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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스님 하안거 해제 법어

  • 교계
  • 입력 2017.08.09 21:20
  • 수정 2017.08.09 21:39
  • 댓글 3
 

우리가 어떤 마음을 품고 세속을 떠나 출가 하고 가는 길, 그 길의 목표물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다고 하면 설사 그 길이 길고 험하더라도 매하지 않고 헐떡거리지 않고 꾸준히 목표물을 향해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목표물이 보이지 않으면 아무리 목표가 가까이 있어도 모르기 때문에 동으로 서로 앞으로 뒤로 부지런지 걷고 또 걸었지만 어디쯤 왔는지 알 수가 없다는 의심이 아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수행자가 도를 행하는 것도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길을 걸을 때 동으로 가는지 서로 가는지 찾아가는 목표물이 어디인지 확실히 알고 나서 나가게 되면 한 걸음 한 걸음 목표물에 가까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 의심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수행하는 목표는 무엇입니까? 자기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도를 깨닫기 위해서, 불법을 알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고 있는 불법이라고 하고 도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불법을 깨달았다고 하고 도를 터득했다고 하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물어본다면 이 같은 대화가 오고 갈 것입니다. 

“그런 것은 없다. 객관적으로 불법이니 진리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자네, 이런 말도 들어보지 못했는가.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마음 밖에 도가 없다, 마음 밖에 진리가 없다는 소리를 못 들었느냐?”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밖에 도가 없다고 한다면 마음이 곧 도이며 진리가 아닌가. 그런데 왜 동, 서, 남, 북 바깥으로 찾아 헤매고 있느냐?”

이 때 질문을 한 입장에서는 마음에 대해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무엇인가? 도, 진리니 이런 말은 제쳐두더라도 마음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봅시다.

깨달았다고 해서 특별한 마음이 오고,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그 마음이 멀리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아도 자기 마음이고 깨닫지 못해도 자기 마음인데 다만 깨닫고 깨닫지 못한 차이는 하늘과 땅처럼 달라집니다. 왜 그런가. 깨달은 사람은 여태까지 몰랐던 궁금하고 의심나는 일이 일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앉든 서든 말하든 움직이든 식사를 하든 무엇을 하더라도 의심이 없습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좋은 행을 하고 온갖 착한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바로 되고 있는지 마음속에 의심의 그림자가 가리고 있기 때문에 항상 답답합니다. 같이 식사를 해도 한쪽에서는 지극히 편안하게 차를 마시고 밥도 먹고 일도 하는데 다른 쪽은 똑같이 밥을 먹고 국도 마시고 일도 하고 있으면서 늘 마음이 답답하고 편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알고자 하는 근본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깨달은 자가 묻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도대체 무엇을 알고자 하는 것인가? 도니 진리니 그것은 객관적인 이름이고 마음밖에 도가 없다고 한다면 마음이 곧 도이고 진리이고 불법이 아닌가. 그렇다면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무엇을 마음이라고 하느냐?”

그 마음 하나를 깨닫기 위해서 선사를 찾아가 화두를 얻어서 화두를 간하고, 염불도 하고 기도도 하고 주력도 하고 관법도 하고 있습니다. 경전도 보고 책을 통해서 생각도 많이 합니다. 수행 방법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염불하라는 사람도 있고 주력하라는 사람도 있고 108참회니, 육바라밀 선행을 해야 된다는 등 갖가지 모습들이 있습니다. 갖가지 행이 틀린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옳은 일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얻어지는 결과는 무엇일까요. 무엇을 터득하기 위해 염불, 기도, 주력, 관법을 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수행을 해본 사람들은 주로 이렇게 되묻습니다.

“염불도 하고 기도도 하고 108참회도 하고 선행공덕도 지었는데 다 번거롭고, 안하면 안 되고, 답답하기는 여전한데 도대체 ‘선’은 무엇입니까? 혹자가 말하길 선은 최상승 근기들이 하는 것이지 중, 하 근기들은 선까지는 못하니까 복을 지어야 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선이 정말 상근기만 하는 것이고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요?”

