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통영 미륵산 용화사-미래사-도솔암-관음사
61. 통영 미륵산 용화사-미래사-도솔암-관음사
  •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17.08.28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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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산(綠山)에 서서 벽해(碧海) 바라보며 미륵을 기다리다

▲ 미륵산에서 바라 본 통영 앞바다 한산도 일대 풍경. 시인 정지용은 통영 기행문을 통해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고 했다.

시인 정지용이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 한 동양의 나폴리 통영은 한국 대표 예향(藝鄕)으로도 손꼽힌다.

용화세계 장엄한 미륵산
천혜비경 통영바다 품고
산사와 절 이은 산길엔
고승대덕 선취 스며있어

벽담 용화사·도솔 도솔암
미래부처 강림염원 담긴 듯
구산 창건 편백 숲 미래사
‘효봉 문도’ 성지 자리매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쓴다’고 했던 유치환,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에게로 가서 나는 그의 꽃이 되고 싶다’던 김춘수, 화단에서 ‘바다의 화가’로 통했던 전혁림이 천혜의 비경을 안고 태어난 인물들이다. 독일 공영방송 선정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 선정 ‘유사 이래 최고 음악가 44인(20세기 1인)’으로 뽑힌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 또한 통영의 푸른 바다를 보며 자랐다. 일제 강점기서 풀려나던 1945년, 그들은 일제 잔재 청산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문예부흥을 주도하며 짙푸른 바다에 ‘통영문화협회’를 출범시켰다.

▲ 미륵불 대설법이 미륵산에서 장엄되기를 염원하는 용화사 전경.

통영 문단을 달궜던 그들의 예술 열정을 뒤로하고 남쪽으로 향하면 미륵도(彌勒島)다. 입도방법은 무려 세 가지. 배에 승선해 오를 수 있고, 섬과 뭍을 이은 충무·통영교를 건너 닿을 수 있으며, 바다 아래로 난 길, 해저터널을 가로질러 들어설 수도 있다.

미륵도와 뭍 사이엔 ‘판데목’이라 불리던 해협이 가로 놓여 있었다. 밀물 땐 바다가 되었다가 썰물 땐 육지로 변할 만큼 수심은 얕았다. 임진왜란 당시 한산대첩에서 살아남은 왜군이 이 해협으로 도망가던 중 이순신 수군에 의해 전멸됐다.

▲ 미래사 편백나무 숲길.

일제강점기 통영 군수였던 야마구치 아키라가 통영반도와 미륵도를 연결하기 위해 이 해협을 파 길(1933)을 냈다. 이미 해협을 건널 수 있는 교각이 개통돼 있었는데 굳이 해저터널은 왜 뚫은 것일까? 일설에 따르면 임란당시 전사한 자신들의 조상 영령을 조선 사람들이 밟고 가는 게 거슬려 공사를 강행했다고 한다. 야마구치 아키리가 이 길을 낼 당시 ‘태합굴(太閤堀) 굴착공사’라는 말이 회자됐고, 개통과 함께 ‘태합굴(太閤堀) 해저도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니 터널 뚫은 이유가 짐짓 잡힌다.

‘태합(太閤)’은 일본에서 통용되는 호칭이다. ‘살아도 죽어도 따라야 하는 지엄한 권력자’를 뜻하는데 대표적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이른다. 공사에 투입된 노동자는 조선인. 뜨거운 태양 아래 ‘천근의 돌’을 나르면서도 이순신 장군의 승전을 기억해 내며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가라앉혔을 것이다.  

▲ 미륵불 전망대서 바라보는 통영 앞바다 풍광도 일품이다.

미륵도(彌勒島) 중앙에 우뚝선 산이 미륵산(彌勒山. 461m)이다. 도솔천에 머물고 있는 보살로서 먼 미래 인간세계에 태어나 부처가 된다는 미륵불. 그 미륵불이 중생제도를 위해 설법을 펴는 곳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경전 상으로는 용화수(龍華樹) 아래다. 이 산 자락에 들어선 용화사(龍華寺)는 ‘미륵불 대 설법’이 이곳에서 장엄되기를 염원하고 있을 것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은점(恩霑) 스님에 의해 창건된 이 절은 원래 정수사(淨水寺)였다. 고려 원종 원년(1260)에 산사태로 가람이 쓸려 나가자 3년 뒤 자윤, 성화 스님이 중창하며 천택사(天澤寺)로 개칭했으나 조선 인조 6년(1628) 절은 갑작스런 화재로 인해 폐사 지경에 처해졌다. 화마에 잡힌 절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벽담(碧潭) 스님은 미륵산 정상 부근에까지 올라가 미륵불에게 칠일 기도를 올렸다. 회향 날 밤 한 신인이 나타나 일렀다.

