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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껍데기는 가라

기자명 조정육

본말전도는 박수갈채에 속는 순간 시작된다

▲ 강희안(姜希顔),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15세기 중엽, 지본수묵, 23.4×15.7cm, 국립중앙박물관 : 사람의 마음은 끝없이 외부를 향해 치닫는다. 그 마음을 붙잡지 않고 내버려 두면 그 마음 따라 자기 자신마저 놓쳐 버릴 수가 있다.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어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 욕망에 멱살 잡혀 끌려다니는 대신 물어야 한다. 욕심을 부리는 그 마음은 무엇인가. 특히 나이 들수록 더욱더 자주 길을 멈추고서 물어야 한다.

방을 정리하다가 대학교 때 샀던 책을 발견했다. 불문과를 다니면서 한국미술사로 전공을 바꾸기 위해 공부하려고 처음으로 산 책이었다. 색채를 생생하게 느끼며 공부해야 할 한국회화사 책인데 그림이 모두 흑백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아, 내가 이 책으로 공부했지. 감회가 새로웠다. 책을 펼쳤다. 첫 장을 넘기자 맨 앞부분에 내가 써 놓은 글이 있었다. 글은 짧았는데 행갈이까지 된 시구절이 두 줄로 적혀 있었다.

기관 수장 욕심내는 스승에서
만족할 줄 모르는 노욕 목격
환호성의 껍데기에 쌓인 결과
마음 수시로 점검하고 챙겨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의 시 한 토막이었다. 시 아래에는 1983년이란 연도만 적혀 있고 부연 설명은 생략되어 있었다. 1983년이면 지금으로부터 34년 전이니 대학교 3학년 때였다. 그때 나는 어떤 껍데기들이 눈에 거슬렸기에 저 시를 적어놓았을까. 독재 타도였을까. 학내 민주화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아 답답함을 느껴서였을까. 내가 적어 놓은 시였지만 가타부타 설명이 없으니 당시의 심정이 짐작되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계속해서 옛날 생각에만 빠져 있을 수도 없어서 책을 덮었다. 그리고 잊었다.

어제는 대학교 때 은사님이 출판기념회를 한다고 해서 인사동에 나갔다. 모든 행사가 그러하듯 손님맞이에 바쁜 주인공은 책에 사인받을 때만 잠깐 보고 헤어졌다. 대신 오랜만에 만난 학계 사람들과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행사 후에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기대된다. 최근 몇 년 동안 강의를 제외하고는 두문불출하며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터라 이런 대화는 학계 소식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전부 여자들이라 분위기도 우아하게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갔다. 피자와 파스타가 나오고 와인까지 한 잔씩 마시면서 여섯 명의 여자들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음식도 맛있고 대화도 즐거웠다. 반가운 사람들과 만난 탓인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하다 보니 밤 10시가 넘었다. 모두들 나이가 있다 보니 대화의 주제는 단연 정년퇴임하신 스승님들과 선배들의 근황이었다. 몇 년 후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관심이 지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얘기 도중에 나온 스승님들과 선배들의 행보가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대학교수까지 했으면 그래도 이 사회에서 잘 나가는 편에 속하는데 정년 후에 그분들이 보여준 행동이 의외로 실망스럽다는 중론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학생들 지도하느라 바빠서 그렇다고 쳐도 정년 후에는 매인 것이 없으니 그동안 하지 못했던 연구에 본격적으로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정상인데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어느 단체나 기관의 수장으로 갈까 쫓아다니는 모습이 결코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이까지 꽃길을 걸었으면 이제 후배들한테 자리를 물려줘도 될 텐데 굳이 정년을 하고 나서까지 자리 욕심을 낸다는 얘기였다. 한마 디로 말해 그분들의 모습은 ‘노욕(老欲)’의 표출이라고 결론 내렸다. 얘기를 듣고 있자니 우리들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조건에 있으면서도 만족할 줄 모르는 그분들이 위태로워 보였다. 결국 어젯밤의 회식 자리는 바람직한 노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스승님들과 선배들에 대한 성토대회의 장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원래 그런 분이 아닌데 곁에 있는 사람들이 보필을 잘 못해서 문제라는 지적도 있었다. 아무리 스승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솔직하게 얘기해줘야 하는데 제자들이 무조건 띄워주기만 하니까 착각을 하게 된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우리 스승님이니까 기왕이면 높은 자리에 갔으면 좋겠다는 솔직한 의견도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면서 나도 곰곰이 생각해봤다. 왜 그분들이 그렇게 변해버렸을까.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책에 써 두었던 신동엽의 시구절이 팍 스쳐 지나갔다. 아, 이거였구나. 껍데기 때문이었구나. 지난 몇 달 동안 내가 느꼈던 위태로움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최근 석 달 동안 거의 전국을 누비며 강의를 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강의 날짜를 5월 이후로 미루다 보니 이 기간 동안 강의 계획이 한꺼번에 몰려 거의 강행군을 하다시피 일정을 치렀다. 빡빡한 일정에 비해 강의는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가는 곳마다 반응도 좋아 강의 도중 쉬는 시간이나 끝난 후에는 거의 매번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다. 나와 악수를 하거나 감사인사를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감동의 표정을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을 거듭해서 보고 있자니 진짜 내가 뭐라도 되는 사람인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그 순간 깨달았다. 만약 내가 저 모습에 속는다면 진짜 나는 끝장이겠구나. 정신 바짝 차려야지 몇 번의 박수갈채와 황홀한 표정에 속아 우쭐해진다면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되는 현상이 발생할 것이다. 강의하면서 받는 환호성, 그것이야말로 껍데기고 허명(虛名)이었다. 그 환호성에 묻히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그 일을 할 자격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껍데기에 속아 인생을 망쳤던가. 정치인이고 연예인이고 권력자고 교육자고 할 것 없이 모두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려서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주변에서 널려 있다. 심지어는 무상(無常)을 깨닫고 절에 들어간 수행자조차도 껍데기에 속아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곁에 있는 사람들이 보필을 잘 못해서 문제라는 말은 옳지 않다. 결국 모든 문제는 자신이 판단하고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젊어서는 인생을 알지 못해 실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도 실수를 거듭하는 것은 실수가 아니라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정년을 했든 안 했든 상관없이 나이 들어가는 것만으로 후배들의 스승이 되는 것. 그것은 모든 어른들의 책임이고 의무다.

사람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너무나 가볍고 얇아 사소한 외부 충격에도 쉽게 변질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 마음을 수시로 점검하고 챙기는 것만이 껍데기에 덮이지 않고 사는 방법이다. 그것이 줏대 있게 사는 법이고 참나로 사는 것이다. 그나마 나는 껍데기를 알맹이로 착각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좋은 것에도 속지 말고 나쁜 것에도 속지 말고 오직 내 할 일만을 할 뿐. 나머지는 신경 쓰지 않아야 한다. 그것만이 나를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정답이다. 살다 보면 독재타도를 부르짖어야 할 때도 있고 민주화운동에 투신해야 될 때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순정성을 지키는 것은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대사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sixgardn@hanmail.net
 

[1401호 / 2017년 7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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