상을 수용하면서도 한성부를 중심으로 궁중 또는 민가에서 태평과 복락, 장수와 길상을 상징하는 궁중회화의 모티프를 불화의 소재로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흥선대원군이 ‘흥천사’라는 편액을 내린 후 흥천사에서는 활발하게 불사가 이루어졌으며 상궁들이 발원한 불화 조성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이는 흥천대원군의 권선 이후 왕실 원당으로서 흥천사의 위상이 더욱 공고해졌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20세기 불화는 1939년 조성된 감로도를 비롯해 독성도(1934), 용왕도(1938)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감로도는 독특한 구성과 표현들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전통과 근대화가 혼재했던 시대상을 잘 드러내고 있어 중요한 역사자료라는 평가다. 김승희 국립전주박물관장은 “흥천사 감로도 화면에 전쟁 표현 장면이 많이 나타나고 일본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회상이 느껴지는 것도 그 당시 불교계가 처했던 역사적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라며 “일제에 의해 이식된 근대적 신문화와 경성에서 벌어지고 있던 ‘모던’ 라이프의 추세를 그대로 노정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흥천사 감로도의 위치를 ‘중세적 가치를 묵수해 나갔던 전통의 답습과 일제의 문명화 정책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통되던 모던의 신경향이 뒤섞인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의 표현’으로 정의했다.

감로도 하단에는 여러 장면들이 모자이크 형식으로 담겨있다.  밭갈이, 대장간, 서당풍경, 전통재판 등 조선시대의 사회상을 담은 장면들과 함께 근대적 시가지, 우체국, 전화, 전기공, 서커스, 전차, 통감부, 스케이트, 모던보이 등 근대화의 물결 속에 새롭게 등장한 시대상들도 고스란히 담겼다. 김 관장은 이에 대해 “혼재된 가치관들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으며 근대화의 과정을 일제강점기라는 억압된 역사적 현실 속에서 거쳐야만 했던 우리의 굴절되었던 근대사회상을 전해주어 그 자체로 근대기를 비추는 거울”이라며 “이 그림을 통해 근대의 여러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행운”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1397호 / 2017년 6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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