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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전후소장사리, 우리나라 진신사리의 근원을 찾다

기자명 주수완

중국 오대산서 문수보살에게 받아온 사리, 곳곳으로 나퉈

▲ 양산 통도사 적멸보궁은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불상을 대신하므로 적멸보궁 안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았다. 진신사리가 곧 부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탑상편 중에서 ‘전후소장사리’ 기사는 매우 길고 내용도 복잡하다. 더구나 번역서에서는 제목을 보통은 쉽게 한글로 풀어쓰지만, 이 기사만큼은 제목 자체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전후소장사리’라는 한자 제목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진신사리 계보는
신라 자장율사로부터 비롯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두골·어금니사리 등 100과

황룡사·통도사·태화사 등
3곳에 공식적으로 봉안

제석천이 가지고 있던 사리
고려에 전해진 기록도 있어

조선초 수백과에 이르던 사리
명나라 사신이 싹쓸이 해가

국내 대부분의 진신사리는
통도사에서 분신한 사리들

우선 제목부터 풀어보자면 ‘앞서 그리고 그 다음에 소장된 사리’ 정도로 풀이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풀이될 것이라면 ‘전(前)’ 대신에 ‘선(先)’이 더 적합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든다. 대신 ‘전후’라는 한자는 ‘앞뒤’라는 뜻과 함께 “전후사정을 말해봐라” 할 때처럼 어떤 일의 인과관계나 시말, 즉 내력이나 정황을 뜻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전후소장사리’는 우리나라에 진신사리, 즉 석가모니의 사리로서 전해지고 있는 사리들의 소장경위와 그 이력을 정리했다는 뜻으로 보아도 큰 문제는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어떤 사리들이 진신사리로서 인정되었을까? 가장 대표적인 진신사리 계보는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의 문수보살로부터 직접 받아온 사리이다. ‘전후소장사리’에서는 두골사리, 어금니, 그 외 100과의 사리라고 하였으니 그 양이 엄청나다. 자장율사는 이 사리들을 각각 황룡사, 통도사, 태화사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이 세 사찰은 자장율사께서 공식적으로 봉안하신 곳이고, 비공식적으로는 여분의 사리를 더 남겨두었다가 뜻 깊은 곳에 절을 세워 그곳에 추가적으로 봉안하셨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대산 상대 적멸보궁, 정선 정암사 등인데, 이곳은 모두 자장율사께서 수행을 하시던 곳이다.

▲ 양주 회암사 사리탑. 세조연간에 회암사에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동안 사리분신이 일어나 수백과의 사리로 늘어났다고 한다.

‘전후소장사리’에 의하면 진신사리를 모신 황룡사 9층목탑이 953년에 화재를 당했는데, 이때 통도사의 진신사리탑 동쪽에 큰 반점이 생겼다고 한다. 즉 이들 사리들은 나누어 봉안했더라도 하나의 몸처럼 서로 연동되어있어서 황룡사 목탑에 화재가 나자 마치 통도사 사리탑도 불이 붙은 것처럼 동쪽이 불에 그슬려서 반점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마도 황룡사 목탑의 동쪽에 불이 붙었기 때문에 통도사 사리탑도 똑같이 동쪽이 그슬렸다는 이야기인 듯하다.

더불어 고려 어느 시절에 관리들이 통도사에 와서 사리탑의 솥처럼 생긴 덮개돌을 열어 진신사리를 보고자 했는데, 어떤 이는 그 안에 큰 구렁이가 있는 것을 보았고, 또 어떤 이는 큰 두꺼비를 보았을 뿐, 사리는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인도나 중앙아시아에서는 진신사리를 중요한 때에 탑에서 꺼내어 도시나 마을을 돌며 사람들에게 보이고 공양을 받는 의식이 있었고, 중국에서도 때때로 필요에 때라 사리를 탑에서 꺼내어 황실에서 친견하고 법회를 열고는 했다. 그러나 통도사 사리탑의 경우는 비공식적으로 호기심 많은 관리들이 열어 보았을 뿐이었고, 그러한 행위가 부정한 행위로 간주되었던지 사리 대신 구렁이나 두꺼비만 보았다는 뜻으로 보인다.

