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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돈황석굴 벽화가 전하는 고승들 이야기

기자명 오중철

군왕보다 높은 자리서 예를 받는 승려 표현

▲ 막323굴 남벽 담연 장면. 담연은 북주의 폐불시대와 수문제의 친불시대의 한가운데에 있던 인물이다. 화면 상단 중앙은 ‘열반경소’를 봉헌하자 사리와 소에서 방광하는 장면, 좌측은 수문제가 담연에게 팔계를 받는 장면, 하단 좌측은 담연이 수문제의 부름을 받고 가마에 탄 장면, 우측은 수문제가 담연에게 가뭄의 연유를 묻는 장면. 7세기 후반.

하나의 문화권에서 새로운 종교가 자리 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종교가 전파되는 과정은 종종 선각자들의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고, 때로는 극적인 상황의 전개 속에서 그 결실을 맺기도 한다. 막고굴 323굴은 주실의 남벽과 북벽 양쪽에는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여러 신이한 사건들이 그려져 있다. 그중 세 분의 고승에 대해 상당부분의 화면을 할애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7세기 후반에 건설된 이 석굴의 벽화에서 주목하고 있는 고승들은 누구이며 어떠한 사건들인가?

7세기 후반 석굴에 새긴 고승
통치자와 승단 관계 특히 강조
새로운 난관 직면한 당시 불교
위기의식·경계 의미 담은 결과

먼저, 북벽 우측에 묘사된 일련의 장면들을 살펴보자. 빛을 발하는 단지, 배를 타고 이동하는 승려, 승려에게 극진한 예를 올리는 군주 등의 장면들은 모두 강남 불교의 비조 강승회(康僧會)에 관한 것이다. 강거국의 후예인 강승회는 241년 강남의 포교를 위해 낙양으로부터 오국의 도성 건업(현 남경)으로 배를 타고 왔다. 강승회는 오왕 손권을 불교에 귀의시키기 위해 21일의 기한 내에 불사리를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때가 되자 별안간 빈 병속에서 소리가 나더니 그 안에서 사리가 나타났다. 사리는 오색의 광명을 발하였는데, 쇠망치로 깨려고 하여도 꿈쩍하지 않았다 한다. 손권은 이에 감복하고 발심하여 건초사를 지었는데, 이것이 강남 최초의 사찰이다.

손권의 왕위를 계승한 손호는 불교에 대한 믿음이 애초에 없었다. 곧 건초사를 폐하고 불교의 유포를 금지시켰다. 나중에 손호가 병을 얻었는데, 백방으로 치료하여도 차도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강승회를 불러 병을 보게 하니, 신기하게도 치료가 되었다. 이때 강승회는 손호에게 인과를 설하고 오계를 수여했는데, 이후 손호는 더 이상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고, 강남에 불교가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 불교사상 최고의 신승(神僧)으로 꼽히는 불도징(佛圖澄)에 대해서는 어떤 모습들을 묘사하였을까? 강승회를 묘사한 화면 바로 좌측에 불도징에 관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구자국 출신인 불도징이 중국 낙양에 당도한 것은 이미 나이가 79세에 달한 때였다. 후조의 군왕 석륵과 석호의 대를 이은 후원을 받은 불도징은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사찰의 건립을 확산시키는 등 중국불교의 정착에 혁혁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당시 대중들 인식에서 그는 옆구리의 구멍에서 손쉽게 내장을 꺼내 씻는 그런 비범하고 신통한 인물이었을지 모른다.

▲ 막323굴 북벽 강승회 장면. 중앙의 막사 안의 단지에 사리가 출현하여 방광하는 장면을 강승회와 손권이 지켜보고 있다. 상단의 좌측은 강승회가 배를 타고 강남으로 오는 장면, 우측은 최초의 사찰인 건초사다. 하단의 장면은 손호가 강승회에게 오계를 받는 장면. 7세기 후반.

불도징은 어느 날 석호에게 설법하는 도중에 유주성에 큰 화재가 났다고 말하더니, 유주 쪽으로 몸을 돌려 하늘에 술을 뿌렸다. 곧바로 유주성에는 커다란 먹구름이 하늘을 뒤엎더니 큰비가 내려 불을 모두 껐는데, 이상하게도 비에서 술 냄새가 났다고 한다. 화면의 중심에 대신들을 대동하고 앉아 있는 석호와, 몸을 돌려 저 멀리 화염에 싸인 유주성을 향해 먹구름을 보내고 있는 불도징의 모습은 바로 이 일화를 묘사한 것이다.

