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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빈승의 독학-상

“뼈저린 고난을 극복하면 반드시 성공이 따릅니다”

▲ 불광산 개산 직전인 1965년 성운대사가 자애유치원의 어린이들과 함께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다.  대만 불광산 제공

"저는 수계 이후 더욱 큰 고행의 일과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물을 긷고 나뭇짐을 지고 발우공양 배식을 하는 등 하루 세끼 밥을 푸고 설거지를 하면서 6~7년을 보냈습니다. 중국대륙의 추운 겨울철에 매끼마다 차가운 물로 그릇 수백개를 씻다보니 손이 얼고 갈라져서 붉은 속살이 드러났습니다. 그런 손으로 그릇을 씻어야 하니 괴로웠지만 인내하는 이외에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빈승이 일생으로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서 초등학교는 물론이고 유치원 졸업장조차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부하지 않거나 배운 것이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늙어도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하였듯이 고령의 빈승이 눈이 보이지 않아 제자들이 돌아가면서 저에게 책을 읽어주곤 합니다.

유년기를 회상해보면 빈승이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고 가정교육도 온전하게 받지 못했지만 ‘스스로 공부’하는 성격은 타고 났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공부한다’고 함은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을 배우고 일하는 것을 배워야 쓸모 있는 인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서 느낀 것’입니다. 유년기의 저는 예의 있는 어린이였고 외할머니를 따라 자주 절에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야단을 맞거나 싫은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으며 모두 저를 예뻐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빈승의 어린 시절은 사람들이 좋아해줄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빈승이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절에서 “선함은 푸른 소나무 같고 악함은 꽃송이와도 같아 지금 눈앞에서는 눈에 띄지 못해도 어느 하루 서리를 맞게 되면 꽃은 안보여도 푸른 소나무는 그대로 있다네(善似青松惡似花 看看眼前不如它 有朝一日遭霜打 只見青松不見花)”, “선함에는 선한 과보가 있고 악함에는 악한 과보가 있다네 과보가 없는 게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라네(善有善報 惡有惡報 不是不報 時辰未到)”라는 인과게송을 낭송하시던 장면이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저는 남자아이였지만 청소, 설거지, 불 지피기 등 집안일 하기를 좋아했고 심지어는 간단한 식사거리도 간혹 조리하면서 집안일을 아주 부지런히 도왔습니다. 집이 가난하였기 때문에 어려움을 덜고자 부모님을 돕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 어린나이였지만 저는 남들이 버린 물건을 잘 주워왔는데 남들이 먹고 버린 살구 씨와 자두 씨를 주워 와서 모아두었다가 한약방에 팔면 몇 푼의 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또 아침이면 개똥을 줍고 저녁에는 소똥을 주웠는데 개똥은 비료로 쓰고 소똥은 땔감으로 썼습니다. 제가 받은 몇 푼의 돈을 어머님께 갖다드리면 아주 기뻐하시니 저도 즐거웠습니다. 특히 10살이 되던 해 ‘노구교사건’이 발생하면서 전쟁으로 고향동네 집이 불에 타고 기와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저는 다른 또래와 함께 무너져 내린 파편더미 속에서 못과 쇳조각들을 주어서 팔아 몇 푼의 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원 재활용의 일환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 전적으로 돈을 벌기위해서만은 아니었고 자신이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다닐 수 없지만 사람이 살면서 사람 노릇도 하고 일도 배우면 그냥 헛되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출가한 나이는 겨우 12세였지만 전혀 글을 모르지는 않았고 몇 백자 한자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말을 틀리게 하거나 적절하게 하지 못했을 때 글씨를 모르는 모친은 어떻게 말해야 정확한 말이라는 것을 제가 알도록 말해주셨습니다. 또 며칠간이었지만 서당을 갔었기에 제가 몇 글자라도 아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출가하면서 은사 스님은 저에게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모친께 약속을 하셨지만 실제로는 당시 화약연기가 넘쳐나는 전쟁 통에 절집 역시 하루 세끼를 해결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상황이 그러했기에 공부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간혹 수업을 할 선생님이 계셔서 대중을 불러 모으는 종이 울리더라도 “왜 종을 치지? 누구라도 왔나?”라면서 모두 이상하다는 듯이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물었을 뿐입니다.

