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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와 오직 하나만 아는 바보-상

바보는 옳다고 믿는 하나 위해 전부를 건다

▲ ‘당랑거철(螳螂拒轍)의 우(愚)’고윤숙 화가

어리석음, 지혜에 반대되는 말이다. 누구나 어리석음을 멀리 하고 지혜를 얻고자 한다.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불교 또한 지혜를 지칭하는 ‘반야’라는 별도의 핵심적인 개념이 있으니, 지혜를 추구한다 하겠다. 지혜를 위해 사람들은 대개 이런저런 지식을 얻고 여기저기 떠다니는 정보들을 모은다. ‘정확하고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다.

어리석은 자는 바보와 백치 두부류 있어
바보란 흔치않은 행적 찬사하는 말이거나
백치는 모든 것 받아들이는 ‘성인’ 가까워

그러나 똑똑한 사람이 일을 망치고 사태를 난감하게 만드는 경우를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이 보는가! ‘똑똑한 사람’이란 말이 많은 경우 ‘그 사람 조심해’라는 경고의 말로 사용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많이들 겪어서인지, 계산에 빠른 이들을 대하면 많은 이들이 ‘잔머리 굴리는 놈’이라고 거리를 둔다. 반대로 ‘바보’라는 말은 어리석은 행동이 사실은 사태를 풀어가는 옳은 길이었을 때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가령 ‘바보 노무현’은 그의 바보 같은 행동 때문에 생겨난 말이었지만, 사실 흔치 않은 그의 행적에 대한 애정과 경의를 표시하는 최고의 찬사였다.

루신은 똑똑한 자와 바보를 이런 맥락에서 대비한다. 주인이 환기도 되지 않는 집에 살게 한다고 불평하는 노예에게, 똑똑한 자는 그래도 참고 살면 결국 좋아질 거라고 조언한다. 나름 빠르게 계산해서 말해준 것일 게다. 반면 바보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무대포로 달려가 벽을 부수고 창을 내려 한다. 그게 어떤 결과를 야기할지 계산하지 않고, 눈치도 보지 않는 것이다. 당황한 노예는 동료들을 불러 바보를 쫓아내고 주인의 칭찬을 듣는다. 그러면서 좋아질 거라는 똑똑한 이의 선견지명에 감탄한다.

똑똑한 자가 바보이고, 바보가 똑똑한 자라는 역설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른다. 스파르타쿠스처럼 승산 없는 종말이 분명한데도 그게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해 우직하게 나아가는 자, ‘바보’라는 말에 딱 부합하는 이런 인물이 바로 고전적인 비극의 영웅이다. 비극의 영웅은 실은 모두 바보다. 지금도 그런 바보들은 많다. 노동조합법도, 근로기준법도 지키지 않는 엄혹한 시대에 자기 몸을 불살라 세상을 바꾸어보려던 ‘말도 안되는’ 바보짓을 한 전태일은 스스로 ‘바보’를 자처했었다. 패배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이 뻔한 도청건물에 미련한 대의(大義)와 작은 소총 하나 들고 들어갔던 광주항쟁의 마지막 시민들도 그랬다. 얼마 전에 강정에 가보니 이미 ‘완공’을 선언한 해군기지 앞에서 군대와 국가를 상대로 이길 수 없을 싸움을 십년 넘어 아직도 계속하고 있는 바보들이 있었다. 작은 카약 세 척으로 구축함에 저지하겠다고 덤벼드는, 당랑거철(螳螂拒轍)의 우(愚)를 반복하고 있는 바보들이.

그러나 어리석은 자에게도 두 가지 부류가 있다. 바보와 백치가 그것이다. 바보란 머릿속에 오직 옳다고 믿는 것 하나밖에 없어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계산도 하지 않고 어떻든 그걸 하려는 자다. 반면 백치(白癡)란 백지(白紙)처럼 머릿속이 텅 비어 누가 하자면 하자는 대로 하는 사람이다. 바보는 정직하여 옳다고 믿는 것을 난관에 개의치 않고 올곧게 실행하는 자다. 백치는 무구하여 옳고 그름의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이는 자다. 바보는 결과를 계산하지 않고 우직하게 나아가며 주어진 벽들을 돌파하려는 자다. 바보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최대한 끝까지 밀고 가는 자다. 백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에서 벗어난 것을 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자다. 감각이 전해주는 것, 몸이 전해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다. 전자가 돌파력을 강점으로 갖는다면, 후자는 포용력을 강점으로 갖는다.