그런데 선을 제대로 터득했다는 수행자를 찾아가면 “선처럼 수월한 것은 없다”고 답합니다. 물론 간화선이라고 하는 것은 간화를 통해서 선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묵조선이라는 방법도 있는데 묵조를 통해서 결국 선이 무엇이냐를 찾는 겁니다. 간화 하는 것이 선이 아니고 묵조 하는 것이 선이 아닙니다.

‘선가귀감’에 보면 서산대사께서, “선시불심(禪是佛心)”이라고 하셨습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그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설명해 놓은 말이라고 했습니다. ‘불심’은 개개인이 자기의 본연의 마음, 그것은 모든 망상, 분별, 온갖 산란한 생각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설사 선심이든 악심이든 일어나는 모습은 틀리지만 일어나는 한 자리, 근본의 마음을 불심이요 그것이 우리의 본래 주인공, 본래 면목이라고 하고 본래심이라고 하고 도라고 하고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누구나 본래심은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심을 떠나서 망상 분별을 하거나, 본래심을 떠나서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괴로워할 때 무엇인가 답답해 하거나 마음의 분별이 일어날 때 생각에 쫓아가지 말고 생각이 일어난 근원을 돌이켜봐야 합니다. 근원으로 돌아가는데에는 온갖 장애물이 많습니다. 장애물이라는 것은 감정, 욕심, 간단하게 말하면 마음을 흔들고 있는 산란심, 또 반대로 어두운 혼침입니다. 분석해서 말하면 팔만사천 번뇌망상이고 요약해서 말하면 산란심 아니면 혼침입니다. 산란심도 스스로 만든 것이고 혼침도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본래심은 산란심 이전이고 혼침 이전입니다. 본래심이 욕심, 감정, 산란심에 가려져 있다 보니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염불, 기도, 주력, 관법을 하는 것이지 염불, 기도, 주력, 관법 하는 것이 근본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를 깨달았다, 자기 마음을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다고 합시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깨쳤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는 솔직히, 거짓이 없이 가르쳐 줍니다. 나는 종소리 듣고 깨달았다. 또 다른 이는 목탁소리 듣고 깨달았다, 어떤 이는 시장 통에 장난하고 놀고 있는 그 소리 듣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장난하고 놀고 있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로 말미암아 깨달았다고 하면 장난하고 놀고 있는 그 소리가 무상법문이 될 것이 아닙니까. 무상법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소리를 듣고 깨달았다고 하면 그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물어봅시다. 지금까지는 종소리 듣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했는데 어떻게 갑자기 깨달았는가. 어제, 아래, 몇 년 전부터 수없이 듣고 있던 소리다. 그 때는 왜 깨닫지 못한 것인가?

