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1. 소나무에 앉은 학의 발밑이 한바탕 망신이지-상

깨끗함과 순수함은 더러움 가리는 일시적 장막

▲ ‘발 아래가 한바탕 망신이지(脚底下一場懡儸)’고윤숙 화가

사시사철 변함없이 푸른데다 품격 있게 뻗은 가지로 격조 있는 풍모 소나무, 그리고 그 가지 위에 고고하다는 말을 표상하려는 듯 긴 다리로 높이 올라 목을 더할 수 없이 길게 뻗은 학을 그린 송학도는 중국과 조선, 일본에서 오랫동안 그려져 온 그림일 뿐 아니라, 지금도 자개장이나 찻주전자 같은 일상용품에서도 아주 쉽게 보게 되는 그림이다. 심지어 화투장 첫머리에 그려놓은 것도 바로 이 송학이다! 동아시아 3국 모두에서 이리 인기가 있었던 것은 학이 이른바 ‘10장생(長生)’ 중 하나여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어서 그렇다 하겠지만, 그뿐 아니라 소나무와 함께 그려질 때는 고고한 지조와 절개 같은 덕의 상징이란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둔 것일 텐데, 한 스님이 정과(淨果)에게 물었다.

순백의 눈에 덮힌 순수하고 맑은 세상도
태양 비추면 눈 녹으며 더러운 땅 드러나
승속 구분하는 순간 망신은 피할 수 없어

“높은 소나무 위에 학이 서 있을 때는 어떠합니까?”
“발아래가 한 바탕 망신이지(脚底下一場懡儸).”

지조가 높고 고고하지만 어딘가 발 딛고 서지 않을 수 없는 한, 발을 더럽히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일 게다. 아무리 고고한 새라도 먹어야 할 터이니 땅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거나 산 것을 잡아먹어야 한다. 더럽지 않은 고고함, 그런 깨끗한 순수함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정과에게 물었던 스님이 다시 묻는다.

“모든 산에 눈이 뒤덮였을 때는 어떠합니까?”
“해가 솟은 뒤에 한 바탕 망신이지(日出後一場懡儸).”

눈이 모든 산을 덮었으니, 산 전체가, 산 아래 마을도 모두 하얗게 되었을 것이다. 매년 보면서도 볼 때마다 탄성을 지르는 장면 아닌가. 깨끗한 순백의 눈으로 뒤덮인 세계, 더러운 것이 모두 사라진 순수의 상징이다. 이에 대해 정과는 앞서와 멋지게 운을 맞추어 말한다. 해가 솟은 뒤 한바탕 망신이라고. 해가 솟으면 눈이 녹을 것이고, 눈이 녹으면 순백의 눈 밑에 숨어 있던 ‘더러운’ 세계가 드러난다. 깨끗함이나 순수함이란 이 더러움을 가리는 일시적 장막에 불과하다는 듯. 사실 요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눈 온 뒤가 더 더럽고 지저분하다. 밟히고 녹아 더러워진 눈이 여기저기 튀기에.

그 스님은 다시 한 번 묻는다.

“회창(會昌) 연간의 불법사태를 겪을 때 호법선신(護法善神)은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삼문 밖 두 놈이 한 바탕 망신이지(三門外兩笛漢一場懡儸).”(‘벽암록’, 중, 114)

회창 연간, 불교가 크게 탄압받던 시절에 불법을 수호한다는 선신들은 대체 무얼 했느냐는 질문인데, 정과는 또 다시 ‘한 바탕 망신’이란 말로 받는다. 직접적인 의미는 불법을 보호해주지 못했으니 호법선신들의 무능력을 드러낸 망신이란 말이지만, ‘삼문 밖’에서 불법을 지키라고 호법신들을 세운 이의 망신이고, 근본적으로는 안팎의 경계를 만들고 드나드는 문을 만든 이들의 망신이라 할 것이다. 불법이나 불교의 영역을 따로 설정하고, 그것으로 내외를 구별하며, 그렇게 구획한 영역을 지키려는 발상 자체가 망신이란 말이다. 사실 어디든 섞여 들어간다면 따로 지킬 것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따로 탄압할 수도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절이나 승려가 없을 수 없다면 탄압을 어찌 피하겠느냐고 고지식하게 물을 수도 있다. 허나 ‘한 바탕 망신’이란 말은 불법에 성속이 없고 내외가 없듯이 불교 또한 성속이 없고 내외가 없어야 한다는 것 이었을 게다. 고결함이나 순수함이 따로 경계가 없어야 하듯이. 남전이 했다는 다음의 대중설법은 바로 이런 의미라고 나는 믿는다.

