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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있음’을 아는 자,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는 자-상

존재의미는 내가 들어간 세계에서 발생되는 변화

▲ ‘강섭월출(牨涉月出, 물소는 거닐고 달은 뜨다)’ 고윤숙 화가

불법이 공(空)을 설함은 잘 알려진 일이다. 불교 문헌에서 빈번히 만나게 되는 ‘무(無)’라는 말조차 실은 언제나 공을 뜻한다. 그저 ‘없음’이 아니라 “있음과 없음의 양변을 떠난 중도”의 무를. ‘없음’을 뜻하는 말뿐 아니라, 무언가를 부정하는 말들도 많은 경우 그러하다. 가령 ‘금강경’의 유명한 문장 “모든 상 있는 것에서 상 없음을 보면 여래를 보리라(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말에서 ‘상 없음’으로 번역된 ‘비상(非相, 상 아님)’이 그러하다. 여기서 상(相)을 부정하는 말은 단지 상이 없는 텅 빈 공허를 뜻하는 게 아니라 상이 있는 것의 상 없음을 뜻하는 역설적인 말이다. 텅 빈 공간을 보면서 어떤 상도 없음을 보기는 쉽다. 그러나 개나 잣나무 같은 눈앞에 있는 어떤 것에서 상 없음을 보긴 어렵다. 그래서 여래를 보기는 사실 어렵다.

‘없음’은 상 있는 것에서 상 없음 보는 것
‘있음’은 존재자의 존재 어떠한지 아는 것
나의 유무 따라 달라진 세계, 존재 의미

없음을, 즉 ‘무’를 보는 게 이러하다면 ‘있음’을, 즉 ‘유’를 본다함은 어떤 것일까? 이 또한 흔히 말하듯, ‘저기 소나무가 있네’ ‘여기 시계가 있네’ 할 때의 ‘있음’을 보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무를 본다’는 말을 그저 뒤집는 것으로 ‘유를 본다’고 할 순 없다. 그렇다면 ‘유를 본다’거나 ‘있음을 안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유를 보는’ 것에 관심을 가졌던 이는 누구보다 조주(趙州)와 그 스승 남전(南泉)이었던 것 같다. 조주가 남전에게 물었다.

“있음(有)을 아는 이는 어디로 갑니까?”
“산 밑 시주 집에 가서 한 마리 물소가 되어야지.”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젯밤 삼경에 달이 창을 비췄다.”(‘조주록’, 장경각, 30)

조주가 이리 물었던 것은 스승 남전이 있음(有)에 대해 종종 언급했기 때문일 터이다. 가령 언젠가 그는 이렇게 대중들에게 설법을 한 적이 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있음(有)을 알지 못하고 이리와 흰 암물소가 도리어 있음을 안다.”(‘벽암록’, 중, 218)

있음이 무엇이길래 삼세 부처님은 알지 못하고 이리와 물소가 안다고 했던 것일까? 있음의 의미가 무엇이길래 그걸 아는 이는 산 밑 시주 집에 가서 물소가 되어야 한다고 했을까?

‘없음을 안다’ 할 때 없음이란 세상만물 어디에도 불변의 본성(本性)이 없음을 뜻한다.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본성’이 있을 뿐이다. ‘연기법’이 그것인데, 이를 깨달음으로써 석가모니는 ‘깨달은 자’ 부처가 되었다. 삼세 부처님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함은 이런 뜻이다. 반면 ‘있음을 안다’ 할 때 있음이란 세상만물의 있음을 뜻한다. 있음을 안다 함은 어떤 존재자의 ‘존재’가 어떠한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흔한 말로 하면 그의 존재가 뜻하는 바, 즉 ‘존재의미’를 아는 것이다. 그러니 ‘있음’이란 존재하는 것들의 있음, 다시 말해 존재자의 존재를 뜻한다.

어떤 존재자가, 가령 이리나 자동차가 존재한다 함은 어떤 것일까? 어떤 시간에 어떤 장소를 점하고 있음? 데카르트라면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있음을 안다는 건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눈이나 귀로 ‘아, 있네’ 하고 확인할 수 있음을 뜻할 뿐이다. 그런 거라면 ‘존재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고, ‘유를 안다’는 말 또한 따로 할 이유가 없다. 굳이 찾지 않아도 다 아는 것이니까.

