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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설한 자도 없고 증득한 자도 없다

기자명 정운 스님

방편으로 설한 진리 또한 방편에 불과

원문 : 여래로부터 가섭에게 법이 전해진 이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했는데, 이는 마음과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아니하다. 허공에 도장을 찍은즉 어떤 무늬도 생기지 않는다. 물건에 도장을 찍는다고 해도 찍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새기나니,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아니하다. 직접 찍는 것과 찍히는 것이 계합하기 어려워 (심인을) 얻는 자가 매우 드물다. 그러니 마음을 곧 마음이라고 할 수 없음이요, 얻음도 곧 얻음이라고 할 수 없다. 부처에게 삼신이 있다. 법신은 자성이 허통한 법을 설함이요, 보신은 일체 청정법을 설함이요, 화신은 6도만행법을 설한다. 법신의 설법은 언어ㆍ음성ㆍ형상의 문자로서 구할 수 없으며, 설한 바 없이 설하고, 증득한 바 없이 증득해 자성이 허통할 뿐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에서 ‘설할 것조차 없는 법을 일컬어 설법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보신과 화신은 근기에 따라 감응해 나타나므로 설법도 현상에 따르며, 근기에 응하기 때문에 모두 참다운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보신과 화신은 참 부처가 아니요, 또한 설법자가 아니다’라고 하셨다. 

보신·화신·법신이 삼신일체
법신 있기에 나머지도 존재
본래 부처성품 구족했지만
깨닫지 못하기에 방편 설해

해설 : 법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 하지만 전함에는 어떤 형체가 있어서 전하는 것도 아니요, 받는 자도 어떤 형체를 받는 것이 아니다. 마음도 ‘마음’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 ‘마음’이라는 단어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전한다고 해도 전한 것이 없음이요, 얻었다고 해도 얻은 것이 없다.    

삼신설에도 다양한 사상과 내용이 있는데, 보편적으로 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화신(化身)을 말한다. 법신은 진리[법]를 인격화한 진리의 부처이다. 대승불교 사상에서는 우주에 충만해 있는 법(진리)을 인격화하고, 진리 체현자(體現者)로서의 이상적인 불신(佛身)을 법신이라고 한다. 이 법신은 수행의 결과로서 실현되는 부처가 아니라 일찍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의미이다. 

보신은 바라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었거나 과보로 얻은 원만한 부처를 말한다. 보신불로는 일반적으로 아미타불이나 약사여래 등을 말한다. 화신은 응신(應身)이라고도 하는데, 교화의 대상에 따라 그에 상응해서 변화해 나타난다. 곧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상대방에 따라 출현하는 부처로서 32상과 80종호 등 상호를 갖춘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한다. 법신ㆍ보신ㆍ화신, 삼신이 일체이지 각각 존재할 수 없다. 법신이 있기 때문에 보신과 화신이 존재할 수 있음이요, 보신과 화신을 통해 근원처인 법신을 알 수 있다.  

법신이란 어떤 형상이나 문자로서 구할 수 없으며 설했다는 설자(說者)도 없고, 법을 들었다는 문자(聞者)도 없다. 곧 설자도 없고 들은 자도 없는 청정 본연의 참된 자성이다. 황벽은 설할 것조차 없는 법을 설법이라고 하였다. 도교에서도 ‘도가 언어로써 표현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금강경’ 7품이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이다. 설한 자도 없고, 들은 자도 없으니 당연히 무엇을 증득했다는 것조차 없는 것이다. ‘능가경’에서는 ‘내가 어느날 밤 최정각을 얻고 나서 그 후 반열반에 들 때까지 그 중간에 한 자도 설하지 않았으며 또한 이전에 말한 것도 없고, 앞으로도 설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8만4천 법문이 존재한다. 부처님께서 중생이 어리석고 탐욕심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방편으로 설할 수밖에 없었다. 방편으로 설해진 진리는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므로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 방편조차 버려야 하는 것이다. 곧 ‘열반경’에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하였고 ‘금강경’에서는 ‘강물을 건넌 뒤에는 뗏목을 버리라’라고 하였다. 선사들도 한결같이 ‘나의 말을 기록하지 말라’는 말씀을 남겼다. 

황벽의 설법으로 돌아와 정리하면 모든 중생에게 구족되어 있는 청정한 법신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현여부(出現與否)에 상관없이 시방삼세 법계에 존재한다. 누구나 부처의 성품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화경’의 상불경(常不輕)보살은 어느 누구를 만나든 간에 예를 갖추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대는 반드시 부처님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399호 / 2017년 7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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