“황매산 700고승은 모두가 불법을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그[5조]의 의발을 얻지 못하였으나 노행자(盧行者, 혜능)만은 불법을 알지 못하였기에 의발을 얻었다.”(벽암록 중 218)

‘정과의 세 가지 망신’이라고 한다는 멋진 세 문답의 요체는 하나다. 순수함이나 고고함, 혹은 지고한 불법의 영역을 별도로 설정하는 순간 ‘망신’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 우리는 이를 불교뿐 아니라 세간에서도 자주 보게 된다. 가령 미술이 그랬다. 순수를 추구하는 이런 통념을 그럴듯한 예술이론으로 바꾸어 순진할 정도로 고집했던 것은 20세기 중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였다. 그는 20세기 이후 현대미술이란 캔버스 평면상에서 공간적 환영을 해체하는 과정이라고 간주한다.

약간 부연하자면, 르네상스 시대 이후 서양의 회화는 2차원 평면상에 3차원의 입체감을 갖도록 그림을 그렸다. 15세기 피렌체에서 발명된 기하학적 투시법(종종 ‘원근법’이라고도 한다)이 이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투시법이 만드는 입체감은 사실 평면상에 만들어진 가상이다. 평면이지만 깊이를 갖는 3차원 공간인 듯 느끼게 하는 ‘공간적 환영’을 만드는 것이다. 현대회화의 시작으로 간주되는 시기에 가령 브라크, 피카소의 그림은 여러 개의 시점에서 본 상을 하나의 평면에 병치하여 이런 투시법적 공간감을 해체했다. 가령 앞 얼굴과 옆얼굴을 하나의 얼굴로 통합해서 그리거나, 등이 보이는 몸에 정면 얼굴을 그린다든지 하는 게 그것이다. 1940년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인 바넷 뉴먼이나 마크 로스코는 색칠된 거대한 평면들만으로 그림을 그렸다. 2차원의 평면만 남은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린버그가 보기엔 이것이야말로 브라크, 피카소 등이 시작한 ‘공간적 환영의 해체’의 정점이었다.

이런 식의 생각은 미술을 회화로 제한한 것을 젖혀둔다 해도, 회화만의 고유한 것, 회화의 순수한 본질이 바로 캔버스의 평면이라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현대회화의 역사는 회화의 그런 본질을, 순수성을 추구하는 과정이라는 주장인 셈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 그는 20세기 회화의 매우 중요하고 거대한 유파들을 전부 미술에서 추방해버린다.

이렇게 회화의 본질을 규정하면, 단색 평면이 출현한 이후 화가는 더 이상 할 게 남지 않는다. 어떤 걸 그려도 평면이라는 본질로부터의 후퇴고 회화의 순수성을 침해하는 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색의 평면조차, 캔버스 천을 팽팽하게 당겨주는 테두리를 갖는다. 캔버스 자체가 사실 3차원의 입체인 것이다. 또 하나, 테두리는 그것이 주위와 분리된 ‘공간’을 만들기에 어느새 또 다시 공간적 환영을 만든다. 이를 앞서 정과와 스님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그림에서 모든 공간적 환영을 제거했을 땐 어떠합니까?”
“캔버스 테두리가 한바탕 망신이지.”

모든 공간적 환영을 피하는 방법은 눈앞에 없는 걸 그려서 보여주려는 순간 피할 수 없다. 그걸 피하는 방법은 그리는 대신 그냥 사물을 눈앞에 갖다놓는 것이다. 도널드 저드가 바로 그렇게 했다. “당신이 보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당신이 보는 것이다”라고 하며. 다시 정과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 같다.

“붓을 든 손이 한 바탕 망신이지.”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405호 / 2017년 8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