화면 상단에 탑을 뒤로하고 불도징이 몇몇 제자와 담소하는 것 같은 장면은 그 자체로 평온하고 일상적이다. 그러나 이것이 후조가 멸망할 전조를 알리는 장면임을 이해하게 되면 평온이 전율로 바뀐다. 불도징은 탑에 매달린 풍령소리가 예사롭지 않음을 듣고 장차 석호 일가에게 비극이 닥칠 것을 예언한다. 훗날 석호의 큰아들 석선이 태자의 지위를 막내 동생에게 빼앗긴 것에 앙심을 품고 막내와 그 모친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석호는 대노하여 불도징의 만류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석선을 참하였다. 원한과 분노로 인한 가족 간의 살육이 이어지고 말았으니, 이를 기화로 온갖 흉흉한 일들이 벌어지더니 결국 후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강승회의 장면을 마주보는 남벽 좌측 화면에는 북주에서 수나라에 걸쳐 활약했던 고승 담연(曇延, 516~588)을 묘사하고 있다. 16세에 ‘열반경’과의 인연을 통하여 출가한 담연은 이후 ‘열반경’ 공부에 전념하여 마침내 경을 풀이한 ‘열반경소’를 완성하였다. 담연은 이 소를 인수사 사리탑 전에 공양하고 발원하였다. “제가 풀이한 바가 이치에 맞는다면 신령스러운 감응을 드리워 주시기 바라나이다.” 말이 끝나자 곧 열반경소와 탑속의 사리에서 동시에 광명이 뿜어져 나왔는데, 삼일 밤낮으로 그 빛이 잦아들지 않았다. 이후 담연의 ‘열반경소’는 그 강목의 구성이 명료한 주석서로서 널리 유포되었다.

북주 무제의 폐불로 인하여 강제로 환속당했던 담연은 수나라가 건국되자 수문제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황폐화된 교단을 신속히 회복하였다. 586년 전국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수문제는 담연을 찾아가 그 연유를 물었다. 담연이 대답하였다. “군주는 만민의 대표이자, 신하들의 수장입니다. 그런데도 황제께서는 백성들을 위해 몸소 기우 의식을 지내지 않으니 어찌 비가 내리겠습니까?” 수문제는 곧바로 담연을 조정의 어좌에 앉히고 자신은 대신들과 함께 극진하게 예를 갖춰 팔계를 받아들였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모두 계를 전수받으니, 때마침 전국에 단비가 내려 온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한다.

▲ 막323굴 북벽 불도징 장면. 화면 중 불도징의 장면은 세 부분이다. 중앙에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석호에게 설법 중 유주성의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술로 유주성에 먹구름을 보내는 장면과 화염에 싸인 유주성이 묘사되었다. 우측 상단은 탑의 풍령소리로 석호 일가의 비극을 예언하는 장면, 하단 중앙은 불도징이 냇가에서 내장을 꺼내어 씻고 있는 장면. 7세기 후반.

이와 같이 초기 중국불교 발전에 기여한 고승들의 활약상은 각종 신이한 사건들을 다룬 벽화, 즉 시각적인 텍스트 형식을 통하여 예배자에게 강렬하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벽화의 장면들을 단지 고승들의 활약에 대한 기념, 혹은 그에 얽힌 감응 고사들의 전개로만 본다면, 석굴 조성자의 의도를 반만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통치자와 승단의 관계가 유난히 중시되고 있는 장면들 속에 이 석굴이 조성된 7세기 후반 당시 중국불교가 처한 정치적, 사회적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당대가 중국불교 최고의 전성기였던 것은 확실하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새로운 난관에 직면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노자의 후예임을 자처한 당 황실은 기본적으로 줄곧 도교를 불교에 우선시하는 정책을 견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단은 여러 가지 제약을 받게 되는데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사문은 왕에게는 신하로서의 예를, 부모에게는 자식으로서의 예를 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더 이상 고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벽화의 장면에서 유독 사문과 군왕 사이에 동등하게 예를 올리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군왕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예를 받는 승려를 표현하고 있는 것은 분명 이러한 현실에 대한 경계와 위기의식의 반영이다.

오중철 중국 사천대학 박사과정 ory88@qq.com
 


[1398호 / 2017년 7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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