‘나는 미륵불이다. 이 산은 용화회상(龍華會上) 도량이니 가람을 새로 지어 용화사라 하라, 만세(萬歲)에 전해지리라!’

벽담 스님은 서몽의 가르침에 의지해 절을 짓고 천택사에서 용화사(龍華寺)라 사명을 바꿨다.

큰 절 곁에 암자 하나 있다. 도솔암(兜率庵)이다. 미륵불이 머무는 천상세계임을 상징하는 이 도량에 근현대를 대표하는 한 고승이 찾아왔다.  

한국인 최초 판사는 이찬형(李燦亨). 평안남도 금성동에서 태어난 그는 26세에 일본 와세다 대학 법대를 졸업한 후 1913년부터 1923년까지 법관직을 수행했다. 1923년 어느 날, 그는 피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 당사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가 법관생활을 하고 있던 조선 땅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노골화되던 시기였다. 또한 3.1 독립운동과 함께 상해에는 임시정부가 수립되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을 갈구하는 소리 없는 외침이 거세지고 있던 때였다. 그는 고뇌에 휩싸여 있었을 것이다. 일본이 제정한 법률로 같은 민족에게 판결을 내리고 있었으니, 살을 헤집고 뼛속을 파고드는 고통이 수반된 고뇌였을 터. 사형선고를 내린 후 결단을 내렸다.

▲ 미래사 주차장 옆에 효봉 스님과 구산 스님의 부도가 봉안된 부도전이 있다. 부도전을 지나 산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미륵불 전망대'다.

‘이 세상은 더 이상 내가 살 곳이 아니다.’

엿판을 메고 길을 떠났다. 그 세월만 3년. 참회의 길이요 구도의 길이다. 1925년 여름,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 주석하고 있던 ‘돌머리’ 석두(石頭) 스님을 은사로 사문의 길로 들어섰다. 가야총림과 통합종단 조계종 초대 종정을 역임한 학눌 효봉(學訥 曉峰) 스님이다.

신계사 미륵암 여름 안거(1927)에 들 때 효봉 스님은 대중 앞에서 이렇게 다짐했다.

‘저는 반야에 인연이 엷은데다가 늦게 중이 되었으니 한가한 정진은 할 수 없습니다. 입방선(入放禪)도 경행(經行)도 하지 않고 줄곧 앉아 정진하겠습니다.’

가부좌를 틀고서는 꼼짝 않고 여름 한 철을 보낸 효봉 스님의 엉덩이는 헐고 진물이 흘러 나와 끝내 방석이 엉덩이에 붙어버렸다. 훗날, 후학들은 효봉 스님을 ‘절구통 수좌’라 칭송했다.

6.25 한국전쟁 발발 직후 효봉 스님은 구산(九山)을 비롯한 제자들을 데리고 10년 동안 머물던 송광사를 떠나 대흥사로 향했다. 그러나 발길은 충무 통영에 닿았고, 도솔암에 걸망을 내려놓았다.

이 도량에서 효봉 스님은 처음으로 우바이에게 법명을 지어주며 가르침을 담은 게송을 지어 주었다. ‘티끌세상 벼슬길에/ 송죽(松竹) 같은 마음을 세우라./ 평탄함은 적고 험준함이 많으니/ 걸음 걸음마다 살피고 살펴라./ 또/ 본래의 진심을 지키는 일이/ 염불이나 독경보다 훨씬 뛰어나다.’ 우바새에게도 게송을 지어주었다. ‘널리 세간의 일을 보라/ 거스르고 순함이 다 나 때문이다./ 모든 것에 간섭치 않으면/ 몸과 마음 항상 안락하리./ 염불정진 하면/ 온갖 고통 사라지리라.’ 근기에 따라 수행의 길을 제시했던 효봉 스님이다. 출재가자에게 법명을 지어주며 내린 게송 30여 수가 전해지고 있다.

▲ 효봉 문도의 산실 미래사.

효봉 스님의 첫 제자 구산 스님은 석두, 효봉 스님의 안거를 위해 절을 지었다. 미륵불 맞이할 절 ‘미래사(彌來寺)다. 측백나무 숲 한 가운데 자리한 미래사는 이후 효봉 문도의 산실이 되었다. 효봉 스님의 제자 법정(法頂) 스님이 이 도량에서 처음 삭발했고, 시인 고은 또한 일초라는 법명으로 원주소임을 보며 효봉 스님의 향훈에 젖은 바 있다.

