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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글을 쓰게 된 인연 ①

“직접 쓴 불서 500여권은 빈승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 성운대사의 출가 75년을 기념해 봉행된 ‘백년불연’출판기념회. 대만 불광산 제공

"글쓰기는 줄곧 저와 함께 했습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하늘의 별과 달, 햇살을 보면 노래 가사가 생각났고 꽃과 나무를 보면 찬탄하고 싶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중생과 생명을 언급하다보면 모두가 친족이고 벗이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빈승이 썼던 많은 글들이 인간세상과 사회와 불교에 무슨 기여를 하였는지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저의 생명시간으로 보면 누적된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빈승이 글을 쓰게 된 인연을 되돌아보면 가히 쓰고 맵고 시고 달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지금은 제가 글을 쓰는 소재가 광범위하고 내용이 풍부하며 시가, 산문, 소설 등 여러 형태의 문장을 쓰고 있다고 찬탄하는 사람들이 있고 제자들의 통계에 따르면 출판된 책이 500여권에 달하고 글자로는 삼천만자에 달하며 수십여 종류의 각기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저작들은 모두 저의 생명입니다.

불법(佛法)에 사람의 생명은 “좌우시방, 과거와 현재 미래로 두루 이어진다(豎窮三際 橫遍十方)”고 하였지만 그것은 이론적인 것입니다. 현상적으로 생명의 의미를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잔을 주고받는데 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색과 횡재를 좇는데 두는 사람이 있으며 권력을 탐하는 정치판에 두는 사람이 있고 계략으로 부귀영화를 노리는데 의미를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명을 어디에 투자하느냐에 따라서 성과 역시 그곳에 있게 됩니다. 수천만 개의 문자가 인간세상과 사회와 불교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저의 생명시간에 누적된 성과입니다.

물론 학교를 다니지 않았고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고 폐쇄적인 사찰에서 생활하여 별다른 사회경험이 없는 사람으로 단지 독서와 상상에 의해서 글을 쓰다 보니 많은 한계가 있었지만 그래도 글쓰기는 줄곧 저와 함께 하였습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하늘의 별과 달, 햇살을 보면 노래가사가 생각났고 꽃과 나무를 보면 찬탄하고 싶었으며 산하대지를 말하다보면 생명과 함께 한다는 생각이 났고 수없이 많은 중생을 언급하다보면 모두가 친족이고 벗이었습니다. “대자연이 나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네(大塊假我以文章)”라는 당대 이백(李白)의 말처럼 세상의 사람에 대한 분별이나 중생에 대한 분별, 인간관계의 시시비비와 좋고 나쁨 등등이 모두 우리들의 글쓰기 소재가 아닐까 합니다.

‘글쓰기’를 처음 배울 때는 너무 높은 경지이기에 쉽게 다가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저는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소년시절 한 친구가 자신은 앞으로 책을 두권 쓸 거라고 하는 말을 듣고 저는 마음속으로 그 친구가 정말 대단하다고 합장하며 숭배하였습니다. 지금 그 친구의 책 두 권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빈승에게 무의식중에 인연이 되어주었기에 현재 최소한 200권 이상의 책을 쓰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글을 써보려고 하였을 때 마음으로 겪었던 잊기 힘든 난관이 있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어느 때인가 한번은 작문수업에서 강사 스님이 “보리무법으로 반야론을 바로 드러내라(以菩提無法直顯般若論)”는 제목을 주면서 글을 써서 내라고 하셨는데 당시에는 제목조차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주 열심히 써서 여러 장을 냈습니다. 강사 스님은 모든 글을 다 읽어보고 돌려주셨는데 평가 란에 “꾀꼬리 두 마리가 버들가지에서 지저귀고 백로가 한 줄로 하늘을 날아간다(兩隻黃鸝鳴翠柳 一行白鷺上青天)”라는 시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를 본 동기들이 “강사 스님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뜻”이라며 놀렸습니다.

