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명진 스님이 ‘민주투사·정의 사도’ 맞나

기자명 법보신문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조계종을 맹목적으로 비방하고 종단 승인 없이 사찰재산을 양도한 혐의 등으로 제적의 징계를 받은 명진 스님이 “자신의 복적을 위해 목사와 신부 등이 포함된 외부 인사들을 동원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이 8월8일 명진 스님을 비판하는 글을 보내왔다.

이병두 원장은 ‘황사영과 명진 스님의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라는 글을 통해 18세기말 조선의 천주교 박해에 대응해 ‘외국 군대를 동원해 달라’고 서양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가 발각돼 처형된 황사영의 일화를 소개하며 “황사영과 명진 스님은 외세를 끌어들여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는 점에서는 닮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원장은 “황사영은 외세를 불러들여 나라를 멸망시켜서라도 천주교를 보호하려 했지만, 명진 스님은 입으로는 정의를 말하지만 봉은사 주지에 대한 사욕이 없다고 보이지 않으며, 밖으로는 대단한 ‘민주투사와 정의의 사도’인 듯이 행동하며 대중을 이용하려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편집자

■ 황사영과 명진 스님의 비슷하지만 다른 점

사회 원로들까지 동원해
불교계 폄하한 명진 스님
서양 신부에 편지 보내
‘서양 군대로 조선 응징’
18세기 황사영과 닮은꼴
황사영이 천주교 보호라면
명진 스님은 사욕에 불과

1. 소년등고(少年登高)한 수재 황사영, 외세의 힘을 빌려 나라를 멸망시켜서라도 천주교도를 보호해달라고 간청하려다 발각되어 죽음을 맞다

황사영은 다산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으며, 1791년(정조 15) 17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하여 시험관을 놀라게 하였고, 정조 대왕이 직접 그의 손을 잡아주며 그 재능을 칭찬하였다. (그때 임금의 손, 어수(御手)가 닿았던 자신의 손을 비단으로 싸매고 다니던 그에게 장인 정약현이 비유로 일깨워주어 비단을 풀게 된 사연을 소설가 김훈이 장편소설 ‘흑산(黑山)’에서 잘 그려내었다.)

왕의 총애를 받는 수재였으니 관직으로 나아가게 되면 출세가 보장되었을 테지만, 처삼촌들-특히 정약종-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문하여 중국 출신의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를 받아 정식 교인이 되면서부터 인생이 바뀌어, 쫓기는 몸이 되었다.

정부의 탄압이 집요해지면서 자신을 옥죄어 오자 충청도 제천 봉양면 깊은 산골짜기 옹기장이 마을 배론(舟論)에 숨어들어 베이징의 주교인 서양 신부에게 ‘한국 천주교의 박해 실상’을 알리고 ‘응징’을 요구하는 편지, 이른바 ‘백서’를 썼다. 그러나 이 편지를 전달하기 전에 발각되어 1801년(辛酉) 11월5일(음력 9월29일)에 잡혀 서울로 압송되고 결국 12월10일(음력 11월5일)에 처형되었다.

