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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있음’을 아는 자,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는 자-하

하고자 함 없이 하고 얻고자 함 없이 얻어라

▲ ‘물래즉조(物來卽照, 오고가는 대로 비추어 보라)’고윤숙 화가

있음이 없음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 특이점이 되어 세계의 특이성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 그것이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의미를 추구하는 삶이고, 유(有)를 아는 이가 사는 방식이다. 그것을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隨處作主)는 임제의 말(‘임제록’, 장경각 60)처럼, ‘주인’으로, 혹은 ‘주인공’으로 세상을 사는 방식이라고 해도 좋을까? 이때 ‘주인’이란 어떤 이일까?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의지대로 세계를 만들어가는 자? 자신의 의지대로 타인을 지배할 수 있는 자? 혹은 사물이나 집을 소유하고 그것을 뜻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자를 주인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역시 사물을 자신이 장악하여 자기 의지대로 사용하고 처분하는 자를 뜻한다.

주인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 아니라
오고가는 것을 그대로 비추어 보는 자
그렇다면 선 자리 그대로 참이 되리라

이런 게 흔히 말하는 ‘주인’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대상을 장악하여 지배하는 자. 철학자들은 이런 의지를 ‘자유의지’라고 명명한다. 상식에 충실한 이들은 모두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살아가는 자가 ‘자유’로운 자고 ‘주인’이라고 말한다. 밥을 먹겠다는 자유의지는 사실 위장이 내 머리와 근육에 보낸 신화와 명령에 따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위장이 그렇게 명령할 때, 나는 자유롭지 않다. 심오한 사유도, 다정한 말도 결코 쉽지 않다. 어떻게든 먹을 것을 찾아야 한다. 이때 ‘나의 자유’란 사실 ‘위장의 노예’를 뜻할 뿐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자유의지’란 없다고까지 말한다.

니체는 ‘나’의 의지란 없다고 말한다. 근육의 의지, 위장의 의지, 감각기관의 의지, 감정이 발송한 의지, 기억에 따라 일어나는 의지 등등 수많은 ‘자유의지’들이 모여들어 ‘하나’의 의지로 종합되어 행동을 만들어낼 때, 그것이 ‘나의 의지’라는 관념이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차라리 자유란 그 많은 ‘자유의지’들을 지배할 수 있는 자라고 말한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남에게 강제하고 관철시키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자,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자유의지’들을 지배하는 주권(sovereignty)을 행사할 수 있는 자를 ‘주인’이라고 보는 셈이다.

그러나 이것도 ‘주인’이라고 말하기엔 불충분한 것 같다. 가령 영화 ‘올드보이’에서 이우진(유지태 분)은 오대수(최민식 분)에게 복수하기 위해 인생을 건다. 복수에 필요한 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며, 그 복수심으로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다른 종류의 미소한 ‘자유의지’들을 모두 지배했을 것이다. 치밀하게 준비하고 교묘하게 계산하며, 모든 일들을 자기 뜻대로 한다. 약속한 복수를 실행할 수 있는 자이고 자기를 지배하는 ‘주권자’라 하겠다. 이우진은 오대수의 행동마저 정확하게 예측하여 완전히 자기 손 안에서 갖고 논다. 모든 것을 자기 뜻한 바대로 한 것이다. 그러니 이우진은 ‘자유로웠다’고, 자기 인생의 ‘주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복수의 이빨을 가는 원한의 감정에 충실하게 복종하는 노예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주인’이란 말처럼 속기 쉬운 것도 없는 것 같다. ‘주인’이란 말은 어쩌면 자신이 노예임을 잊고 있는 노예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른다. 서암(瑞巖)이 항상 스스로 “주인공아!”라고 부른 후 스스로 “네!”하고 대답하곤 다시 “정신차려라. 앞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속임을 당하지 말라!”고 했던 것은 이래서였던 것일까? 조주는 ‘부리는 자’와 ‘부림을 받는 자’라는 말로 주인으로 사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대비하여 ‘주인’으로 사는 법을 말한다.