사실 우리를 가르치러 온 선생님조차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달리 공부를 한 적이 없었을 것이지만 단지 우리보다 나이가 많고 출가한지 우리보다 오래된 것으로, 우리들은 선생님을 존중했습니다. 우리에게 수업을 하고자 칠판에 글씨를 쓰더라도 그 위치가 틀리기도 하였고 가르치는 글귀의 해석이 수준이 높다고 느껴지지 않기도 했습니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단하지 않은 수업 속에서도 저는 앞으로 어떻게 칠판글씨를 쓰고 어떻게 책의 글귀를 해석해야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좋은 강사진이 있으면 물론 우리들 학생의 복이겠지만 좋은 스승이 없더라도 그 사람 생각이 바르고 아는 것이 있으면 대단하지 않고 부족한 속에서도 배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회상해보면 빈승이 서하산에서 공부하던 7~8년간, 강의수준이 떨어지는 수업도 있었지만 너무 심오한 수업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강사 스님은 우리들에게 ‘여래장(如來藏)’ ‘18공(十八空)’ ‘8식(八識)’ ‘이무아(二無我)’를 강설하셨는데 저는 그 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고 또는 ‘인명론(因明論)’ ‘구사론(俱舍論)’을 강의하셨는데 귀와 입이 있었어도 저는 알아듣지 못했고 이에 대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한 번은 “보리무법으로 반야론을 바로 드러내라(以菩提無法直顯般若論)”라는 제목으로 우리들에게 글을 써서 내라고 하셨습니다. 부끄럽지만 지금 저에게 말해보라고 하더라도 정말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당시 청소년기의 저는 그 뜻을 몰라서 다른 책에서 일부 베껴서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꾀꼬리 두 마리가 버들가지에서 지저귀고 백로가 한 줄로 하늘을 난다(兩隻黃?鳴翠柳 一行白鷺上?天)”라는 시를 적은 강사 스님의 채점에 저는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러나 상급반 스님이 “꾀꼬리가 무엇이라고 지저귀는지 알아들을 수 있느냐? 백로가 한 줄로 하늘을 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느냐?”고 묻기에 저는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쓴 내용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강사 스님의 뜻이라는 말에 저는 한없이 부끄러워서 다시는 함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서하산에서 공부하던 기간에는 외출금지로 경전과 불학서적 외에는 신문조차도 볼 기회가 없었고 전혀 외부접촉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길가에서 누가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책 ‘정충악전(精忠岳傳)’을 보게 되었는데 칼라로 인쇄된 표지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악비 등에 악비의 모친이 ‘정충보국(精忠報國)’ 네 글자를 새기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 네 글자는 저의 마음속을 깊이 파고들어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정충보국’의 이념을 생활에서 적용하여 일에 충실하고 약속에 충실하며 책임에 충실하고 신앙에 충실하였습니다. 지금 회상해보면 ‘정충악전’은 그 당시 저에게 일깨움을 준 첫 번째 책이었습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불법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저는 도서관에 있는 ‘황지해(黃智海)’가 저술한 ‘아미타불백화해석’을 읽고서 저 자신을 잊을 정도로 심취하였고 불법이 정말 좋다고 느꼈습니다. 자연계의 아름다운 풍경과 사회적인 인간관계가 조화된 정토극락세계는 ‘칠보행수(七寶行樹)’ ‘팔공덕수(八功德水)’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장엄하여 안락하고 상서로워 실제로 사람이 태어나야 할 곳이었습니다. 수행하고 불법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더욱 신심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빈승은 매우 운이 좋게 15세가 되었을 때 구족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수계 기간 중 수면이 부족하고 음식을 배불리 먹지 못하였는데 야단을 맞는 것 외에도 그 어떤 고난과 억울함 역시 당연했던 것은 자신이 수계를 받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빈승이 청소년기에 독단적인 억압과 억울함을 받으면서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맞거나 욕을 먹는 것을 모두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수계를 받은 후 간혹 수업을 받는 것 이외에 저는 더욱 큰 고행의 일과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물을 긷고 나뭇짐을 지고 발우공양 배식을 하는 등 하루 세끼 밥을 푸고 설거지를 하면서 6~7년을 보냈습니다. 중국대륙의 추운 겨울철에 매끼마다 차가운 물로 그릇 수백 개를 씻다보니 손이 얼고 갈라져서 붉은 속살이 드러났습니다. 그런 손으로 그릇을 씻어야 하니 괴로웠지만 인내하는 이외에 달리 무슨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인생을 되돌아보면 고난을 참아내는 것은 청년 학인들이 배워야 하는 증상연(사연(四緣)의 하나. 역자 주)입니다. 누군가 뼈를 깎는 어려움을 겪어내면서 참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필히 성공할 것입니다. 빈승은 발심하여 고행을 하는 것으로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빈승이 서하산에서 공부하던 시기에 가장 도움이 되었다고 느낀 적이 세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항일전쟁 초기로 서하산지역 사범학교가 후방인 중경으로 철수하였는데 책으로 묶지 않은 낱장으로 된 ‘루스리프식(loose leaf style)’ 같은 것들이 전부 길거리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것들을 전부 주워 모아 작은 도서관 ‘루스리프 문장 선집실’을 만들었습니다. 불교 서적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소설들을 읽었는데 중국 민간소설 ‘봉신방’ ‘칠협오의’ ‘양산백과 축영대’에서부터 ‘삼국연의’ ‘수호지’ 등도 읽었습니다. 심지어는 ‘그림형제 동화집’ ‘안데르센 동화집’ ‘프랑스 알렉상드르 뒤마(페르·아버지)의 몽테크리스토 백작’ ‘알렉상드르 뒤마(피스·아들)의 춘희’ 내지는 영국 ‘셰익스피어전집’ 러시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인도 타고르의 시집’ 등 수 많은 대문호의 위대한 작품들을 읽었습니다. 비록 알듯 모를듯 했지만 그 속에서 얻는 것은 무한했습니다.

