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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하

“있는 그대로 긍정하면 행복은 저절로 생겨납니다”

▲ 이진경 교수는 “윤회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이지만 고통이라고 느끼는 것은 삶이 곧 고통이라는 관념이 만들어 낸 것”이라며 “이런 생각을 버리면 오는 것은 오는 대로, 가는 것은 가는 대로 긍정할 수 있는 여여함이 생기게 된다”고 강조했다.

명색 다음에 나오는 것은 육처 혹은 육근입니다. 이것은 감각작용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 지점에서 자아라는 것이 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육처를 감각적 활동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와 상관적인 감각기관이 동반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기관이라는 것은 도구를 사용하는 전체적인 유기체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눈이 본것’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 것, ‘내가’ 들은 것으로 인지합니다. 유기체가 바로 나라는 관념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육처는 유기체가 전제된 개념이고, 자아라는 개념이 있어야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명색이라는 것에서 내 몸과 환경을 구별하려는 작용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나라는 경계가 생기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몸의 면역계는 나와 나 아닌 것으로 구별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에 의해 구별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분별과 집착이 무지를 만들고
실상에서 멀어지게 하는 원인
생이 고통이라는 관념 버리면
윤회가 곧 해탈이 될 수 있어

그런데 면역계는 가변적입니다. 왜냐면 면역세포가 작용하는 방식에 따라 면역경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알레르기 반응이 그런 것이겠죠. 우리는 생존을 위해 먹어야 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내 몸 밖에 있는 것을 내 몸 안으로 넣어서 흡수해 내 몸의 일부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면역계 입장에서 보면 내 몸에 들어온 것은 모두 공격의 대상입니다. 먹는 족족 공격을 해버리면 살 수가 없겠죠. 그래서 입으로 먹고, 흡수한 것은 공격하지 않습니다. 알레르기 반응은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함에도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이라고 간주해서 공격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면역반응 때문에 사람이 죽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반대로 면역질환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류머티즘 같은 것이겠죠. 류머티즘은 면역세포들이 내 몸의 일부를 외부에서 들어온 것으로 착각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류머티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분자적 수준에서 자기 몸의 일부를 외부라고 인식해서 공격하는 병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루프스병입니다. 이것은 신체 모든 부위가 다 면역세포의 공격대상이 되어서 신체의 어느 부위를 공격하면 파키슨병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신체의 내부가 따로 없는 것입니다. 모두를 바깥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면역계도 모두 다릅니다. ‘노말프로라’로 불리는 면역계도 있는데, 이것은 외부에서 침투해 들어온 세균들이 유기체의 신체에 적응해 신체의 일부가 된 면역계입니다. 아주 이상하죠. 노말프로라는 것은 면역계이지만, 기존의 안팎 경계가 다릅니다. 분명 밖에 있던 것이 들어와 내가 된 것이죠. 대게 우리 몸의 면역계는 하나의 경계를 설정해서 그 경계 안에 있는 것은 ‘나’라고, 밖은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팎을 구분합니다. 이럴 때 ‘나’라는 관념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이것은 허구죠.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나’라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나’라는 관념은 비록 허구이지만 유용하고 필요한 허구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내 신체들의 능력이 탁월해서 어떤 놈들이 들어와도 잘 지내면 면역의 경계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세균은 괜찮은데 어떤 세균은 못 견디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몸에는 조단위의 세균이 있지만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같이 있을 때 견딜 수 있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됩니다. 그렇지만 어떤 세균은 조금만 들어와도 방어하지 못하면 치명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에이즈가 그런 것입니다.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무너지도록 만듭니다. 그런 점에서 면역계라는 것은 내 몸의 무능성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내가 수용할 수 없는 놈들을 쳐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면역능력이 크다는 것은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여러 세균들이나 폭이 크다는 것이고, 면역력이 작다는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균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대상포진이나 이런 병들은 내가 몸이 약할 때 생겨나는 병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라는 경계가 강한 사람일수록 면역력이 약한 경우일 가능성이 큽니다. 면역력이 약할수록 남들과 자신을 구별하려고 애를 쓰잖아요. 면역계는 그런 점에서 자아라는 허구의 경계인데, 무능력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필요하지만 사실은 실체가 아니고 끊임없이 달라집니다. 내 건강상태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신체의 면역계의 작용방식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아주 가변적인 경계이죠. 그러니 허구이지만 유용한 허구인 것입니다.