일연 스님이 접한 보다 정확한 기록은 1235년에 김이생과 유석이라는 인물이 진신사리 친견을 위하여 덮개돌을 열어보고자 통도사 스님들께 청하니 스님들이 난처해하면서 마지못해 열도록 해주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제로 석함 안의 유리병 안에 사리 4과가 들어있었다고 하였다. 다만 이 유리병에 금이 가 있어서 유석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통에 사리를 옮겨 담아 다시 원위치 시켰다는 내용이다.

▲ 사명대사가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왜군으로부터 되찾아와 건봉사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도 적멸보궁이 있다. 사진은 보물 1336호 건봉사 능파교.

상식적으로는 자장율사께서 100여점의 사리를 가지고 오셨고 이를 세 등분하여 봉안하였기 때문에 대략 30여점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겨우 4점이 있는 것에 대해 일연 스님은 사리들이 때로는 신비로운 힘에 의해 합쳐지기도 하고, 나뉘기도 하므로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실제 원나라에서도 통도사 진신사리를 친견하려고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그중에 사리탑을 열어본 사람들에 의하면 진신사리 이외에 ‘변신(變身)’ 사리도 있어서 이것이 모래알처럼 부서져 때로는 사리탑 바깥으로까지 향을 풍기며 흘러나왔다고 한다.

일연 스님께서 언급한 변신사리란 무엇일까? 진신사리에 대응하는 어떤 개념일 것 같은데 아마도 진신사리가 모습을 변화하여 나툰 분신사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나 예를 들어 조선 세조연간에는 양주 회암사에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분신하여 800여과로 되었다가 추가적으로 또 분신하여 400여과 더 생겨 이중의 일부를 원각사탑에 모셨다는 기록도 있다.

두 번째로 일연 스님이 소개한 사리는 신라 문성왕 851년에 당에 다녀온 원홍(元弘)이 들여온 어금니사리와 고려 예종 1119년에 북송에 다녀온 정극영(鄭克永), 이지미(李之美) 등이 모셔온 어금니사리다. 이중에 원홍이 들여온 사리는 일연 스님 당시에는 소재를 알 수 없었고, 정극영 등이 가져온 사리는 왕실 내전에서 보관되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어 이 어금니사리의 내력이 상세하게 기술된다.

이 어금니사리의 연원은 신라 의상 스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의상 스님께서 당나라 지상사 지엄 스님 문하에서 배우고 있을 때 인근에는 도선율사가 머물며 때때로 하늘의 제석천으로부터 공양을 받았다. 한번은 의상 스님도 초대를 받아 갔는데, 그날은 제석천이 내려오지 않아 도선율사께서 체면이 조금 깎이셨던 모양이다. 의상 스님이 가고 다음날 다시 천신이 내려왔을 때 까닭을 물어보니 의상 스님을 호위하는 신병들이 많아 감히 들어오질 못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의상 스님은 도선율사에게 부탁하길 제석천의 천궁에는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있으니 이를 인간세계로 내려 보내달라 청해보라고 하였다. 이에 제석천은 어금니사리를 7일을 기한으로 빌려주었으며, 이를 당나라 궁궐에 모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 석가모니의 고향에 세워진 피프라와 대탑에서 발견된 사리. 뉴델리 박물관 소장. 이 탑은 석가열반 후 바로 세워진 근본 8탑 중의 하나로 생각되어 이 사리야말로 진신사리로서 강력히 추정되고 있다.

바로 이 어금니사리가 고려 예종 때 송에서 들여온 사리다. 이 당시 북송 황제 휘종이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를 가까이 하면서 궐내의 어금니사리를 배에 띄워 멀리 떠나보내려 하였는데, 고려의 사신들이 이를 알고 중간에 빼돌려온 것이다. 원래 의상 스님이 아이디어를 내어 지상에 내려온 것이고, 중국에서는 버리려고 했던 것이니 어쩌면 인연에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온 셈이다.