“출가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맹세코 구할 때는 어떻습니까?”
“아직 출가하지 않았을 때는 깨달음에 부림을 받지만, 출가하고 나서는 깨달음을 부릴 수 있다.”(‘조주록’, 92)

깨달음은 ‘대자유’를 뜻하는 말이지만, 그것에 매이면 그 또한 부림받는 삶으로 인도한다. 깨달음이란 생각, 깨달음에 도달해야 한다는 생각에 끄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무언가에 끄달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끄달림이 될 수 있다.

“무엇에도 끄달리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응당 그래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학인의 본분의 일입니까?”
“끄달리는구나, 끄달려.”

끄달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언가에, 가령 관념이나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러해야 한다는 관념을 행동의 이유로 삼는 것이고, 감정을 행동의 원인으로 삼는 것이다. 스스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나 감정 같은 것이 일으킨 것을 따라가는 것이다. 끄달리지 않는다 함은 그런 관념이나 감정과 독립적으로 행하고 사는 것이다. 스스로가 원인이 되는 방식으로 행하는 것이며, 스스로 시작하며 사는 것이다. 이를 ‘능동성’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좋을 터이다. 사제인 설봉과 길을 가다 오산(鰲山)에서 폭설로 길이 막히자 방안에서 내리 좌선만 하고 앉아 있던 설봉이 ‘까놓고’ 가르침을 청하며 묻는 말끝에 암두가 해준 말이 그렇지 않은가?

“그대는 모르는가? 문으로 들어오는 것은 집안의 보물이 아니라, 모름지기 자기의 가슴 속에서 흘러나와 하늘을 덮고 땅을 덮어야만 비로소 조금은 들어맞는다는 것을!”(‘벽암록’ 상, 67)

주인이란 문밖에서 들어온 것, 감정이나 감각, 관념이나 관습 같은 것에 따라 움직이는 수많은 크고 작은 의지들에 끄달리며 움직이는 게 아니라, 자기 가슴 속에서 흘러나온 것을 원인으로 삼아 움직이는 자, 그런 점에서 본질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자’이다. 그러나 이는 자기의 관념이나 생각을 고집하는 게 아니다. 거꾸로 그런 관념을 내려놓고, 그런 생각을 빗겨나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어떤 지식이나 생각, 관념을 그저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부리며 사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는 심지어 밖에서 들어오는 것들을 따라가는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주인이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의지대로 하는 자가 아니다. 그런 걸로 치면 복수하려는 자야말로 누구보다 자기 의지대로 하려는 자이다. 주인이란 사물이나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러 억지로 하려는 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따라가며 행할 줄 아는 자이고, 오면 오는 대로 받아주고 가면 가는대로 보내주며 그때그때 오고가는 것을 오고가는대로 비추어볼 줄 아는 자이며, 그럼으로써 하고자 하는 바 없이 하고, 얻고자 하는 바 없이 얻는 자라고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것에 매이지 않고 끄달리지 않는 것이며, 밖에서 들어온 것을 부리며 사는 것이고, 집어들었다 내려놓았다 함에 자재로운 것이다. 오면 오는대로, 가면 가는대로 있는 그대로 비추어보는 것이다. 사물이나 사태의 참된 모습을, 내 마음의 진상(眞相)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비추어본 바에 따라 감각이나 지식, 신체와 의지를 부리며 사는 것일 게다.

“큰 그릇이라면 남에게 홀리지 말고,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隨處作主) 선 자리 그대로가 모두 참이 되게 하라(立處皆眞). 다만 찾아오는 자가 있어도 모두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다만 생각을 쉬면 될 뿐, 다시 바깥으로 구하지 말고, 사물이 다가오면 오는 대로 비추도록 하라(物來卽照).”(‘임제록’, 장경각, 60)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01호 / 2017년 7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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