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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나한의 시대·장경동 홍변상 [끝]

기자명 오중철

돈황불교 지도자서 입적 후 나한으로 승화

▲ 16굴 통도에서 바라본 17굴. 홍변상은 16굴 주존불에 예배하기 위해 통도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온다. 예배자는 주존불과 홍변의 진신상이 시야에서 교차될 때 어떤 교감을 일으킬까.

16굴은 막고굴의 석굴들 중에서 손에 꼽히는 규모를 자랑한다. 그런데 주실로 들어가는 통도의 우측 벽에는 이례적으로 별도의 석굴로 들어가는 입구가 자리한다. 이 입구는 근 천년 세월 동안 외부로부터 봉쇄되어 왔으며, 1900년에 이르러 왕도사라는 인물에 의해 다시 세상을 향해 문을 열게 되었다. 이 곁방살이 석굴이 막고굴에서 가장 유명한 장경동, 즉 17굴로 두 평 남짓한 자그마한 공간 안에서 5만여 건이라는 엄청난 양의 문서더미가 발견되었다. 이 문서들은 당시 사회, 정치, 종교, 문화에 대한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이른바 ‘돈황학’이라는 학문 영역을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

막고굴 16굴 곁굴인 장경동에
좌선에 든 홍변대사 상 모셔
상 내부에 골사리 안치 확인
천년만년 무너지지 않길 발원

장경동의 문서 두루마리들은 우여곡절 끝에 세계 각지로 모두 반출되었다. 석실을 가득 채웠던 보고들이 모두 빠져나간 공간은 너무나도 초라했다. 사방의 벽을 온통 벽화로 채운 여느 석굴과 달리 장경동의 벽면은 북벽과 기단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무런 채색이나 그림도 장식되지 않았다. 1965년 돈황문물연구소는 이 빈 공간에 진흙으로 빚은 한 구의 소조상을 반입하여 본래 자리했던 북벽에 안치하였다.

상은 가사를 입고 삭발을 한 채 좌선에 든 형상의 나한상이었다. 제자리를 찾은 상은 북벽에 그려진 벽화와 어우러져 천년의 시간 동안 잊혔던 한 장면을 다시 완성하였다. 반쯤 내리 감은 눈과 굳게 다문 입술 끝에 살짝 걸린 미소는 엄중함과 인자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다소 매끄럽지 않고 굴곡지게 처리된 두상, 또렷하게 드러난 눈두덩 윤곽, 이마와 눈꼬리와 입가에 섬세하게 표현된 주름 등은 매우 사실적이어서 마치 대사의 생전 모습을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북벽에는 잎이 무성한 두 그루의 나무가 나한상의 양쪽에 서 있고, 행낭과 정병을 나누어 매달아 놓았다. 나무 밑에는 지팡이를 든 시녀와 부채를 든 승려가 마주보며 서 있다.

서벽에 새겨진 ‘홍변고신칙첩비(洪辯告身勅牒碑)’는 이 상의 주인공이 9세기 돈황불교를 주도한 고승 홍변임을 밝히고 있다. ‘오승통비’와 같은 돈황문서에 의하면, 홍변은 속성이 오씨로 어린 시절 출가하여 수행과 경전에 모두 정통하였으며, 821년부터 862년 입적할 때까지 돈황불교를 이끄는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당시 돈황은 토번(티베트의 고대국가)의 점령시기에서 장의조가 이끄는 한족의 지방정권 시기로 전환기를 맞았다. 이러한 정치의 변화에도 홍변에 대한 대중적 지지와 그의 돈황불교 영도자로서의 위상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돈황 수복 후에는 당황실로부터 승통의 직위를 책봉받았다.