“자네들도 목탁소리, 종소리 들리지 않는가?”
“네 들립니다.”
“자네들도 똑같이 귀에 소리 들리고 똑같이 눈으로 물체가 보이는데 보고 있고 듣고 있는 것일 뿐 마음속에는 온갖 생각을 품고 있다. 품고 있어도 소리는 들리고 물체도 보인다. 그렇지만 확실한 소리를 듣지 못하고 확실한 물체의 빛을 접하지 못할 것이다. 확실한 소리, 확실한 물체의 모습을 보려고 하면 그것을 보지 못하게 장애하고 있는, 마음속에 가려져 있는 것을 탁 털어버리면 된다. 털어버리면 저절로 진실한 소리요, 저절로 진실한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나도 자네들과 같이 고민도 하고 생각도 많이 했다. 아무리 찾아도 찾아도 찾아도 나오지 않았다. 애를 쓰면 쓸수록 머리가 아프고 상기가 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 없고, 그런 속에서 앞으로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고 물러서려 해도 물러설 수 없는 진퇴양난의 궁지에 빠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우두커니 조용히 앉아 있다가 새벽녘 예불 때가 되어서 종소리가 ‘쿵’ 하고 나니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놀란 것이다. ‘아, 내가 찾고 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왜? 종소리를 누가 알아차렸는가?”
“자신입니다.”
“자네들도 그렇지? 누구든지 똑같다. 그런데 똑같은 소리를 들으면서도 마음 속 온갖 생각을 품고 있다 보니까 같은 종소리를 들어도 ‘무엇이 시원하다는 말인가?’하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얼마 전만 해도 그랬다. 생각을 할 수도 없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갑자기 종소리가 나니까 종소리 밖에 없더라. 갑자기 놀란 그 상황이 시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깨달았다는 표현을 얻었다고도 하지만 실제로는 얻은 것이 없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마음인지 자네와 내가 이론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가 좌선을 한다고 가부좌를 틀고 벽을 향해서 눈을 뜨고 보고 있을 때 왜 내가 벽을 보고 있는가?”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일을 하고 있을 때 마음을 생각할 여유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벽만 보고 있으면 마음이 깨달아 지는가? 이제 모든 일손을 놓고 조용히 일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벽을 보고 있을 때를 한번 생각해보자. 이 때 ‘마음을 찾는다’라고 하는데 마음이 도대체 무엇인가. 벽을 보고 있을 때 어디에 마음이 있는가? 앞에 벽에 있는가? 마음을 자기라고 하는데 벽을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벽을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내가 지금 벽을 보고 있는 것이다. 종소리 날 때 종소리인줄 알고 종소리 듣고 있는 놈이 자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종소리는 있다가 없어지지만 듣고 있는 마음은 종소리가 났다고 해서 새로 생기는 일도 없고 종소리가 사라졌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소리가 나더라도 역력히 듣고 있다. 앞에 물체가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벽을 보고 있을 때에는 눈앞에 벽이 나타나지만 벽이 없어지더라도 내가 같이 없어지는 것은 아다. 상대가 오고 가는 것에 관계없이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이 마음은 생기지도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 마음이 벽을 대할 때, 도를 찾는다, 진리를 찾는다, 자기를 찾는다는 생각들이 마음속을 가리게 되면 밖에 소리가 나더라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앞에 물체가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아도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기진맥진해 있을 때 내 눈에 들어오지 않던 물체가 모든 생각을 놓자마자 물체도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오고 소리도 순간적으로 들린다. 그래서 선사들은 마음을 비우라, 생각을 버리라,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마라,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마음속에 들어온다고 말한 것이다. 소리도, 물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일단 자기 마음부터 먼저 확인해야 한다.
이전에는 벽을 보고 있을 때 온갖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지 않았는가. 마음속에서 마음을 찾으면 어떻게 되느냐,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속에 있는 줄 모르고 물을 찾고 있는 것과 같다. 만일 깨닫지 못해도 자기 마음이다. 같은 마음이라도 하나는 가리고 있고 하나는 가린 것이 사라진 것이다. 사라지면 환하게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선은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외우는 것도 아니고 조작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눈 뜨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저절로 소리가 나면 소리를 듣고 있고 앞에 물체가 있으면 저절로 보인다.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 내가 찾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며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내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냐. 자연스럽게 저절로 보이고 저절로 들린다. 그래서 선처럼 수월한 방법이 없다. 다른 것은 외워야 하고 관해야 하고 움직여야 하는데 비해 선은 눈 뜨고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지켜보면 된다.”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까? 깨달아야지요.”
“나는 이미 깨달았다. 보고 있는 놈이 내 마음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이상 무엇을 더 찾느냐. 나도 자네처럼 이전까지만 해도 천번 만번 찾고 또 찾았지만 알고 보니 보고 있는 놈이 내 마음인 줄 이제 내가 확인했다. 종소리가 나면 종소리인줄 아는 놈이 내 마음인 줄 알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벽을 가만히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자네들도 벽을 보라.”
“보입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묻습니다.

