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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력 콤플렉스

“지옥을 체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극락이 보입니다”

2010년부터 현재까지 약 7년 반 조금 더 되는 세월 동안, 우리나라 불교학계에서 정토학을 어떻게 해왔는지에 대해서 조금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목록조사를 다 마쳤고, 그중에서 우선 중요한 것들, 흥미가 가는 것들 위주로 몇 편의 논문을 읽었습니다.

학계도 타력 부정하는 풍토
불교는 자력이자 타력 종교
정토문 부처님 의지해 성불
아미타불 본원력 믿음 중요
타력 콤플렉스에 빠져서는
‘어둠의 자식들’은 못 도와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타력에 대해서 어떤 콤플렉스를 연구자가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애써서, 그 타력의 세계 속으로 끌려들어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분들에게는 그 타력의 세계라는 것은, 저 콜럼버스 이전의 시대에 가졌던 관념, 즉 저 바다 끝으로 가면 수평선 다음에는 급전직하하는 낭떠러지가 있다, 거기에까지 흘러가서는 아니 된다는 느낌이라 할까요?

그 점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토진종에서는 심하다고 느낄 만큼, 그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아직 자력이 남아있다.”

아니, 자력이 남아 있다니? 그래서 무슨 문제라는 말인가? 당연히 자력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 선생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책을 쓰는 세 가지 목적 중에 하나로서, 자력과 타력의 관계를 새롭게 한번 생각해 보겠다는 것을 들고 있었습니다. 야나기 선생 나름대로, 자력과 타력의 관계라고 할까요? 그런 문제에 하나의 새로운 대답을 제시하고 싶어서 이 책 ‘나무아미타불’을 쓴 것이라는 이야기를 책 앞머리의 ‘취지’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먼저 ‘타력’이라는 말이 언제 어떤 입장에서 생겼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불교사상 내지 불교의 가르침 전체를 크게 구분하면서, 어떤 가치평가를 하고 가치의 우열을 매기는 작업을 우리는 교판(敎判)이라 불러왔습니다. 그러한 교판에 따라서 종파가 나뉜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정토불교에서도 그런 교판을 여럿 제시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셋입니다. 첫째는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입니다. 용수의 ‘십주비바사론’이라는 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난행도는 육로를 가는 것에 비유하고, 이행도는 수로를 가는 것에 비유합니다. 그 옛날에는 배 타고 가는 것이 편했습니다. 정토불교는 이행도고, 다른 불교는 다 난행도라고 한 것입니다.

둘째가 바로 자력도(自力道)와 타력도(他力道)입니다. 이는 중국의 담란(曇鸞) 스님이 내린 교판입니다. 담란 스님은 원래는 공사상을 전공하였습니다만, 나중에는 정토불교에 귀의합니다. 천친의 ‘정토론’에 대한 주석서 2권을 남깁니다. ‘정토론주’, 혹은 ‘왕생론주’라고 합니다. 그 책 안에서 타력이라는 말을 씁니다. 정토불교가 타력도라는 것은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지하여서 왕생하고 성불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자력이 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이라고 겨우 입으로 염불하는 정도를 가지고 자력이라 말하고, 그 정도로 노력한다면 정토신앙도 자력과 타력의 융합이 아닌가라고 하는 관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힘의 근본, 즉 근본적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셋째,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입니다. 이는 담란의 제자이자 선도(善導)의 스승인 도작(道綽)의 말입니다. ‘안락집’에 나옵니다. 이분은 원래 ‘열반경’을 전공했습니다만, 나중에 정토로 귀의하였다고 합니다. 성도문은 스스로의 힘으로 노력해서 성인이 되는 길이라는 뜻이겠습니다.

이행도라고 하든, 타력도라고 하든, 정토문이라고 하든 다 같은 내용을 가리킵니다.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지하여 왕생하고 성불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서원이 없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왕생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므로 자력이 아니라 타력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타력, 타력 할까요?

정토진종의 입장에서 볼 때는, 100% 믿어야 하는데, 믿는 힘으로 왕생하는데, 우리의 믿는 힘이 약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미치는 아미타불 본원의 힘 역시 같은 비율로 약해지는 것인데, 어찌 1%라도 자력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하나는 본원에 대한 믿는 힘이 100%인 만큼, 스스로에 대해서는 믿는 힘이 0%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운전을 배워본 일이 없습니다. 운전면허가 없습니다. 운전을 처음부터 안 배울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들 어렸을 적에 놀이공원에 가서 자동차를 함께 탔는데, 제가 사고를 내서 아들이 입술에 피를 흘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저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남은 믿더라도,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것은 믿더라도 저는 저 자신에 대해서는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력도를 안 가고 타력도를 갑니다. 지금 운전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볼 때 우리 속에서 어둠이 보이는 사람들은 자력도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늘 구파발 전철역에서 이런 의미를 노래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시를 한 편 발견했습니다. 바로 정진규 시인의 시 ‘별’입니다. 스크린 도어에 적혀 있더군요.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저 같으면, 아니 우리 정토문에서는 마지막 한 구절은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대낮인 사람도 있다고 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성불하는 분들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선을 해서 견성성불하는 것, 그 이상 더 좋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나의 경우에는 그것이 어렵겠다는 절망감, 그 어둠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염불, 아니 어깨에 힘 빠진 채 기어들어오는 집이 정토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둠은 지옥입니다. 번뇌와 윤회입니다. 그러한 지옥 속에서야말로, 그런 지옥을 체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극락이 보입니다. 극락을 구합니다. 그래서 극락이 없다는 사람도 참으로 부럽습니다. 얼마나 극락이면 극락이 다 없겠습니까. 극락이 없어도 된다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아직 어둠 속에 헤매고 있어서, 빛을 그리워하고 극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 극락과 빛의 세계를 정진규 시인의 시에서는 ‘별’이라 했습니다. 물론, 시인은 스스로 정토신앙을 갖고 있어서 이런 시를 쓴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 정토문의 사람들에게는 이 시가 그렇게 읽힙니다.

저의 희망은 타력신앙 역시 바로 이 ‘어둠의 자식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모든 불교가 다 방편입니다)임을 손쉽게 인정하고서, 그런 다음에 나는 그런 길은 해당되지 않는다. 나는 빛이다. 이렇게 선언하는 것이 차라리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타력 콤플렉스’에 차있다고 한다면, 정작 그 타력밖에는 길이 없는, 타력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lokavid48@daum.net
 

[1404호 / 2017년 8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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