이런 점에서 백치는 바보와 오히려 반대편에 있다고 해야 할 듯하다. 바보가 목숨을 걸고 한계를 넘어서는 서구적 영웅이라면 백치는 애써 구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싸안는 동양의 ‘성인’에 가까운 것 같다. 가령 장자는 “성인은 우둔하여 만년의 세월을 합쳐 하나로 하고 순수한 세계를 이룩한다”(‘장자 1’, 117)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성인은 세속적인 일에 종사하지 아니하며, 이익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해로움을 피하지 아니하며, 구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도를 억지로 따르지 아니하니, 말이 없지만 말이 있고, 말이 있지만 말함이 없어 세속 밖에서 노닌다."(‘장자 1’, 113)

약간 표현을 달리하면, 바보란 자신의 어떤 규정성에 충실하여 그것을 우직하게 밀고 나가기에 그 규정성마저 넘어버리는 자라면, 백치란 어떤 규정성도 없기에 모든 규정성을 가질 수 있는 자이다. 그렇기에 바보는 유위(有爲)를 통해 유위의 경계들을 넘어버린다면, 백치는 무위(無爲)를 행하기에 모든 유위마저 오는 대로 끌어안는다. 바보가 현행의 삶을 올곧게 따라감으로써 현행의 것을 넘어 잠재성의 지대로 넘어가는 자라면, 백치는 잠재성을 통해 수많은 현행의 삶을 긍정하는 자다.

이렇게 바보와 백치를 구별하고 보면, 많은 이들이 양자를 혼동하고 있음이 눈에 걸린다. 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명한 소설 ‘백치’의 주인공 미쉬킨은 스스로 ‘백치’라고 생각하며 남들 또한 종종 그렇게 비난한다. 그는 부드럽고 포용력 있는 인물이고, 귀족들의 사교계에서 흔히들 따르는 예절이나 통념과 부딪치고 싸우지 않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매이지도 않는다는 점에선 백치에 가깝다. 그래서 흔히 생각하고 있는 지점을 어느새 벗어난다. 가령 가브릴라는 나스타시야를 처음엔 사랑했고, 토즈키 공작과 예판친 장군의 후원을 받으며 결혼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가 토즈키의 정부였다는 사교계의 소문 때문에 주저하며, 토즈키가 주는 나스타시야의 지참금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란 생각에 자존심이 상해 망설인다. 이 때문에 그는 결국 나스타시야와 결혼하지 못하고 더없이 모욕적인 상황으로 떠밀려 간다. 똑똑한 짓을 하다 그로 인해 몰락하는 사람이다. 반면 미쉬킨은 사진 한 번 본 것만으로 나스타시야의 성품을 알아보고 사랑하게 된다. 여러 사람이 얽혀 있어서 접근하기 힘든 처지임에도, 또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음에도 모든 이의 예상에서 벗어나 나스타시야에게 진심으로 청혼한다. 솔직하며 자신을 이해해주는 선량한 마음을 알아본 나스타시야는 이런 미쉬킨을 좋아하지만, 이미 ‘더러워진’ 과거가 있는 자신에게 과분하다며, 돈을 바치며 돌진해오는 상인 로고진을 따라간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미쉬킨에게 가 있다. 이런 점에서 미쉬킨은 패배가 예정된 장소로 우직하게 밀고가는 비장한 영웅은 아니지만,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정직하게 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행하며, 그로 인해 사람들이 어느새 좋아하게 되는 인물이란 점에서 백치보다는 바보에 가깝다. 두 인물의 형상이 섞여 있는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02호 / 2017년 8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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