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5. 일승진법과 중생의 근기

기자명 정운 스님

목적지 하나지만 가는 길은 다양하다

원문: 18계[6근+6경+6식→18계]가 없음을 요달한다면, 6화합이 묶여져 일정명(一精明)으로 된다. 일정명은 곧 마음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줄을 알면서도 6화합과 일정명의 알음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법에 속박되어 본래의 마음에 계합하지 못하고 있다.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여 일승진법을 설하지만, 곧 중생들이 믿지 아니하고 비방하며, 고해에 빠진다. 그래서 (여래는) 널리 묘법을 베풀어 방편을 시설해 삼승을 설했다. 승에 크고 적음이 있다든가, 득에 깊고 얕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 본래의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직 일승도만 있음이요, 나머지 이승은 곧 참된 법이 아니다. 그러나 (여래께서) 일심법을 나타내지 못하여 가섭을 불러 법좌에 함께 해서 특별히 (언설을 여읜) 일심을 부촉하였다. 지금 이 한 가지 법이 별도로 행해지고 있다. 만약 계합하여 깨닫는다면 곧 바로 부처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염불이나 참선 수행법은
이고득락을 위한 방편설
성품에는 두 길이 없으나
방편 따라서 여러 문 생겨

해설: 18계가 공(空)임을 체달하는 것을 말한다. 존재하지 않음을 체득한다면 6근이 밝음으로 응집되는데 그 응집된 밝음이 마음이라는 뜻이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쉽게 설한 태국 아짠차(1918∼1991)선사의 법문을 보자. “올바르게 내관한다면, 우리가 대상을 볼 때 그 대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리를 들을 때도 그 소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냄새를 맡을 때도 냄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감각 기관들을 분명히 느낄 수 있지만, 그것들 모두는 지속되지 않고 비어 있는 것입니다. 단지 일어났다 사라지는 감각들일 뿐입니다.” 제법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 무상ㆍ무아ㆍ고임을 체득할 때 지혜를 얻는다. 대승불교적인 의미로 볼 때 실상을 아는 그 자리가 바로 깨달음의 이치인 것이다.

또 일승진법은 모든 중생이 깨달을 수 있는 성품을 갖고 있는 성불된 본각을 말한다. 중생과 부처가 동일한 진성인 일승진법을 굳게 심신(深信)해야 한다. 굳게 믿어 수행하는 이론은 훗날 간화선에서 주장하는 3대 요소[大信根ㆍ大憤志ㆍ大疑情] 가운데 하나인 대신근에 해당한다. 모든 중생은 부처와 똑같은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중생들은 ‘자신이 하열하다며 뛰어난 근기가 있음’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 입장에서 어리석은 중생을 가르쳐야 한다. 부처가 중생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부처가 자신 혼자만의 해탈미에 탐착하는 것이요, 부처도 간탐에 빠진 것이다. ‘유마경’에서도 ‘선미(禪味)에 탐착하는 것은 보살의 속박이요, 방편으로 살아가는 것은 보살의 해탈이다’라고 하였다.   

불교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수행법이 전개되었다. 참선이든 염불이든 간경이든 주력이든, 그 어떤 수행법이든 이고득락을 위한 평등한 방편설이다. ‘금강경’에서는 “이 법은 평등해서 높고 낮음이 없다”라고 하였고, ‘능엄경’에서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성품은 두 길이 없으나 방편 따라 가는 길에는 여러 문이 있다”라고 하였다. 곧 해탈 경지라는 목적지는 똑같지만 수행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음을 시사한다.

원문에서 ‘오직 일승도만 있음이요, 나머지 이승은 곧 참된 법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내용은 ‘법화경’의 설과 유사하다. 곧 경에서 중생이 간 데마다 집착하기 때문에 이끌어서 나오도록 한 것이요, 시방불토 중에는 오직 일승법만 있을 뿐이요, 이승도 없고 삼승도 없다고 하였다. 깨달음의 길이 여러 갈래이듯, 그 여러 길들은 방편이며 목표인 부처가 되는 것이 바로 일승이요, 일승진실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법[진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근기가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전심법요’는 선사상이지만 방편적인 측면에서 염불사상을 보자. 중국 정토종 인광(印光, 1862~1940) 스님은 정토행법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염불법문이 단지 하근기의 중생에게만 적합한 것이 아니라 상중하 세 근기의 모든 중생에게 두루 통한다. 최상의 지혜나 최하의 어리석음이나 근기의 우열을 가리지 않고 부처와 똑같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에 이르기까지 염불법문으로도 얼마든지 일생에 생사를 마칠 수가 있다.”

이렇게 인광 스님은 염불은 어느 근기이든 실천할 수 있음이요, 염불로도 얼마든지 해탈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 사상이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400호 / 2017년 7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