두 번째로 책을 눈으로 보면서 배워나가는 이외에 귀로 배우는 공부 또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중의 많은 어른 스님들이 학문적으로 비록 큰 식견을 갖고 계시지는 않았지만 불교에 대한 역사와 알고 계신 지난 일들을 듣다보면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듯이 빠져들었고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원영(圓瑛 : 1878~1953년)대사와 태허(太虛 : 1890~1947년) 대사가 형제 결의를 맺은 일, 인산(仁山 : 1887~1951년) 스님의 금산사 소동(1912년 불교개혁과 승가교육을 주장하는 인산 스님과 태허 스님이 강소성 진강 금산사에서 개최한 회의에서 기득보수파와 다툼이 벌어진 사건. 역자 주), 동정파송일승래(洞庭波送一僧來) 시구로 유명한 팔지두타(八指頭陀 : 유명 시인승려 경안(敬安 : 1851~1912) 스님이 소신공양으로 손가락이 여덟 개 뿐이어서 팔지두타로 불림. 역자 주), 청량사 정파(靜波) 노스님의 온갖 일화, 인광(印光) 대사의 ‘문초(文?)’, 홍일(弘一) 율사의 삶 등등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관세음보살님께 절을 하며 직접 경험한 것입니다. 불보살님의 가피 속에서 소년시절의 ‘성운’이 어느 순간 청년 성운이 되었습니다. 배움이 부족한 불제자에서 불법에 깊은 체득이 있는 수행생활을 하게 되었고 어리석고 우둔함에서 점차적으로 반야지혜의 소식을 다소 알게 되었으니 이것이 가장 크게 받은 이로움으로, 제불보살님의 자비와 은덕에 감사할 뿐입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97호 / 2017년 6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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