후설 같은 철학자라면 존재자가 대상에 부여하는 ‘의미’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이전에는 그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것이 내가 꽃이라고 부르니 내게 와서 꽃이 되고, 이전엔 그저 지나가는 한 사람이었을 뿐인 이가 내가 ‘사랑’의 눈으로 보니 내게 와서 연인이 되듯이. 그러나 그건 꽃이나 연인에겐 멋지게 들리겠지만, 소나 돼지 같은 것들에겐 참혹하게 들릴 것이다. 인간들에게 ‘고기’라고 불려 인간이 부르는 대로 튼실한 고기가 되기 위해 열심히 사료를 먹어대는 것 말곤 할 일이 없는 게 존재의미라 하는 셈이니 말이다.

하이데거라면 ‘마음씀(Sorge)’이나 ‘고려’ ‘배려’ 같은 마음의 작용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또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이다. 이 역시 ‘마음을 쓰는’ 주체인 인간이 부여하는 의미작용을 특권화 할 뿐이란 점에서 후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역사’가 보내는 ‘사명’을 수행하는 게 우리의 존재의미라고 하는 말(이 또한 하이데거의 말인데)도 그렇다. ‘역사’란 이름을 장악한 이들이 보내주는 과업을 위해 몸을 바치라는 말이니까. 박정희가 서명한 ‘국민교육헌장’이 가르치는 바가 바로 그것 아니었던가! 주체든 역사든, 우리 이름을 불러주는 자들에게 우리의 존재의미를 맡기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그들에게 우리의 존재의미를 결정하는 자리를 넘겨주기 십상이니 말이다.

존재자의 존재의미는 인간이나 ‘역사’가 이렇게 저렇게 부여하는 ‘의미’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흔히 쓰는 ‘존재감이 있다’는 말이 차라리 앞서보다는 더 낫다. 말없이 그저 앉아 있어도 존재감이 확연한 사람이나 사물이 있고, 나름 열심히 뛰어도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 있다. 존재감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근에 있는 자들에게 강한 촉발의 힘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만큼 그것이 있는 세계와 없는 세계를 크게 다르게 만듦을 뜻한다.

그렇기에 그런 존재감은 그가 속한 세계가 달라지면 당연히 달라진다. 가족-세계 안에선 대개 누구나 강한 존재감을 갖지만, 국가규모의 세계가 되면 있음과 없음이 큰 차이가 없는 이들이 아주 많아진다. 우주로 확장되면, 대부분의 사람은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가 없다. ‘존재감이 있다’는 말은 있고 없음의 차이가 크다는 말 밖에 못하지만, ‘존재의 의미’는 있고 없음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말할 수 있다. 가령 가족이나 직장에서 모두 존재감이 큰 사람이지만, 가족-세계에서는 아주 따뜻하고 정감 있는 존재자인 반면 직장-세계에서는 권위적이고 차가운 존재자로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아주 다른 존재의미를 갖고 존재하는 것이다.

요컨대 ‘나’라는 존재자의 존재의미는 내 인근의 세계 속에 내가 ‘있다’는 게 ‘없다’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에 의해 규정된다. 마찬가지 말이지만, 내가 없는 세계 속에 내가 들어가 존재하게 될 때 발생하는 변화가 곧 나란 존재자의 존재의미라 해도 좋다. 따라서 세계 안에서 나란 존재자가 갖는 의미는 내가 부여하는 의미나 ‘역사’ 같은 게 부과하는 ‘사명’ 같은 게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 안에 내가 있음으로 인해 산출되는 효과를 통해 규정된다. 내가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갖고 심각한 ‘역사적 사명’을 자각하여 행동해도 나를 둘러싼 세계가 고통스러운 세계나 압제적인 세계가 되면, 내가 거기서 존재하는 의미는 고통이나 압제를 만드는 자일뿐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99호 / 2017년 7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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