그가 처형된 뒤 어머니는 거제도, 아내는 제주도 그리고 아들은 추자도로 귀양을 가게 되어 온 가정이 무너지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그의 편지에서 “외국 함대와 군인을 보내 조선 정부를 처벌해 달라”는 내용 등으로 해서 조선 정부와 지배층의 천주교에 대한 감정이 고조되어 정부의 천주교 탄압은 더욱 치밀‧엄격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의 편지-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에서 특히 문제가 됐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감히 바라옵건대 교황께 자세히 아뢰시어 이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일을 모두 쓰셔서 세계 각국에 알려 주님의 박애정신을 본받은 성교회(聖敎會)가 그 공동체 의식을 드러내어 죄인들을 간절한 희망이 채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이 나라(조선)의 병력은 본래 미약하고 모든 나라 가운데 맨 끝인데다가 태평세월이 200년을 계속해 왔으므로 백성들은 군대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위에는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로는 어진 신하가 없어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기만 한다면 흙더미처럼 무너지고 기왓장처럼 흩어질 것이나 그대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 만일 할 수 있다면 군함 수백 척과 정예군 5~6만명을 얻어 대포와 무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말도 잘하고 사리에도 밝은 중국선비 3~4명을 데리고 해안에 이르러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되 “우리는 서양의 전교(傳敎)하는 배요 여자와 재물을 탐내어 온 것이 아니고 교종(敎宗)의 명령을 받고 이 지역에 생령을 구원하러 온 것이니 귀국에서 한 사람의 정교사를 용납하여 기꺼이 받아들이신다면 우리는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도 없고 저대로 대포 한방이나 화살 하나 쏘지 않고 티끌하나 풀 한 포기 건드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영원한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는 북치고 춤추며 떠나 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천주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반드시 천주의 벌을 집행하고 죽어도 발길을 돌리지 않으리니 왕께선 한 사람을 받아들여 나라에 벌을 면하게 하시려는지 아니면 나라를 잃더라도 그 한사람을 받아들이지 아니 하실는지 그 어느 하나를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서양 여러 나라가 참된 천주를 흠승(欽承)하므로 오래 태평하고 길게 통치하는 결과를 동양 각국에 미치게 하리니 “서양선교사를 용납하여 맞아 드리는 것은 매우 유익하며 결코 해 받는 것이 없음”을 거듭 타이르면 반드시 온 나라가 놀라고 두려워 감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군함의 척(隻) 수와 군대의 인원수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은 숫자면 대단히 좋겠지만, 힘이 모자란다면 배 수십 척에 군인 5000~6000명이라도 족할 것입니다. 수년 전에 서양 상선 한 척이 이 나라에 표류하여 왔을 적에 한 교우(敎友)가 배에 올라 자세히 보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그 배 한 척이면 우리나라 전함 100척은 대적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

서양으로 말하면 성교(聖敎)의 본 고장으로 2000년 이래 모든 나라에 성교가 전파되어 귀화되지 않은 곳이 없는데 탄환(彈丸) 만한 이 나라만이 순종치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완강히 대항하여 성교를 잔인하게 박해하고 성직자를 학살하였습니다.

이런 것은 동양에서 200년 동안 없었던 일이니 군사를 일으켜 그 죄를 문책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거룩한 가르침에 의거하면, “선교를 용납하지 않는 자는 그 죄가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중하다 했으니 이 나라를 전멸(全滅)한다 해도 성교의 표양(表揚)에 해로울 것이 없을 진대 지금의 이 방법은 오직 명성과 기세를 크게 벌려 전교를 용납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상과 신앙의 자유가 없었던 시절을 만나, 황사영처럼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지식인이 처했던 시대 상황을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나라를 멸망시켜서라도 자신이 믿는 종교를 구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던 데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흔히 조선의 천주교 탄압이 악랄하다고 하지만, 유럽에서는 더욱 긴 세월 동안 훨씬 더 악랄한 사상과 신앙 탄압이 있었음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시대의 천주교 박해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와 비슷한 시기에 목숨을 잃은 다른 순교자들을 복자(福者)로 올리는 시복식(諡福式)에 황사영을 올리는 문제를 두고 한국 천주교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었고 결국 ‘국민 여론’을 고려해 시복자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던 것으로 안다.

2. 1980년대 민주투사 명진, 외부의 힘을 빌려 자신의 정치 입지를 강화하려 하다

이승만‧박정희를 이어 전두환과 노태우가 더욱 강력한 철권통치를 펼치던 1980년대에 천주교와 개신교뿐 아니라 불교계에서도 이에 맞서 ‘정의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온 몸을 불사르던 스님들이 있었다. 그 중에 명진 스님은 수많은 대중들을 휘어잡는 뛰어난 연설로 그 이름만 들어도 환호하는 이들이 많을 정도였다.