미래사에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미륵산 정상이다. 이순신 장군이 품었던 차가운 달빛 내리는 한산도, 백사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비진도는 물론 지리산과 대마도까지 조망할 수 있는 미륵산이다. 자연풍광을 탐하지 않았을 효봉 스님이지만 도솔암과 미래사에 머무는 동안 1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여기를 안 오를 일 없다. 섬과 섬 사이 호수가 자리한 듯한 통영 앞바다 풍경을 바라 본 효봉 스님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미륵산은 아니지만 밀양 영남루에 올라 지은 선시 한 편을 통해 효봉 스님이 안았을 선취를 엿본다.

‘허공 누각에 홀로 앉으니 온갖 풍광이 아래 드네/ 가슴엔 우주를 품고 손바닥 위엔 세월을 드러낸다./ 사람이 곧으매 늘 말이 없으며 물이 잔잔하매 흐르지 않는데/ 석양에 고기 낚기 이미 마치고 달 밝은 갈밭에 학과 더부네.’

▲ 가깝게는 '토지' 작가 박경리 문학관과 거북선으로 왜선 21척을 격침시킨 당포성지가 보이고, 멀리 사진왼쪽부터 욕지도, 상노대도, 곤리도, 추도, 두미도가 시야에 잡힌다.

오탁악세의 말법시대에 출현한다는 미륵이기에 미륵불은 희망의 아이콘이다. 그러나 또한 평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장아함부’의 ‘전륜성왕수행경’에 이런 대목이 있다.

‘견고왕(堅固王)이 전륜성왕이 되어 천하를 정법으로 다스렸다. 그가 다스린 세상의 인간 수명은 팔만 세에 이르고 대지는 평탄하고 오곡이 풍성해진다. 어지러웠던 사회질서가 회복되고 무력이 아닌 정법정치가 실현된다. 그 때, 미륵여래가 세상에 출현한다.’

기다리기만 한다고 오는 미륵세계가 아니다. 정토세상을 일궈 가려는 신심과, 미륵의 자심(慈心)에 시비다툼을 넘어선 상생화목이 무르익어 이 땅에 흐를 때 맞이할 미륵이다. 먼 훗날의 일이기만 할까?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라 하지 않는가. 절과 절을 잇는 산길을 걷다가 만난 사람에게 건넨 가벼운 인사, 미륵산 정상에서 다도해를 감상하며 차오른 환희심을 뭍으로 가서도 잊지 않을 때, 미륵은 우리 곁에 서 계실 것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용화사 주차장. 용화사에서 나와 산으로 난 큰 길을 따라 걸어가면 띠밭등. 띠밭등에서 갈라진 두 길 모두 미래사로 향한다. 아랫길은 한 사람 정도 걸을 수 있는 산길이고, 윗길은 4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넓은 산길이다. 미래사 주차장에서 부도전을 끼고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미륵불전망대다. 미래사에서 미륵산 정상까지 1시간이면 충분하다. 용화사-미래사-미륵산-도솔암-용화사 주차장 원점회귀 코스에 소요되는 시간은 2시간 30분. 미래사 주차장을 시작으로 원점회귀해도 좋다.

 

이것만은 꼭!

 
도솔암: 효봉 스님 이전부터 초음(初音), 자엄(慈嚴) 등의 고승들이 수도한 도량으로 한 때  남방제일선원(南方第一禪院)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도솔암에서 바라보는 통영 앞바다도 좋다.

 

 

 

 
관음사: 아담하면서도 예쁜 절이다. 절로 들어서는 석문에 ‘당래선원(當來禪院)’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땅에 오실 미륵불을 모실 절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거지전(車遲殿)이라는 특이한 전각이 있는데 ‘천천히 수레를 굴려라’라는 뜻이다. 보조지눌의 점수사상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미래사 종각: 십자팔작누각(十字八作樓閣) 형태의 건물로써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종각이다. 종각 앞 삼층 석탑에는 티베트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 3과가 봉안되어 있다.

 

 

 

 
미래사 도솔영당: 효봉 스님을 중심으로 석두, 구산, 종욱 스님 등의 고승들의 진영이 봉안돼 있다. 미래사 주차장 앞에도 효봉 스님을 모신 부도전이 있다.

 

 

 

[1405호 / 2017년 8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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