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망명정부 전 총리, 삼동 린포체
티베트 망명정부 전 총리, 삼동 린포체
  • 주영미 기자
  • 승인 2017.09.04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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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이어진 건 부처님 가르침 올곧이 실천한 수행자 덕분”

▲ 삼동린포체는“불자들이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온 세상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국티베트불교사원 광성사에서 부처님 법을 설하고 들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은 큰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저는 종카파 대사의 가르침 가운데 연기를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찬탄하는 ‘연기찬탄송’에 대해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기찬탄송’은 대사의 가르침 가운데 최고이며 핵심입니다.

부처님가르침 핵심 연기
아집을 깨뜨릴 수 있는
최고 방법은 연기 이해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이를 그대로 실천하면서
널리 알리도록 노력해야


용수보살께서 지으신 중론, 세친 보살께서 지으신 유식, 이 두 가지에 대해 종카파 대사가 그 핵심을 게송으로 남기셨습니다. 광대하고 깊은 내용을 한 번의 법회로 모두 말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에 중요한 내용을 조금씩 여러분들에게 일러드리겠습니다. 저는 ‘연기찬탄송’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보는데 그것을 토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부처님을 향한 찬탄과 법문을 핵심 요약해서 설명하기’입니다. 두 번째는 부처님을 찬탄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 연기법의 측면에서 부처님을 왜 찬탄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실제 ‘부처님 찬탄하기’입니다. 네 번째는 종카파 대사가 ‘연기를 통해 부처님을 찬탄하게 된 계기와 본인이 부처님의 경, 론을 문사수(聞思修)로 어떻게 배웠는가, 또 제자들이 부처님의 법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마지막은 ‘부처님을 찬탄하고 난 뒤 생기는 공덕들을 모든 중생에게 회향하기’입니다. 

첫 번째 ‘예경 올리기’는 “스승이신 본존께 고개 숙이기 입니다. 연기법을 완전히 깨달았기에 최고의 지혜를 갖추셨으며, 연기를 자재로 설하시기에 위없는 설법자이신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라고 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무엇을 완전히 깨달았기에 최고의 지혜를 갖추셨는지, 무엇을 설하셨기에 최고의 설법자로 불리시는 걸까요? 그것은 연기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기법을 완전히 깨달아 통달하신 분이며 연기법을 자유자재로 설하시기 때문에 완전한 설법자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 면에서 완전하게 깨닫고 설하시기 때문에 부처님께 예경을 올리는 것입니다.

세간은 무상합니다. 육도 윤회하는 중생의 모든 허물은 ‘내가 있다’라고 하는 아집으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그 아집을 멸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연기를 깨닫는 지혜입니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이유는 중생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육도 윤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바른 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를 깨닫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연기를 통해서 부처님을 찬탄하는 방법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두 번째 측면, 즉 부처님을 찬탄하는 이유입니다.

연기법을 간단히 설명하면 ‘의지해서, 의존해서 존재하는 법’입니다. ‘의지해서 존재하다’라는 표현은 여러 설명 방법이 있습니다.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생기는 ‘인과의 연기법’이 있습니다. 또 결과라고 하는 것 자체가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상호의존적인 연기법’이 있습니다. 상호의존적 연기법은 인과 연기법보다 한 단계 더 깊은 단계입니다. 그리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은 이름만으로 생각만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자성의 연기법’입니다. 이렇게 인과, 상호의존, 무자성까지 세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연기에 대한 설명 중에서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연기법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것은 인과의 연기법이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상호의존적인 연기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인에는 조건이 달려 있으며 조건에 의지하는 것은 모두 실체가 없습니다.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티끌만큼도 없기 때문입니다. 

범부중생은 연기하기 때문에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아집과 아상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연기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고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연기법은 지혜로운 이에게는 아상과 아집을 멸하게 하고, 어리석은 이에게는 아상과 아집을 굳게 만드는 배경이 됩니다.

연기의 가르침은 어디에서도 제대로 들을 수 없고 오직 부처님에게서만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만이 최고의 설법자라고 표현합니다. 티베트에서 ‘설법자’라는 표현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외도에게 설법자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마치 여우를 사자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만이 설법자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세 번째 ‘찬탄하기’는, “세존이시여, 경이로운 귀의처이시여, 설법자이시여, 위대한 구세주이시여, 연기를 바르게 설하신 설법자이시여”라고 하는 대목입니다.