이렇듯 유용한 허구의 식이 만들어지면서 기관이 생겨나고, 기관이 생겨나면서 육처가 생깁니다. 다시 육처가 외부대상과 만나면서 접촉이 생기고, 접촉에 의해서 감수 작용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감수 작용을 통해 쾌와 불쾌가 생겨나죠. 감수 작용은 하나하나의 식이 작용하는 것이라고 보기 보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파리와 모기를 봤을 때 불쾌감과 적대감이 생깁니다. 내 몸에 달라붙었을 때 내 몸의 능력을 떨어뜨리는 놈들은 불쾌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슬픔과 기쁨도 이런 것들에 의해 발생하는데, 무엇인가를 만났을 때 내 능력을 증가시키는 것과 감소시키는 것을 구별해서 ‘좋다’, 혹은 ‘나쁘다’를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수 작용은 쾌감과 불쾌감, 혹은 기쁨과 슬픔을 야기하는 것들로 분류하는 작용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분별(애)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심리학자들이 어떤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초콜릿을 정확히 똥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서 먹어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어른들은 먹을 생각조차 안하고 아이들은 먹었답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아이들은 더럽다는 분별심이 없다는 것이죠. ‘똥은 불쾌해’라는 느낌이 아직 없을 때는 초콜릿을 먹지만 어른들은 초콜릿이라고 알려줘도 ‘똥’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게 분별심의 작용입니다. 실상에 다가갈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분별이 있으면 맛에 다가갈 수 없습니다. 이게 무지인데, 이 무지는 앞서 설명한 유용한 무지가 아니라 삶을 제약하는 무지입니다. 실상을 못 보게 만드는 것이니까. 그렇게 됐을 때 이제는 오류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지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어떤 것을 확인해보거나 정확하게 보려고 하지 않으면서 애증의 판단, ‘좋다’ ‘나쁘다’의 판단을 덧붙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식이라는 것이 내 신체로부터 떨어진 어떤 것이 되어서 나를 지배하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와 취가 나오게 되는 배경인 것이죠.

애는 증과 나란히 다닙니다. 좋아하는 것이 나로부터 떨어지기 시작할 때 삼독 가운데 하나인 치심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무엇인가를 가지려고 하는 것은 애착이죠. 애착은 탐심이고, 반대로 그것을 멀리하는 것이 진심이죠. 그런 반응의 양상들이 증폭되는 작용이 감정인데, 애취는 감정들이 작용하면서 대상들과의 관계를 증폭시킵니다. 즉 애착은 취착을 낳고, 취착은 여러 가지 대상들을 가지려고 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착에도 여러 단계가 있는데 정착, 고착, 집착 등이 있습니다. 정착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안정적으로 얻기 위해서 어디에 뿌리내리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움직이지 않으려 하게 되고 자연스레 실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정착한 그것을 ‘나의 것’으로 여기는 아소상(我所相)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다양한 종류의 착이 취착인 것이죠. 그 다음 취가 유를 만듭니다.

사실 무상한 것은 가질 수 없습니다. 가져봐야 떠나버리고, 망가지고 사라지는데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거꾸로 이것들은 존재하는 것이고, ‘있을 거야’라는 망상을 만듭니다. 결국 유라는 것은 무상한 것을 있다고 뒤집어서 생각하는 관념이 만드는 것입니다.

그 다음 유가 생을 만든다고 하는데, 이것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관점입니다. 세상이 끊임없이 생멸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존재하는 것은 생멸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멸이라는 것은 있던 것들이 없어지고, 없던 것들이 생겨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볼 때 죽음도 생성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유라는 것은 어느 순간 고정했을 때 계속 존재한다는 또 하나의 무지에 의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있지 않는 것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생겨나는 것은 전부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살고 있습니다. 즉 있는 것에서 생겨나고, 있는 것이 멸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와 생을 뒤집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라는 것은 생이 있고, 생이 있는 것들을 고정시켰을 때 발생하는 허구적인 관념입니다.

그럼 생멸이란 무엇일까요? 유가 무로 되고, 무가 유로 되는 운동입니다. 여기서 유와 무는 생멸이라는 현상의 두 극단을 표시하는 개념일 뿐입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이 순간에도 제 세포 가운데 어떤 것은 죽어가고, 새로운 것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만약 제 몸의 세포 가운데 어떤 것이 ‘나는 죽지 않을 거야’라고 애착과 집착으로 생을 지속하려고 한다면 그 세포는 암세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세포 동물인데, 세포 하나하나가 때가 되면 죽어줘야 합니다. 그렇게 죽으면 다른 세포들이 그 자리에서 좋은 영양소를 받고 살아나 신체를 갱신시킵니다. 그런데 특정 세포가 죽지 않고 그 자리에 있으려고 고집한다면 다른 세포들은 자라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다른 세포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암세포로 증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애착과 집착이 생명체 전체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생사는 언제나 같이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 없이 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죽음조차도 생의 일부로 다룰 수 있을 때 죽음도 생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은 죽음과 정반대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그러니까 늙는다는 것은 고통으로 가득찬 것이 되고, 그래서 인생은 고통이 가득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태어나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되어버리는 관념들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죠.

윤회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인데, 왜 사람들은 고통이라고 느끼고 끊어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생 자체가 고통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윤회가 고통의 영원성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죠. 그러나 고통은 이런 관념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관념이 사라지고 나면 윤회가 곧 해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는 것은 오는 대로, 가는 것은 가는대로 긍정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게 여여하게 긍정한다는 말 아닌가요?

있는 그대로 긍정하면 되는 것인데, 애착이 발생하면서 ‘가지 마’ ‘오지 마’를 만들게 되고, 이것이 고통으로 가득찬 삶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똑같은 삶을 살면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데 아주 행복하게 사는 사람과 아주 힘들게 사는 사람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제가  자연과학과 철학적 개념을 토대로 해석한 12연기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정리=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이 내용은 이진경 교수가 7월18일 대한불교진흥원에서 진행한 화요열린강좌에서 ‘12연기’를 주제로 강의한 것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402호 / 2017년 8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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