그 다음번 작문수업의 제목은 ‘고향’이었는데 저는 진지하게 문장을 구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서 제출하기 전에 읽고 또 읽어보았는데 만족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며칠 후 돌려받아보니 “남의 보물을 세어주는 사람처럼 자기 것은 반 푼도 없구나”라는 강사 스님의 평가 두 마디가 적혀 있었습니다.

공부를 시작한 사람이 글을 잘 쓰면 선생님은 남의 것을 베꼈다고 하고, 글을 잘 쓰지 못하면 말이 안 되는 글이라며 탓하십니다. 어린 아동들이 이러한 좌절을 겪게 되면 기가 죽어서 나중에는 포기할 수 있고 미래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빈승의 성격은 마치 가죽공과도 같아서 누군가 내려 누르면 튕겨 오릅니다. 그래서 저는 시작에서 강사 스님들의 야단과 훈계를 겪으면서 고전분투의 과정을 지나면서 아름다운 앞날을 보게 되었습니다.

18~19세 이후 저는 당시 전국 최고로 평가받는 불학원인 ‘쟈오산불학원(焦山佛學院)’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동기들과 선배들은 하나같이 어려운 과정을 거쳐 뽑힌 인재들이어서 재능이 아주 뛰어났습니다. 저는 지고 싶지 않아서 더욱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쟈오산은 양자강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서 저녁나절이 되면 저는 썰물로 드러난 모랫길을 자주 산책하였는데 몇 리 길을 걸으면서 왕발(王勃 : 당대 유명 문장가. 역자 주)이 지은 ‘등왕각서(滕王閣序)’라는 글에서 ‘노을은 외로운 오리와 나란히 날고, 가을 강물은 드넓은 하늘과 같은 빛이네(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라는 내용을 수없이 읽으면서 아름다움을 마음깊이 느꼈습니다. 이러한 심경에 부합되어 글이라고 말할 수 없는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운이 좋아서 투고를 하면 다 실어주어서 “나도 할 수 있네, 나도 쓰면 되네!”하고 자신감도 많이 생겼습니다.

글이란 대개 ‘자기의 견해를 표현하고자 쓰는 것’이니 이 인연으로 저는 남경대도살 때 희생당한 부친이 생각났습니다. 당시는 이미 부친을 여러 해 동안 뵙지 못했고 소식도 알 수 없어서 고아가 된 저는 가슴속 그리움을 ‘부칠 수 없는 편지 한통’이라는 글로 써서 부친을 기렸습니다. 당시 국문강사였던 성박(聖璞) 스님은 이 글을 저 몰래 직접 원고지에 옮겨 쓰고 우편으로 ‘진장(鎮江) 신강소보(新江蘇報)’에 기고하였는데 5000자의 글이 상하 2편으로 나누어 이틀간 실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사 스님은 이 문장을 수업시간 두 번에 걸쳐 학생들에게 읽어주면서 동시에 제 문장의 내용과 기법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나중에 평가 란에 “목석같은 사람이라도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구나”라고 쓰셨습니다. 신문사에서 실어주지 않으면 제가 낙담하고 기가 죽을까하는 염려에서 스님은 몰래 기고를 하신 것이라서 신문에 글이 실리자 기쁜 마음에 학생들에게 읽어주면서 널리 알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비와 보살핌은 지금껏 저를 감동하게 하고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빈승은 격려가 질책보다 더욱 힘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45년 8월, 어느 토요일 작문시간에 성박 스님은 “승리의 소식에서 불교도는 어떠한 자각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을 주셨습니다. 저는 승리의 소식에서만 자각을 할 것이 아니라 실패를 했을 때에도 자각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인생에서는 어떤 때를 막론하고 자각을 하고 있어야 하며 자각을 해야만 발전하고 자각을 해야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비록 빈궁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있는 힘껏 거슬러 오르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진장지역에 갑자기 많은 신문이 발행되었고 사회도 활기차게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단지 학생이고 특히나 출가인 인데 사회에 무슨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자문했습니다. 저는 글을 쓰는 것이라는 해답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폐를 본 적이 없지만 신문이나 잡지, 서적과 문장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들었기에 ‘지폐여행기’라는 글을 썼습니다. 비록 절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고 현실세계에서 삶의 전쟁 역시 잘 몰랐지만 우리 절 안에 있는 고양이가 쥐를 잡는 모습을 보고 감정이 북받쳐서 ‘평등 속의 희생자’라는 글을 써서 작은 생명을 대신하여 불공평함을 호소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글들이 모두 발표되었는데 그 당시 인연공덕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20세가 된 이후에도 많은 좌절을 겪었습니다. 저는 선배인 지용(智勇) 스님과 함께 월간지 ‘노도(怒濤)’를 만들었는데 옛말에 ‘말 옆에서 잠깐 기다리는 사이에 장편의 글을 써낸다(下筆千言 倚馬可待)’는 말처럼 글재주가 뛰어난 지용 스님은 긴 문장을 항상 쉽고 빠르게 써냈습니다. 월간지 ‘노도’의 대부분 원고는 모두 그 스님이 썼습니다. 저는 갑자기 열등감을 느꼈고 그 스님만 못한 것이 부끄럽게 생각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지용 스님이 저에게 글을 쓰라고 하면 저는 “스님이 쓰세요!”라고 말했고 저에게 평론을 쓰라고 하면 “스님이 대신 쓰세요!”라고 하면서 스님 앞에서는 글을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본래는 함께 공동으로 월간지 ‘노도’를 만들기로 의기투합하여 불교를 위해 미래의 새로운 풍조를 세워나가고자 하였으나 그 스님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느끼니 부끄럽게 생각되었습니다. 추태를 보일 수 없다는 생각에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노도’ 18호를 발간한 후 남경 화장사에서 새로운 불교를 위해 혁신운동을 시작하였고 나중에 저는 대만으로 건너왔습니다.