종카파 대사는 “부처님께서 대자비로 모든 중생을 돕기 위해 설하시어 불법의 정수인 ‘공성’을 최상의 논리로 가르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연기법이기 때문에 무자성이며 이것이 최고의 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공성을 깨닫는 방법은 바로 연기의 논리라고 해서, ‘연기이기 때문에 자성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외도이거나 불교도 가운데서도 연기를 인정하지 않는 학파가 있습니다. 이들 또한 연기를 바르게 보면서 공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종카파 스승님은 당부하셨습니다. 대사는 “부처님께서 공성을 연기의 뜻으로 보셨기에 자성이 없는 것과 인과 사이에 모순이 없다. 이와 반대로 공하다고 인과를 부정하고 인과라고 공을 부정하면 무서운 극단에 빠지게 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무자성이라고 해서 ‘실체가 없다’라고 할 때 잘못하면 ‘아예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예 없다’라고 하면 극단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자성이 없는 것과 연기법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보면 양 극단에 빠지는 것입니다. 모순이 없다고 보면 연기를 이해할 때 ‘실체가 없구나’로 이해하고 ‘실체가 없구나’ 라고 할 때 ‘연기가 있구나’라고 이해하면 양 극단으로 빠지지 않고 심오한 공성의 뜻을 잘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기하지 않는 어떤 존재도 없기에 “공을 벗어나는 어떤 존재도 없다”고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성은 변할 수 없다”라는 구절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자성이 있다고 하면 그 무엇도 바꿀 수 없게 됩니다. 자성이 있다면 해탈마저도 불가능합니다. 열반은 불가능합니다. 윤회하는 것은 계속 윤회하고, 해탈하는 것은 계속 해탈하게 됩니다. 윤회하는 중생이 해탈할 수 있다는 말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성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무자성이기 때문에 변화할 수 있고 해탈할 수 있고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 모두 가능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번도 아니고 거듭해서 사자후로 “제법이 모두 공하다, 제법무상, 제법무아, 일체 법이 자성이 없다, 자아가 없다, 모두 무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 조금도 반박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자성이 없는 것’과 ‘이것에 의지해서 저것이 생기는 연기법’의 둘 사이에 모순이 없는 것입니다. ‘모두 없다’는 표현에 대해 무조건 허망하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연기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연기법뿐만 아니라 무자성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경이롭고 훌륭한 말씀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도 연기를 찬탄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찬탄의 방법입니다.

부처님 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그 가르침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모두 연기법을 토대로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연기를 설하심으로써 눈앞에 드러난 부분과, 우리가 볼 수 없는 불가사의한 부분까지 상견과 단견을 완전히 없애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무아, 연기법보다 더 불가사의한 육도윤회와 불국토 이론도 연기의 가르침을 적용해서 믿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을 따르는 불자들은 허물을 점차적으로 소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뿌리, 무지를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불법과 반대로 가는 외도와 같은 분들이 오랫동안 고행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불교사상과 다르게 수행을 하게 되면 아집이 굳어지기 때문에 허물이 줄어들지 않고 늘어나기만 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가 외도와 불교의 차이를 깨닫는 순간 부처님을 온전하게 믿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종카파 대사가 문, 사, 수를 어떻게 하셨는지, 연기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셨는지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부처님의 많은 가르침을 다 배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대신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 작은 구절 하나라도, 피상적으로만 이해해도,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종카파 대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처님께 직접 듣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셨습니다. 하지만 관상을 통해서 법당에 부처님을 모시는 것처럼 부처님의 상을 떠올리면 이 애절한 마음이 사라진다고 하셨습니다. 대사는 연기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여러 논서를 통해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공부를 하셨습니다.

부처님 법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문, 사, 수를 통해 전해지고 계·정·혜 삼학을 통해 실천하는 수행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불교가 3000년 가까이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대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수행 정진, 다시 말해 배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내용을 마음과 일치시키면서 오랫동안 관찰한 결과로 부처님을 공경하고 찬탄하게 되셨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향’을 당부하셨습니다. 불교도들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온 세상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도록 발원해야 합니다. 더불어 불법을 지킨 호법신들이 항상 우리를 지켜주도록 발원해야 합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 8월10일 한국티베트불교사원 광성사(주지 소남 스님)에서 봉행된 ‘삼동 린포체 초청 연기찬탄송 강설법회’에서 린포체가 설한 법문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1406호 / 2017년 9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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