“벽이 보이는가?”
“벽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 나도 이전에는 너희들과 같이 마음속에서 온갖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환상이고 망상이고 번뇌다. 탁 털어버리면 저절로 보이지 않는가. 이것이 쉬운 것 같아도, 눈만 뜨면 이것처럼 쉬운 방법이 없지만, 그것이 5분, 10분 장시간 지켜봐지지 않는다. 금방 졸리거나 온갖 생각이 일어나니까 목전에 보이던 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이 혼침과 산란이다. 심한 사람은 정신 바짝 차리고 눈 부릅뜨며 지켜보라고 했고 여기까지 도달하기 힘든 사람은 염불도 하고 주력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생각 없이 정신 차리고 보고 있으면 된다.”
“이것을 언제까지 해야 됩니까?”
“어느 시기에 가면 지켜볼 필요도 없다. 지켜본다고 해서 자기 마음이고 지켜보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 마음이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근기의 차이가 있다. 지켜보지 않으면 온갖 망상에 사로잡히고 온갖 혼침에 빠지기 때문에 그것을 녹이고 초월하기 위해서 뚜렷하게, 목전에 소소영영하게 지켜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자네 공부가 어느 단계까지 왔는지 짐작해보라.”

‘선가귀감’에는 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알지 못하고 수행하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마음을 알고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고 주력을 하고 선행공덕을 지으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마음에 도사리고 있던 혼침과 산란심이 녹는다는 뜻입니다. 자꾸 졸리니까 “일을 하라”, 가만히 있으면 쓸데없는 생각을 하니까 “집중하라”고 가르쳐 준 것일 뿐입니다. 그 이외에는 특별한 법이 없습니다.

옛 선사들도 첫째 마음을 깨닫고, 마음을 깨닫고 난 후 혼침과 산란이 심한 사람은 적절한 방법으로, 그것이 필요 없는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배고플 때 밥 먹고 목마를 때 물 마시고 피곤할 때 쉬어라, 그래서 불법은 특별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각자 이렇게 점검을 해보면 목표물을 봤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성을 요달한 사람은 목표물을 봤기 때문에 일체 의심이 없습니다. 괴로운 일이나 몸에 병이 나거나 고민에 사로잡히는 의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근본을 알지 못하지 때문에 뭔가 불안한 것이, 이렇게 살다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의 근본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란 의심의 뿌리가 없어진 것입니다. 설사 삼악도에 빠지고 고통 속에 묻히더라도 그대로 해탈이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짤막하게 ‘임제록’ 한 구절을 읽어드리고 내려가겠습니다.

임제 선사께서,
“여러 곳에서 온갖 수행자들이 찾아오는데, 나는 그런 사람을 세 가지로 구분해서 상대를 한다. 말하자면 중하근기 자가 오게 되면 만 가지 경계에는 실체가 없다, 모두 보고 듣는 데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고 하면서 빼앗아버린다. 그리고 자기가 보고 있는 본분을 돌이켜 보라, 자기 본분을 확인하라고 격려해준다.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간 중상근기 자가 오게 되면 만 가지 경계는 말할 것도 없고, 모처럼 애를 써서 노력해서 터득한 근본 자리를 잡고 있지 않는가, 그것도 빼앗아 버린다. 깨달음이 소중하지만 깨달음에 사로 잡혀 있어도 안 된다. 그 다음, 만일 상상근기 자가 오게 되면 만 가지 경계도, 자기 본분도, 거기서 활약하고 있는 의지함이 없는 도인 그대로 상대해준다. 다시 이 세 가지 근기를 훨씬 뛰어 넘은 사람이 오게 되면 나는 있는 그대로 상대한다.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고 특별한 마음 준비를 하지 않는다. 너희들이 이 자리에 이르게 되면 수행자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 힘을 발휘하고, 스승과 제자 간에 빈틈이 없이, 번갯불과 같이 재빨리 주고받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눈을 두리번거리면 벌써 틀렸다. 마음에 뭔가 생각을 일으켰다면 벌써 어긋났고 생각을 움직였다고 하면 벌써 빗나간 것이다. 이 점이 납득이 되었다면 의지함이 없는 도인은 항상 내 눈앞에 살아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내용은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스님이 8월6일 불기 2561년 부산 범어사 하안거 해제법회에서 설한 법어를 정리한 것입니다.
 

[1403호 / 2017년 8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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