▲ 17굴 홍변상 전경. 통견의 가사를 걸치고 정좌한 모습에서 실제 인물과 마주한 듯한 질감이 느껴진다. 북벽에 그려진 쌍수와 시종, 그리고 정병과 행낭 등의 도상적 배치는 고승의 진신상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17굴에 왜 홍변의 영당을 마련하였을까? 홍변은 석굴 건설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16굴은 그의 주도하에 건설된 대형굴이다. 홍변이 입적한 후, 본래 선방(혹은 양식창고)으로 쓰였던 17굴은 그의 상을 모신 일종의 영당(影堂)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통례에 따르면 석굴 조성자는 석굴 내부에 벽화의 형태로 표현될 뿐, 따로 석실을 마련하고 상을 조성하여 모시지는 않는다.

연구소 측은 상을 안치할 당시, 상의 뒷면에 자리한 복장구(腹藏口)를 통하여 상 내부에 대사의 골사리가 납입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벽화에 나타나는 한 쌍의 나무와 한 쌍의 사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라쌍수 나무 사이에서 열반에 드시는 순간을 연상시킨다. 결국 이 소조상은 홍변대사의 생전 형상과 사리가 결합된 ‘진신’을 모신 것이다. 17굴의 홍변상과 벽화는 서벽에 새겨진 비문의 내용과 같이, 나한으로 승화된 대사의 열반이 진신상의 형식으로 ‘천년만년 썩지 않고 무너지지 않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장경동의 돈황문서 중에서 홍변의 진신상과 유사한 다른 도상의 예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 장면을 보면, 두 그루의 나무 아래에 각기 시종이 자리하고 있다. 그 사이로 바람막이 모자를 두른 승려가 두 손으로 선정인을 하고 정좌하고 있다. 대좌 아래로는 한 쌍의 신발이 보이고, 다시 그 앞에는 한 쌍의 사슴이 그려져 있다. 정좌한 승려의 독특한 도상 특징은 이 승려가 지난 기사에서 언급한 승가 화상임을 추정케 한다. 승가는 입적 후에 유해에 옻칠을 하여 사리탑 안에 모셔졌다고 했다. 홍변의 소조상과 승가의 ‘전신사리’는 재질면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형상의 완벽한 재현과 육신(혹은 사리)을 통해 진신성을 확보하였다는 점에서 양자는 상통한다. 그렇다면 상을 통한 승가 신앙의 확산이라는 현상 역시 승가상을 통해 물질적으로 구체화되고 시각화된 법신의 상주성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닐까?

입멸 후 유해를 통한 열반의 물적 구체화는 비단 홍변과 승가에 국한되는 특수한 사례가 아니었다. 7세기 이후 성행한 선종과 밀교는 분명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의 경계, 즉 성불을 보다 세속적인 경지까지 끌어내리는 데 기여하였다. 선종조사에 대한 존숭이나 밀교에서 선양하는 현생의 육신으로 성불을 실현하는 ‘즉신성불’ 수행이념은 고승들 입멸 후 신체의 영속성을 통하여 열반을 구체화하려는 의지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혜능의 진신상이나 신라 김교각 스님의 진신상 역시 이 같은 맥락 속에서 형성된 성보이다.

▲ 장경동의 돈황문서 중 발견된 그림. 비록 주존상의 존명은 다르지만 배경을 이루는 도상 중 쌍수, 쌍사슴, 한 쌍의 신발은 이 상이 17굴과 동일한 사상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17굴의 경우 한 쌍의 사슴과 한 쌍의 신발은 홍변상이 자리한 기단의 주위에 그려져 있다.

홍변의 진신상은 16굴의 본존에 예불하고자 통로에 진입했을 때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온다. 홍변의 상과 정면의 본존 사이에서 선 불자는 두 상을 마주하면서 어떠한 감흥을 경험할까? 어쩌면 17굴에 자리한 홍변의 상은 지금까지 연재해온 다른 감통설화의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진신상을 통해 ‘물질적으로 현현한 법신성’을 우리가 마주할 본존에게 부단히 환원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돈황문서가 모두 빠져나간 장경동이 여전히 돈황의 보고로 불려야할 이유다.

오중철 중국 사천대학 박사과정 ory88@qq.com
 

[1402호 / 2017년 8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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