그런데 이 사리가 몽고 침입으로 인한 전란 중에 강화도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 사실도 천도 후 4년이 지난 1236년에 왕실 원당 승려 온광(蘊光)이 친견하고자 하였으나 찾을 수 없어 비로소 알려졌다. 이에 본격적으로 탐문수사가 진행되었는데, 관리 책임자들이 줄줄이 불려가 심문을 당하고 점차 포위망이 줄어들자 결국 훔쳐갔던 누군가가 이를 궁궐 안에 던져두고 도망갔다. 이로써 잃어버렸던 어금니사리를 되찾았다.

당시 왕이었던 고종은 이 어금니사리가 제석천으로부터 7일 기한으로 빌려온 것이기 때문에 결국 기한이 다 차서 스스로 하늘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일연 스님은 실제로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즉, 하늘에서의 하루는 인간세계의 100년에 해당한다는 전제로 7일의 기한이면 700년 동안 지상에 있을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결국 의상 스님이 당에 들어간 해를 661년으로 잡고, 이 사리가 사라진 해를 천도하던 1232년 무렵으로 잡아보면 결국 571년이 지났다는 결론이 된다(그런데 ‘전후소장사리’는 693년이 지났다고 계산을 했는데 아마도 전해지는 과정에서 잘못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상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100여년 정도 더 남아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삼국유사’가 쓰일 무렵에는 여기까지가 우리나라 진신사리의 전후사정이었지만, 우리는 그 이후의 이야기도 조금 알고 있다. 고려말 공민왕 시기에는 왜구의 침입을 피해 통도사의 진신사리가 속리산 법주사로 옮겨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조선이 건국할 무렵에는 다시 개성 송림사로 옮겨와 있었으며, 이를 다시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모셔갔다 한다. 이렇게 옮겨다니면서 통도사 진신사리는 여러 곳에서 분신을 한 모양이다. 태종이 조선의 영험한 진신사리를 수집했을 때, 경상도에 164과, 전라도에 155과, 강원도에 90과, 충청도에 45과 등 총 254과였고, 이성계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진신사리가 300여과였다고 하니 이중의 상당수는 통도사에서 연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들 사리들 중 상당수는 조선초에 명나라 사신 황엄(黃儼)이 와서 싹쓸이 하다시피 중국으로 가져가 버렸다. 그중에는 이성계가 어렵게 구해 흥천사에 봉안한 진신사리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히 이런 난리 중에도 통도사에 봉안되었던 핵심적인 사리들은 지켜졌던 것 같다. 세조 연간에는 어렵게 구한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가운데 분신이 이루어져 무려 800과, 그리고 다음날 400과를 얻었다고 하니 아마도 중국이 빼앗아간 사리들의 빈자리를 채우고 싶은 열망, 나아가 그것을 지키지 못한 반성이 무척이나 강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리라.

그러다 다시금 임진왜란 때 통도사 사리 일부를 일본이 훔쳐가려는 사건이 발생했고, 나머지는 사명대사께서 안전하게 건봉사, 보현사 등지로 피난시키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다행히 종전 후 사명대사께서 일본에 담판하러 가면서 약탈당했던 사리도 되찾아 다시 통도사에 봉안했다. 건봉사와 보현사에도 일부 사리를 남겨 계속 봉안했다고 하니 모두 통도사에서 기원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전통적으로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여겨지는 사찰들은 많은 경우가 이렇듯 통도사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또한 더하여 진흥왕 때 양나라에서 가져온 사리도 있고, 고구려와 백제에도 진신사리가 전래되었을 것이므로, 그러한 진신사리들이 분신 혹은 변신하여 전국 각지의 탑에 봉안된 것이다. 세조 때 회암사의 기록처럼 분신한 사리가 다시 분신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은 분신사리 역시 진신사리와 같은 힘을 가졌다고 믿었음을 보여준다.

‘전후소장사리’는 결국 진신사리의 진정성이란 그것을 전래한 사람의 인품에 대한 믿음, 그 사리의 연원에 대한 역사성,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려고 했던 사람들의 노력이 빚어낸 결과라는 것을 말해준다. 찬한다.

서축에서 일어난 진신사리 바람은
동이(東夷)로 휘몰아쳐 동축(東竺)으로 바꾸었네.
우리의 진신사리 허황하다 하지 말라
외세가 넘보았던 그 역사가 말해주네.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04호 / 2017년 8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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