그의 이 연설 솜씨는 1994년도의 이른바 ‘조계종 개혁 불사’ 그리고 1998년 ‘정화개혁회의’와 총무원 사이의 분규 때에도 어김없이 발휘되어 대중들이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큰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던 그가, ‘지관 ↔ 정련’ 사이의 총무원장 선거에서 자신이 지지하던 정련 스님이 패하자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조계종을 떠나겠다” 선언하고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 본부장 소임 등을 내려놓고 떠났다. 그러나 자신이 인정할 수 없다던 지관 총무원장이 봉은사 주지 소임을 맡기자, 언제 그런 적이 있었느냐는 듯이 그 자리를 받았다. 이런 ‘조계종 승적 반납’ 소동은 그때 한 번이 아니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어떤 인물이나 조직과 결별하게 될 때도 있고 그 서운함과 섭섭함이 커지면 “저 놈이 언제 망하나?”하고 기대하거나 기원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머물러야지 그것에 집착하여 실제 행동에 옮기면 안 되는 것이다. 더욱이 출가 수행자를 자처하면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명진 스님은 그 도를 넘어섰다. 자신과 아무 인연도 없는 쌍계사의 중앙종회의원 자리를 차지해서 대중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고, 걸핏하면 불교계 안과 밖에 비난과 비방을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늘 “나만 옳다. 나는 정의의 투사이다”라며 억지 논리를 펼쳐 자신의 위선을 감추었다. 그러다 이런 방식으로 더 이상 효과를 볼 수 없게 되자, 이제는 과거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하던 이른바 ‘사회 원로’라는 이들을 동원해 그들로 하여금 불교를 능욕하는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사회 원로’라는 이들 가운데에는 천주교 사제와 개신교 목사도 여럿 포함되어 있어서 이들의 언행이 자칫하면 ‘종교 갈등’을 유발할 수 있을 터인데, 오로지 자신의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명진 스님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이들 중 천주교 사제들은 천주교 내의 부정과 비리에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이웃종교인 불교에는 내부 사정에까지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하면서 간섭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없다.)

3.황사영과 명진, 서로 닮은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

비록 외세를 불러들여 나라를 멸망시켜서라도 천주교를 보호해달라고 했지만 그래도 황사영은 자기 자신의 안일과 사욕(私慾‧邪慾)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명진 스님은 입으로는 정의를 말하지만 봉은사 주지에 대한 사욕이 없다고 보이지 않으며, 밖으로는 대단한 ‘민주투사와 정의의 사도’인 듯이 행동하며 대중을 이용하려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황사영과 명진 스님은 ‘외세를 끌어들여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는 점에서는 닮았지만, 아주 다른 인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명진 스님의 경우에는 봉은사 주지 시절 ‘1000일 기도’를 했다는 것을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보물[傳家寶刀]처럼 내세웠고, “내가 주지 재임을 했으면 다시 1000일 기도를 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100일 기도이든 1000일 기도이든 아니면 10000일 기도’이든 그것이 서울 강남의 큰 절 주지나 회주를 해야 할 수 있는 것이던가. 다 허물어져 가는 토굴에서 기도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옛 스님들의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큰 절 주지를 하면서 기도 성취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 이병두 원장
명진 스님에게 더욱 안타까운 점은, 새 정부가 들어선 뒤 자신이 마치 문 대통령이나 이른바 진보 그룹의 사회 원로들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그 상황을 이용(또는 활용)해서 불교 집안에서 자기 입지를 강화해보려는 삿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불교 집안 사정을 잘 모르고 있다는 약점을 이용해서 그들을 앞세워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몸부림으로 이해하는데, 과연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그가 입만 열면 비판(실상 그의 입에서는 정당한 비판의 말보다는 일방적인 비난과 비방만 나오지만)을 해대는 ‘정치권력과 불교 종권 세력의 유착(癒着)’ 사이에 조금도 차이가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1403호 / 2017년 8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