지용 스님과 헤어지고 난 이후 문장을 쓰는데 부담이 없어지니 저는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았습니다. 특히 방부를 들인 중리(中壢) 원광사(圓光寺)에서는 마침 대만불학원 졸업식을 거행하려던 때였습니다. 창설자인 묘과(妙果) 노스님은 저에게 졸업기념 책자에 실을 ‘회고와 전망’이라는 글을 대신 써달라고 하셨습니다. 방부를 받아 주신 노스님께 보답하고자 저는 빠르게 글을 완성하였습니다.

문장을 읽어 보신 후 대만출신으로 한문학에 조예가 깊지 않은 노스님은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교무주임 원명 스님에게 문장을 보여주면서 “누가 쓴 글 같으냐?” 하고 물으셨는데 글을 읽은 원명 스님은 진지하게 “동초(東初) 스님이 쓰신 글이 맞을 것 같아요”라고 답했습니다. 노 스님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아주 좋아하셨는데 당시 23세의 제가 60~70세 고령인 당신의 교육이념을 대신 써낼 수 있었고 더구나 덕망이 높은 동초 큰스님과 비교되니 노 스님은 더욱 저를 아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를 법운사로 보내서 대신 산림을 돌보게 하셨고 먀오리(苗栗) 객가촌 마을로 저를 데리고 전법을 가셨습니다. 특히 노스님은 당시 신주현(新竹縣) 불교회 회장으로 ‘먀오리’ 지역과 ‘타오웬(桃園)’ 지역을 관할하고 계셨는데 저는 노스님의 비서처럼 지역의 불교문건을 대신하여 처리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업무도 그리 바쁘지 않았던 젊은 시절로 일거리가 있었으면 하였지만 원주도 아니었고 지객의 소임도 달리 맡고 있지 않았기에 절에서 아침 저녁 예불 외에는 하는 일이 없어서 타이베이에서 발행하는 ‘금일청년’ ‘금일불교’에 글을 기고하였습니다. 나중에 불교에 ‘각생(覺生)’ ‘각군(覺群)’ ‘보리수’ ‘인생’ 등의 잡지가 생겨나면서 저의 활동마당도 더욱 확대됐다는 생각에서 이 마당에 끊임없이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 당시는 이익을 도모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고 단지 자기의 문장이 활자화되어 인쇄되다 보니 보기에도 좋아서 산해진미 음식을 먹는 것보다 더 기뻤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403호 / 2017년 8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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